• “모든 이슬람 분파는 자본주의자다”
        2009년 07월 13일 09: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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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드 라네마

    이슬람 성직자 독재에 맞선 이란 민중의 투쟁이 한창이다. 그런데 전 세계 좌파 사이에서도 이 투쟁을 어떻게 바라볼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한창이다. 혹자는 ‘이란 이슬람 체제 대 미 제국주의’라는 대립관계만을 중심에 놓고서 반동적 성직자 체제를 무작정 옹호하기까지 한다. ‘좌파’의 이름으로 말이다.

    아래 소개하는 이란 출신 좌파 정치학자 사이드 라네마(캐나다 요크대학 정치학 교수)의 글은 이러한 시각을 교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난 7월 10일 미국의 진보적 웹사이트 <Znet>에 발표한 글이다.  <역자 주>

    서방 언론은, 좌파든 우파든, 이란에서 벌어진 선거 쿠데타와 그에 뒤이은 반대파 투표자들의 봉기 및 그 억압에 자극받아 온갖 종류의 분석들을 쏟아내었다.

    주로 네오콘 이데올로기와 반동적 관점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우파는 왕정복고를 꿈꾼다. 그들은 불만을 품은 이란 대중들 사이에서 친미/친이스라엘 동맹군을 찾고, 동유럽 식 벨벳 혁명을 추구한다. 이러한 분석들은 내용이 별로 없기 때문에 비판할 가치조차 없다. 그들이 복잡한 이란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다.

    그런데 서방 좌파의 경우에도 심각한 혼돈이 나타나고 있다. 진보 좌파는 처음부터 이란 시민사회 운동을 분명히 지지했다. <Znet>,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캠페인>, <불렛(총탄)> 그리고 여타 언론은 복잡한 이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올바른 분석을 제공했다. 어떤 지식인들은 이란 동지들과 함께 선언서에 서명한 반면 또 다른 일부는 계속 침묵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마치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무비판적으로 반제국주의의 주역으로 칭송받는 가자나 레바논 상황처럼, 아마디네자드가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외관상 강경한 언사를 내뱉었다고 해서 좌파의 일부 논자들이 그를 반제국주의의 주역으로 떠받드는 걱정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혹자는 조잡한 계급 분석에 기반해서, 아마디네자드가 부유층에 맞서는 캠페인을 벌였다며 마치 그가 가난한 노동 대중을 지원한 것처럼 상상하면서 노골적으로든 은연 중에든 그를 칭송하기도 한다.

    이러한 분석들 역시 생동하는 이란 시민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참된 운동을 무시하며, 민주주의와 정치적 개인적 자유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서방 정치 선전에 부화뇌동하는 중간계급의 관심 정도로 폄하해버린다. 이것은 바로 하메네이, 아마디네자드와 그 지지자들이 갖고 있는 시각이기도 하다.

    이슬람주의에 헛된 기대를 거는 일부 서방 좌파

       
      ▲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는 바시즈 민병대(왼쪽)와 경찰 발포로 사망한 시민의 사진을 들고 시위하는 이란 민중

    가장 기괴한 사례는 <먼슬리 리뷰>의 자매지인 온라인 저널 <MRZine>이다. 이 저널은 어떤 때는 바시즈(이란의 이슬람 민병대)의 무뢰한과 범죄자들의 정치 선전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이 웹사이트는 친이슬람주의 필자들에게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해왔다. 이들은 결코 좌파라고 할 수 없는 위인들이지만,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좌파들은 이들의 주장을 높이 평가한다.

    한 필자는 이란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복지 개혁과 사적 소유권” 사이의 투쟁이며 아마디네자드는 “이란 재계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자 계급을 격분케 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아마디네자드는 “이란의 금융 보수파 후보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이 필자는 이슬람 혁명 수비대 안의 아마디네자드 파벌과 그를 지지하는 보수 성직자 세력이 장악한 또 다른 만만치 않은 “재계 이해”에 대해서는 언급도 안 하는 편의적 태도를 취한다. 아마디네자드가 국가 소유 주식을 자신의 패거리에게 넘겨주는 등 “사유화” 정책을 충실히 따른다는 점 역시 언급하지 않는다.

