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해지지 않아도 소신대로 살 수 있길"
        2009년 07월 09일 10: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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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계획이요? 글쎄요. 계획이랄 것까지는 없는데, 소박하고 평범한 목표는 있습니다. 아파트 브랜드 중에 ‘자이 아파트’ 아시죠? 아파트도 동네마다 ‘급’이라는 게 있는데, 가장 비싸다는 반포동 자이 아파트에 살고 싶어요. 반포 말고 다른 곳은 싫습니다. 다른 곳은 생각해본 적도 없지요. 농담이냐구요? 네 농담입니다. 하하. 그런데 전 이런 얘기를 농담으로 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이 그런 세상이니까요.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작가로든, 당원으로든, 개인으로든 소신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소신대로 살기 참 어려운 세상이잖아요. 독한 마음 먹지 않고도 소신대로 살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살기 위해선 저도 뭔가 해야겠지요.“

    소신대로 살 수 있는 세상

    박세원 씨는 KBS 교양프로그램의 원고를 쓰는 방송작가다. 화면에 이름만 나와도 좋았던 시절은 훌쩍 넘겼다는 4년차. 그녀에게 방송작가로서의 삶과 최근 이슈가 되었던 ‘PD집필제’ 논란 그리고 진보신당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예전부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역사 스페셜> 이런 프로그램들을 즐겨봤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재밌었죠. 그러다가 보는 것 말고, 만드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이 바닥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바닥’에는 공채라는 개념이 없다. 작가는 모두 프리랜서로 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 제작에 필요한 작가는 그때 그때 ‘공고’를 내서 뽑는다. 그녀도 그렇게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KBS 모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제가 처음으로 참여한 일었어요. 1년여 간 막내작가 생활을 했지요. 막내작가는 원고를 쓰지는 않습니다. 원고에 필요한 자료 조사를 하거나 보조역할을 하면서 옆에서 주로 보고 배웁니다. 막내작가 생활은 보통 1년 정도 하는데, 요새는 작가 지망생들도 많이 늘어 2년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렇게 막내작가에서 서브 작가로 넘어가고, 서브작가로 보통 4~5년 일하고 메인작가로 넘어갑니다. 전 지금은  KBS에서 교양물 서브작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KBS 4년차 구성작가

    흔히 방송국 작가라고 하면 드라마 작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드라마 작가 외에도 예능이나 교양 프로 작가들이 프로그램 제작에 관여하는 영역은 광범위하다. 흔히 구성작가로 불리는 교양프로 작가들은 기획에서 취재, 내용 구성, 영상편집 구성, 원고에 이르기까지 제작 전반에 참여하는 방송전문인력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사실상 KBS측의 입장 철회로 일단락된 ‘PD집필제’ 시행 논란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얘기한다.

    “얼마 전 KBS는 작가제도 개선방안이란 이름으로 시사, 교양, 다큐 작가들을 제작현장에서 몰아내겠다는 계획을 내놓았어요. 지난 봄 개편부터 시행에 들어가겠다고 했지요. PD역량 강화를 위한 노력에는 저를 포함해 작가 모두가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가를 쫓아내기만 하면 PD 역량이 강화되는냐는 것입니다. 또 30년간 방송전문인력으로 자리잡아온 방송작가들을 하루 아침에 없애는 것이 콘텐츠의 질적 향상에 정말 도움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PD 역량 강화의 명분을 쓴 작가제도 개선방안의 본질은 경비 절감에 있습니다. 봄 개편에서는 원고료 얼마를 절감하고, 가을 개편에서 얼마를 절감하겠다고 명기해 놓은 것이 그 증거 중 하나지요. ”

    그녀는 특히 일자리를 잃는 것은 작가이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건 PD인데 작가나 PD와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뒤, 이를 그저 받아들이라는 일방적 소통 방식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MBC 아카데미 출신이거든요. 등록금이 3백 몇십만 원이었습니다. 웬만한 대학 등록금이죠. 방송 3사가 다 그런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작가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방송사 스스로의 필요에 의한 것이죠.그녀는 특히 일자리를 잃는 것은 작가이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건 PD인데 작가나 PD와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를 한 뒤, 이를 그저 받아들이라는 일방적 소통 방식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또 대학교에도 방송작가와 관련한 학과가 있습니다. 이렇듯 오랜 기간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인정되어 온 직업을 한 마디 말도 없이 하루 아침에 없애버린다면 누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작가 없앤다고 PD 역량 강화되나?

