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도 르네상스가 필요하다"
        2009년 07월 07일 08: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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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1천년을 지나면서 근대유럽의 전면적 변혁을 가져온 르네상스의 뿌리는 현실의 고통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인문학의 폭발이다. 경제적 동인이 인문적 부흥과 맞물리면서 사람들에게 비판정신과 희망을 새겨준 것이다.

    한국사회는 아직 르네상스를 거치지 않았다. 80년대의 부흥은 ‘번역’의 르네상스였으며, 스스로의 인문적 폭발은 아니었다.

    철학이 빈곤한, 아예 없는 한국의 좌파나 우파를 향해 필자가 이 글을 통해 먼저 전하고 싶은 핵심 내용이다. 이 글의 필자는 인문학적인 부흥을 통해 고통과 무력감에 빠진 대중들에게 희망과 활력을 줄 수 있으며, 그 출발점이 ‘철학’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레디앙>은 국민승리21 시기부터 진보정당의 정책, 기획 부문의 책임자로 주요 역할을 해왔던 박홍순의 ‘미술로 보는 서양철학사’를 장기 연재한다. <편집자 주>

    ‘철학이란 무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세계관이라고 답한다. 혹은 개인의 실존적인 측면에 주목하여 인생관이라고 답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라 답을 해도 좋다. 어떻게 말하든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철학만큼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는 것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입으로는 중요성을 말하면서 머리와 몸으로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사정은 흔히 우파라고 하는 자유주의 진영이나 좌파로 불리는 진보 진영이나 비슷한 것 같다. 한국의 우파는 자유주의 없는 자유주의 진영이다. 한국 사회에는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별로 없다. 자유주의의 구호는 있어도 자유주의 철학은 거의 없다. 자유주의 경제학은 있어도 그 인식론적 기초 역할을 하는 자유주의 철학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의 좌파는 진보적 철학에 대한 성찰을 뒤로 한 채 당면한 진보적 실천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는데 그쳤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테제 자체의 한계이든, 아니면 이를 잘못 해석해서 생긴 문제이든 철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구 결과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최소한의 언론출판의 자유조차 인정되지 않았던 과거 70~80년대에는 권력에 의해 숨겨진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보 진영은 우리 사회 전체의 지성집단 역할을 했다. 진보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헌신성과 함께 지적인 기대가 두터운 신뢰의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형식적인 민주화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특히 정보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면서 정보 자체는 넘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누구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보만큼은 이미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조건에서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진보 진영은 더 이상 지적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철학 없는 한국의 좌파와 우파

    자유주의 진영도 마찬가지이다. 70~80년대에는 GDP를 올리고 일자리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다. 천민자본주의가 정착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와 정보화는 자본주의에 전폭적으로 공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시야도 넓혀주었다. 이제 무식한 자본주의가 아닌 세련된 자본주의를 원하지만 자유주의 진영은 여전히 천민자본주의적인 발상에 머물고 있거나 자신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포장하는 최소한의 기술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르네상스이다. 근대 유럽의 전면적인 변혁은 르네상스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 현실의 고통이 매우 중요한 동력 역할을 하긴 했지만 이미 1,000년 이상 경제적 빈곤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시기에 터져 나왔을까?

    경제적인 동인이 인문적 부흥과 맞물리면서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비판정신과 희망을 새겨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아직 르네상스를 거치지 않은 것 같다. 80년대의 부흥은 번역의 르네상스였지 우리 스스로의 인문적 폭발은 아니었다.

       
      

    자유주의 진영이나 진보 진영 모두 지적인 감동을 상실한 채, 현실의 뒤를 좇아가는 데 허덕이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갈증을 스스로 토해내고 있다. 촛불시위에서 드러난 자발적 열정,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정국에서 드러난 끝 모를 슬픔은 대중적 갈증의 다른 표현이었다.