    1979년 혁명기에, 지금은 사라진 투데당(과거 이란 공산당-역자)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이슬람 체제의 요소들 속에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과 “사회주의적 지향”을 추구하는 “비자본주의자들”을 찾으려고 헛된 노력을 계속했다.

       
      ▲ 1979년 이란 혁명 당시의 대중 시위

    이제는 <MRZine> 저널이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희귀 생물종을 찾으려고 새로운 탐사 작업에 나선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슬람 체제의 모든 분파는 항상 철저한 자본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즈미 비샤라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란

    <MRZine>에 전재된 “이란: 대안적 독해”라는 글에서 아즈미 비샤라(이스라엘 안에서 팔레스타인인의 이해를 대변하여 의회에 진출하기도 했던 저명한 진보파 아랍-그리스도교계 정치인-역자)는 이란의 전체주의 통치 시스템은 다른 전체주의 시스템들과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이란의 시스템은 ‘지배 질서와 그 이데올로기 안에 참으로 높은 수준의, 헌법에 명문화된 민주적 경쟁’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비샤라는 이러한 ‘경쟁’이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며, 온건파 무슬림이나 광범한 세속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좌파 등 다른 세력은 이슬람 체제의 반민주적 기구에 의해 배제당하는 현실은 설명하지 않는다.

    비샤라가 제시하는 두 번째 차이점은 ‘통치 기구에 스며들어 있는 공식 이데올로기가 압도적 다수의 인민이 받아들이는 진짜 종교’라는 점이다. 다수 이란인들이 무슬림이고 시아파라는 점에서는 그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

    하지만 모든 이란인들이 종교적이라거나 집권자들이 신봉하는 것 같은 반계몽적인 근본주의 신조를 따른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또한 그는 이란에 상당수의 비종교 인구가 존재하며, 그 비중이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들 중에서 가장 높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이란에 존재하는 ‘정치적 다양성에 대한 상당한 관용’, ‘비판의 허용’ 그리고 ‘권력의 평화적 교체’를 칭송한다. 이쯤 되면 우리의 저명한 팔레스타인 정치가가 진짜 이란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상상 속의 이란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인지 헛갈릴 만도 하다.

    비샤라는 수천 명의 정치범 학살, 지식인들을 목 졸라 죽인 참극, 그리고 이 나라 안에서 가장 유능하고 진보적인 목소리들이 침묵을 강요받아온 것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는 말인가?

    그는 12명의 비선출직으로 이뤄진 보수파 기구(혁명 수호 평의회)가 소수의 믿을 만한 사람들만 대통령이나 의회에 출마하도록 허용한다는 것을, 그리고 진짜 ‘권력’인 최고 지도자는 교체되지 않으며 성직자 총회에서 지명되기만 하면 종신 집권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선출되지 않은 지도자가 억압적 국가 기구를 주도하며, 1993년부터는 신속한 억압 행사를 위해 최고 지도자 직속의 ‘벨라야트 특공대'(NOPO)까지 거느리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관용이고 민주주의다.

    비샤라는 참된 대중 개혁 운동을 무시하며, “개혁파 집권의 기대는 … 아마디네자드에 반대하는 서방 및 비서방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샤라는 글을 쓰기 전에 우선 다수의 여성 조직, 청년, 교사 그리고 일부 노동자 집단이 주도하는 대중 캠페인에 대해 배웠어야만 했다.

    그는 우리에게 ‘엘리트주의’와 ‘거만한 계급적 우월감’을 갖는 것에 대해 경고하면서, 이러한 운동들이 ‘중간계급적인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젊은이들 중 다수가 아니라 특정 계급에 속한 젊은이들 중 다수”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가 빈곤층 젊은이들 중 대다수가 아마디네자드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제임스 페트라스의 메시지 : 좌파에게 자유는 중요하지 않다?

       
      ▲ 테헤란의 부정 선거 항의 시위 – 6월 16일


    가장 충격적인 글들 중 하나는 명망 있는 좌파 논객이자 학자인 제임스 페트라스의 것이다. 그는 ‘이란 대선 : ‘부정 선거’라는 장난질’이라는 글에서, 이란 대선에서 아무런 부정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아무런 신뢰성도 전문성도 없으면서, 몇몇 이란 소도시 투표 결과의 통계학적 묘사를 통해 이런 확신에 도달한다.