    KBS는 NHK를 벤치마킹한다고 했다. NHK에서는 시사, 다큐에 작가를 쓰지 않고 PD가 직접 글을 쓴다는 것이다. 이에 그녀는 PD가 직접 글을 쓰고 안쓰고를 따지기 전에 제작환경부터 따져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제작 인원, 기간, 방식 등 뭐 하나 비교대상이 아닌데, 비교를 합니다. 한국의 방송제작 시스템은 모든 지원을 최소화하고 PD 한 사람의 어깨에 행정, 취재, 제작, 편집의 모든 업무를 짐지우는 방식으로 구축되어 왔습니다.

    작가가 도입된 것도 이런 한국적 방송환경의 특수성 속에서 최소한의 프로그램 질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열악한 환경을 감안하면  KBS 제작능력은 상대적으로 NHK보다 훨씬 뛰어나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PD와 작가가 있는 거구요”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KBS 측은 “PD집필제는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진에게 자율적으로 맡기기로 방송작가협회와 합의했다”고 밝혔으며, 한국방송작가협회 역시 “PD집필제와 관련해 양측이 제도 시행 이전으로 돌아가 제작진의 자율성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향으로 개선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KBS가 백기를 든 셈이다.

    그녀는 열악한 직무환경과 처우, 고용불안 등 상존하는 문제가 여전하기 때문에 완벽한 승리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KBS라는 거대 조직에 맞서 일개 프리랜서들이 이 정도의 성과를 얻어냈다면 성공한 싸움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연대의 힘이 가져온 승리

    “이번 일을 겪으며 개인적으로는 연대의 힘을 확인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인 것 같아요. 협회가 있긴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 특성상(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모래알 같을 수밖에 없거든요. 또 작가는 공급도 많기 때문에 자리를 걸고 싸워도 파장이 크지 않죠. 그런데 KBS 모든 작가들이 함께 연대해서 싸워주고, 다른 방송사의 작가들 역시 빈 자리가 생겼다고 그 자리를 꿰차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었어요. 그런 힘들이 큰 밑받침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지 물었다.

    “한국 근현대사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요. 최근 역사 프로그램이 다 죽었고, 근현대사 쪽은 특히 더 심하지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고정적으로 나가는 방송이 아예 없습니다. 아이들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아서 모르고, 어른들은 먹고 살기에 바빠서 외면하는 우리의 아픈 시간들을 꼼꼼히 되짚어보고 싶습니다.”

    자신이 받는 원고료의 일부는 국민이 낸 세금이기에 신중하게 되고 책임감을 느낀다는 그녀의 말에 국민세금을 오로지 땅 파는 데 쓰고 있는 사람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지역 청년회 활동을 통해 정치란 무엇인지, 정치가 우리 일상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정당에 가입하는 게 왜 중요한지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고, 2004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는 그녀에게 당과 관련한 생각을 들어봤다.

    “아는 대학 선배의 권유로 지역 청년회에 가입했는데, 멤버들의 활동을 통해 많은 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운동권도 아니었고, 소위 NL이나 PD도 아니었지만, 당시 민주노동당 내에서의 특정 정파의 패권적 모습이라든지 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분당될 때 탈당했습니다. 하지만 청년회 활동은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와 남자친구를 제외하고는 청년회 멤버 모두 민주노동당 당원이에요. 정당은 달리 했지만, 서로간의 정치적 선택을 존중해주고, 세심히 배려해 주기 때문에 불편하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선언이 아닌 내용으로

    그녀는 평소 진보정당이 여러 진보적 가치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수자 문제나 환경문제, 여성의 문제 등에 더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 진보신당이, 자신이 가졌던 기대에 부응하는가에 관련해서는 아직 대답하기에는 시기가 이른 것 아니냐며 평가를 유보하면서도 지난 총선에서 최현숙 후보가 성소수자를 전면에 걸고 출마한 것 등을 예로 들며 진보신당에 거는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그녀는 평소 진보정당이 여러 진보적 가치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수자 문제나 환경문제, 여성의 문제 등에 더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시절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진보신당에는 운동권 정당의 문턱같은 건 없는 것 같애요. 그게 지못미 때문이든, 촛불때문이든, 칼라TV 때문이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것은 분명하잖아요.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과거와는 다른 면면들을 채워나가다 보면 우리들의 선언이 아닌 내용으로써 새로운 진보정당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레디앙에 대해 물었다.

    “솔직히 이슈메이커로서의 역할에는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만,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작지만 단단하게 유지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레디앙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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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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