    이를 폄하하는 것은 참으로 대책 없는 무지에 불과하니 그렇다고 치고, 이제는 거리에 있는 그들이 모두 알아서 판단하고 실천할 것이라고 찬양하는 것도 안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지적 감동 없이 현실만 쫓는 한국 사회

    갈증을 갈증으로 이해하고 우리 모두의 희망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근본적인 노력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비극으로 귀결될 것이다. 우리는 그 뜨거웠던 유럽의 68혁명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대중적인 변화의 ‘분위기’는 극대화되었지만 현실에서 체계적인 변화의 방향이나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열기는 잦아들고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드골정권이 다시 강화되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오히려 장기간 동안 사회 전체적으로 무력감이 확산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사회를 전체적으로 흔들어댔는데도 현실에서 이루어진 가시적인 변화가 별로 없다고 판단될 때, 대중적으로 전 사회적으로 무력감이 찾아왔던 것이다.

    희망 만들기에 필요한 몇 개의 단추 중의 하나가 인문학적인 부흥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철학일 것이다. 철학을 신비화하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그것 이상으로 해로운 것은 철학을 무력화시키는 발상이다. 실무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에 머무는 것 말이다.

    ‘미술로 보는 서양철학사’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만드는 데 아주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서 기획되었다. 새로운 철학적인 비전을 모색하기 위해서도 수천 년 간 인류의 지적인 보고 역할을 한 철학사를 검토하는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사를 정리하는 것 자체도 내 능력으로는 버거운 마당에 서양철학사와 동양철학사를 통합하여 정리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겠기에 먼저 서양철학사를 시작한다. 동양철학사는 그 이후의 과제로 할 생각이다.

    그런데 왜 ‘미술로 보는’ 서양철학사인가? 그동안 서양철학사를 정리한 책에 대한 관심과 요구는 많았다. 하지만 텍스트만 가득한 책에 질려버려 앞부분을 읽다가 놓아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혹은 상대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고대 그리스철학의 일부분이나 근대와 현대철학에서 구미에 맞는 일부분만을 접하고 덮어버리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친숙하게 서양철학사 전체에 다가갈 수 있도록 비주얼한 미술을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하였다.

    떼어놓을 수 없는 철학사와 미술사

    그렇다고 단지 흥미를 높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철학사와 미술사는 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철학사를 모르면 미술사를 알 수 없다. 반대로 예술사를 이해하지 않고 철학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언어나 그림은 모두 인간의 사고를 표현하는 수단들이다. 물론 역으로 인간의 사고를 규정하는 역할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철학사를 중심으로 하되 미술사에 대한 이해가 맞물려 들어가도록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그림이 단순한 참고 도판이 아니라 철학의 흐름과 어떻게 맞물리면서 변화과정을 겪었는지에 대해 개별 그림이나 조각 자체에 대한 분석과 설명을 하였다.

    또한 ‘철학사’이기 위해서는 나무와 숲을 함께 보는 것이어야 한다. 철학사는 단순히 개개인 철학자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읽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의 서양철학사를 다룬 글들은 상당 부분 개별 철학자에 대한 요약적 성격이 강했다. 서로 어떤 연관성과 차이가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부족했다.

    이를 극복하고 먼저 숲을 제대로 보기 위한 방안으로 각 철학자와 철학 사조를 두루 뭉실하게 요약 정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급적 인식론, 윤리학, 정치학, 자연관의 영역으로 나누어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도록 고려하고자 한다.

    나무를 제대로 보기 위한 방안으로 각 철학자들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담긴 원문의 문장을 인용하고 분석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개별 원전에 접근해 들어가는 안내서 역할도 담당하려는 바람도 가지고 있다.

    기존 서양철학사 편견 깨기 위해 노력

       
      ▲ 필자

    마지막으로 나름대로 기존의 서양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포함되도록 하였다. 자연철학, 소피스트, 중세신학, 르네상스 등에 대해 기존의 서양철학사 저작들이나 일반적인 통념에서 나타나는 오해나 오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자연철학을 자연에 대한 것으로 한정하는 통념, 중세를 신학이 철학을 지배했다는 식의 사고방식, 르네상스를 이성으로 제한하거나 혹은 재발견의 의미로 축소하는 것, 정치학의 문제를 철학과 구분하여 사회사상으로 분리시키는 오류 등을 철학사 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려 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철학을 독립적인 발전과정으로 보는 관점,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으로서 철학사를 보는 관점, 혹은 탈주의 과정으로 보는 관점 등에 대한 비판적 검토도 포함할 생각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름대로의 철학사를 보는 관점이 드러나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개인적인 능력을 한참 벗어나는 작업이긴 하지만 아무쪼록 철학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고 싶은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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