    엄청난 선거 부정의 증거들이 수도 없이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페트라스의 증거와 ‘정보들’을 반박하려고 시간 낭비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의 분석에 집중하겠다.

    페트라스 글의 기절초풍할 측면은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닫자마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발적으로 거리에 뛰쳐나와 참으로 열정적으로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정치적 자유를 부르짖은 용감한 여성, 청년, 교사, 공무원 그리고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다는 점이다. 대신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안락한 상류 계급의 은신처”, “잘 차려입고 영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젊은이들 운운하는 돌발적인 언급들이다.

    여성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없으며, 공개 체형, 일부다처제 그리고 합법적인 성 차별 같은 참으로 반계몽적인 정책들에 맞선 여성들의 놀라운 투쟁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식도 없다. 현재 다수가 투옥 상태인 노동조합 운동가들, 작가들 그리고 예술가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대신 페트라스가 강조하는 것은 조잡한 계급 분석에 따른 주장들이다. “투표 결과 통계는 고소득층, 자유시장를 지향하는 자본주의 지지자들과, 종교 계율에 따라 고리대와 이윤 추구를 제한하는 ‘도덕 경제’의 지역사회 지지자들, 노동계급, 저소득층이 서로 대립하게 만드는 진정한 계급 양극화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보다 더 엉뚱하고 잘못된 해석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인 계급 갈등 패러다임에 아주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상상 속의 저 이슬람 경제학까지 더한다면 더더욱!). 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보수파, 개혁파 양편의 고위 성직자들 모두 “시장 지향 자본가들”이며, 이슬람 수비대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기업을 경영하고 무역을 독점적으로 통제하며 주요 부동산 개발자들이다.

       
      ▲ 아마디네자드를 나치에 비유한 포스터

    노동자들 역시 양편에 나뉘어 있다. 경제 정책의 실패, 30%로 치솟은 물가인상률, 실업난 그리고 노동조합 탄압 때문에 다수의 노동자들이 아마디네자드로부터 등을 돌렸다.

    정부의 가혹한 방침에 맞선 이란 자동차 회사 노동자들의 성명서, 테헤란 공공운수 회사 노동자들의 장기 파업과 거리 충돌 그리고 선거 직후의 봉기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 이 모두가 아마디네자드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 사례들이다.

    또한 이슬람주의자들의 ‘도덕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역시 단견이다. 보수파, 개혁파 양편 모두 횡령과 부패에 연루돼왔고, 이 사건들 중 상당수는 이들 사이의 말싸움 과정에서 폭로돼버렸다. 서로 상대방의 부패를 폭로했던 것이다.

    페트라스는 상황에 대한 자신의 제한된 이해를 바탕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반대파의 패배를 낳은 엄청난 표차를 보면, 이들이 인민의 핵심 관심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다른 많은 이들처럼 페트라스 역시 이 “반대파”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집단과 범주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더 고약한 것은 그가 이란 여성, 청년, 노조 운동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에게, 정치적 개인적 자유, 인권, 민주주의, 성 평등 그리고 노동권에 대한 그들의 요구와 “관심”들은 “핵심”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란 좌파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로파가(동지들), 당신들이 고문받고 감옥에서 썩는다 하더라도, 당신들의 책이 불타고 직장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오. “노동계급”은 정부로부터 보조금과 구호 물품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오.” 페트라스 교수와 그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와 특권이 문제가 된다면 이렇게 관용하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좌파는 역사적으로 진보 운동들과의 연대에 뿌리를 내렸다. 여성과 노동조합의 권리와 그 외침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의 요구였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오늘날 좌파의 일부로부터 나오는 외침은 반동적이다(진보적이 아니라). 종교 근본주의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서 그들이 반제국주의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이라는 잘못된 가정 아래 역사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것은 반동 좌파다. 진보 좌파는 이와 다르다. 진보 좌파는 항상 진보하는 세력들 편에 서왔다.

