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위해서는 신발이 필요하다
    2009년 07월 03일 02: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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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또 하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분의 몸은 이 땅에서 저 하늘로 자리를 옮기셨지만 그 분의 작품은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또렷이 빛나는 별자리로 남아있을 것이다.

유현목 감독, 구차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리얼리즘과 그렇게 보이는 세상이 영화라는 형식 안에서는 어떤 짜임새가 되어야할지를 고민하는 모더니즘,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시선과 영혼을 작품 하나하나마다 새롭게 담아내려는 실험정신을 놓지 않았던 작가.

   
  ▲ 영화 <오발탄> 포스터

늘 다음 영화를 꿈꾸던 그 감독의 다음 작품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은 한국영화사에 고전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특히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전형’으로 꼽히는 <오발탄>은 고전 중에서도 고전이다.

한국 영화의 <시민 케인>

한국 영화의 <시민 케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오발탄>은 1961년에 개봉되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서 4· 19 혁명, 5· 16 쿠데타로 이어지는 한국 역사의 굴곡을 겪으며 만들어졌고, 이 역사의 굴곡을 작품 속뿐만 아니라 작품의 역사 속에 운명처럼 고스란히 새기고 있다.

전후의 가난한 제작환경, 딛고 일어서기 위해 되짚어보아야 했던 쓰라린 현실, 그러나 제 나라에서 존재를 부정당하고 태평양 너머 미국 땅 샌프란시스코에서 영문 자막을 필름 아랫도리에 새긴 채 겨우겨우 한 벌의 프린트로 살아남아 전설이 된 현실의 리얼리즘이 <오발탄>의 역사다.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자막을 배경으로 보이는 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 그 뒤로 촘촘히 얽혀있는 쇠창살,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의 명멸하는 불빛이다.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은 이미 실존의 아이콘이다. 그래서 이것은 두 가지로 읽힌다. ‘생각하는 사람’이 만들었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로 보라는 주문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는 한 가지가 더해진다.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으나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 속 인물들이 바로 그렇게 조각의 껍질 속에서 주위의 불빛에 따라 꿈틀대는 조각상의 이미지에 담겨 있다는 느낌.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은 창살에 비해 왜소해 보이고, 창살은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이후 영화 속에서 창살은 출근길에 올라탄 전차 속에서 양공주를 바라보는 주인공 철호(김진규)의 시선을 가로막는 차창을 통해, 천국의 문지기 노인의 새장을 통해, 영호(최무룡)가 털고자 하는 은행의 셔터를 통해, 그러다 경찰서에 갇힌 영호를 통해 벗어나고자 하는 자를 철저히 가두어놓고야마는 굴레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창살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로 계속해서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불빛에 따라 이리저리 명암이 바뀌면서 마치 꿈틀대는 것처럼 보인다. 불빛은 욕망 또는 희망이다. 가난의 그림자에 찌든 주인공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골목길에 즐비한 네온사인, ‘가자, 가자’를 외치는 넋 나간 노모의 병상 위에 매달린 전등, 마침내 앓던 이를 빼낸 철호가 올라탄 택시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역의 장식등, 이 불빛들은 끊임없이 빛을 던지고 그림자를 드리운다.

박봉으로 가족을 책임지느라 욱신거리는 치통을 앓으면서도 충치 하나 뽑을 여유조차 없는 철호. 병석에 누워 꼼짝도 못하면서 ‘가자, 가자’고 외쳐대는 정신이상의 노모와, 영양실조에 걸린 만삭의 아내(문정숙), 제대 후 변변한 일은 못하면서 늘 사고나 치는 동생 영호(최무룡)에다가 양공주로 밤거리에 나선 여동생 명숙, 그런 집안에서 자기 앞가림하겠다고 신문팔이로 나선 막내 동생 민호(안성기)에 그 밑으로는 신발 사달라고 졸라대는 어린 딸까지 충치보다 더 욱신거리는 가족들. 그래서 철호는 월급날에도 선뜻 치과에 가지 못하고, 딸아이 사줄 신발을 뒤적거리다가도 슬며시 놓아버려야 한다.

병상에 누운 노모는 허공을 향해 양 팔을 내두르며 자꾸만 ‘가자, 가자’고 한다. 그러나 발작하듯 외쳐대는 노모는 겨우 윗몸만 일으킬 수 있을 뿐 다리를 쓰지 못한다. 그러므로 노모에게는 신발도 없다. 상이군인 경식은 두 다리를 쓰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비참한 현실을 딛고 걸어 나가기는커녕 양공주가 된 애인 앞에 목발을 놓치고 나뒹굴다가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 영화배우 미리는 두 다리가 있되 걷지 않는다. 영호에게 남은 전쟁의 상흔을 영화의 소품쯤으로 생각하는 미리는 군수품 떨거지인 ‘짚차’만 타고 다닌다.