    지젝 역시 중요한 점을 놓치다

    신좌파의 저명한 대변자 슬라보이 지젝은 훨씬 더 존경할 만하고 널리 읽힌 글에서 이란 사태에 대해 역사적으로 접근했다.

    지젝은 “무사비 지지자들이 … 자신들의 행동을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의 반복으로, 이후 부패해버린 혁명의 만회를 위해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바라본다”고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호메이니 혁명의 기만당한 지지자들의 참된 대중적 궐기”를, “호메이니 혁명의 ‘억압된 것의 귀환’”을 목도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 무사비와 그 참모들

    지젝은 1979년 혁명 당시의 “호메이니 지지자들”과 자유주의적이든 좌파적이든 비종교적 세속적인 요소들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는다. 후자는 실제로 혁명을 처음 시작한 세력이며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호메이니의 지도력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때로 절망스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커다란 오류다.

    그 연장선에서 지젝은 오늘날의 모든 운동이 무사비 지지 입장인 것으로 잘못 규정한다. “무사비는 … 호메이니 혁명을 떠받치던 대중의 꿈의 참된 부활을 상징한다.” 자신의 주장을 실증하기 위해 지젝은 “혁명 첫 해의 믿기 힘든 활기(‘끓어오름’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역자)”에 대해 언급한다.

    사실 혁명 첫 해 혹은 미 대사관 인질 억류 이전의 ‘활기’는 호메이니를 지지하지 않은 세력들의 행동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노동자 평의회 운동, 쿠르디스탄과 곤바드에서 벌어진 페다이스(Fedais. 이슬람 체제 등장 전부터 무장 혁명 투쟁을 벌이던 맑스-레닌주의 조직. 현재는 망명 상태에서 이슬람 체제 전복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독일 좌파당과 긴밀한 연대를 맺고 있다-역자)와 여타 좌파 조직들의 무장 투쟁, 여성과 대학가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당시는 호메이니와 그 지지자들이 아직 권력을 공고히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인질 억류 위기와 이란-이라크 전쟁 개전 이후에야 “이슬람 체제”가 상황을 장악한다.

    이 때문에 지젝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슬람 안에 참된 해방적 잠재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지젝은 무사비가 보수적 이슬람주의자이며 따라서 그를 이러한 “해방적 잠재력”의 사례로 들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새로운 종류의 무슬림 지식인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정교분리를 신봉하는 모하메드 샤베스타리(호메이니의 옛 동료 중 한 명이지만 정교분리와 이슬람의 현대적 재해석을 주장하는 이란의 신학자, 철학자-역자), 모센 카디바르(시아파 성직자로서 이슬람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개혁운동의 이론가로 앞장섬-역자), 레자 알리자니 그리고 핫산 에쉬케바리(이 두 사람은 개혁파 연합인 ‘민족주의 종교 운동’의 지도자들-역자) 같은 이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러한 해방적 잠재력의 주역이 될 수는 있지만, 호메이니와 무사비 같은 자들은 분명 아니다.

    이란의 1979년 혁명이 미완성의 과업이며 그 주된 요구, 즉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적 평등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호메이니의 요구들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요구들 역시 무사비의 것은 아니다.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30년간 반계몽적인 폭압적 종교 지배로 좌절을 겪어온 인민이 비록 선거 부정으로 촉발되기는 했지만 사실은 보다 실질적인 요구들에 기반해서 일으킨 자생적이며 독창적이고 자주적인 봉기다. 성직자 체제와 나라 안팎의 그 지지자들에 너무도 실망한, 팽창 일로의 이란 시민사회는 선거로 열린 기회를 단호히 장악해 역사의 완강한 전진을 밀어붙였다.

    이들은 이슬람주의 체제나 자신들의 역량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의 전략은 이슬람주의 체제와 그 헤게모니를 점진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세속 민주 체제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며 신중을 요하고 장기적인 투쟁이다.

    이 과정에서 이런 시민사회가 서방 좌파로부터 광범하고 효과적인 지지를 받는 게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이 좌파는 민주주의와 시민 자유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오해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 <주간 진보신당>에도 함께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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