노모에게는 신발도 없다

집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어린 혜옥은 날마다 집을 나서는 아버지와 삼촌에게 돈 많이 벌어서 새 신을 사달라고 조른다. 치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가족의 멍에에 짓눌려있는 철호의 신발은 밑창이 떨어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너덜거린다. 

   
  ▲ 영화의 한 장면

월급날 신발가게에서 끝내 되돌아 서야 했던 철호에게 경찰서에 갇힌 영호는 조카에게 새 신을 사주라고 부탁한다. 아이를 낳으러 입원한 아내의 병원비로 쓰라며 여동생이 내준 몸 팔아 번 돈을 받아든 철호는 죽은 아내의 시체를 차마 보지도 못하고 뒤돌아서서는 그 돈으로 혜옥의 신을 사고야 만다.

그러나 그는 그 신을 들고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길 위에서 빙빙 돌고만 있다. 이렇게 <오발탄>의 인물들은 계속 세상에서 비껴난다.

서양 여자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배우 미리는 통치마 차림의 친구 명숙을 만난 자리에서 다방 마담에게 ‘애플’ 몇 알 달라고 한다. 영호를 자신의 옥상 방으로 데려간 설희는 커피를 권하고 걸핏하면 ‘플리이즈’니 ‘싯다운’ 따위의 영어를 써대고 사람을 부를 때도 ‘영호씨’가 아니라 ‘송’이라고 한다.

출근길 전차 안에서 양공주를 보고, 그녀를 비아냥거리는 승객들의 소리를 듣던 철호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고 여동생 명숙을 데리러 간다. 경찰서를 나서자마자 여동생은 핸드백에서 검 한 조각을 꺼내 씹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미칠 수 있느냐’고 묻던 명숙은 결국 양공주가 되어 모은 돈을 올케의 병원비로 쓰라고 오빠 철호에게 내민다.

그러나 올케는 아이를 낳다 죽어버리고 철호는 태어난 아이도, 아내의 주검도 보지 않고 병원을 나선다. 상품이 가득 진열되어있는 상가를 지나, ‘세계무선’이라는 간판을 지나 철호는 동생의 몸 팔아 번 돈을 가지고 ‘국제치과’로 이를 뽑으러 간다.

서양/‘미국’은 지긋지긋한 현실의 이상향이며, 그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도덕도 염치도 사라져버린다. 또는 서양/‘미국’이 도덕과 염치를 짓밟아 버린다.

‘국제치과’로 이를 뽑으러 간다

두 다리를 잃은 경식은 자신을 기다려온 여인 명숙을 방치한다. 영호는 산통을 겪는 형수를 양공주가 된 여동생에게 떠맡기고 은행을 털러 나선다. 술집에서 일해 가면서까지 대학을 다니던 설희는 시인을 꿈꾸던 이웃 청년에게 난간에서 떠밀려 죽음을 맞이한다. 새장 속에 새를 키우는 ‘천국의 문지기’ 노인은 이웃 처녀조차 지켜주지 못한다.

호기롭게 영호와 술을 마시고 술집 유리를 부수던 전우는 총성 한 발에 줄행랑을 친다. 설희의 총으로 은행을 털려던 영호는 아무도 쏘지 못한다. 여동생이 양공주가 되어 번 돈으로 철호는 앓던 이를 뽑고, 아이의 새 신을 사고, 설렁탕을 시키고, 택시를 탄다. 그 남자들은 삶에 짓눌리면서 아무 것도 책임지지 못한다.

여인들은 부탁하지 않는다. 몸을 팔고, 총을 쏘아대는 경찰과 옛 애인 사이에 뛰어들고, 아이를 낳다 죽어가면서도 비록 망가질지언정 능동적으로 사랑하고, ‘가자, 가자’고 외쳐댄다. 그리하여 한 여인이 낳은 아기가 남겨져 있는 것이다. 남겨진 그 아이의 아비는 오랫 동안 앓던 이를 뽑아버리고도 아직 갈 바를 몰라 빙빙 맴돌고 있을 뿐인데.

떠나기 위해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을 딛고 설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와 두 다리를 받쳐줄 신발이 필요하다. 튼튼한 두 다리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신문을 파는 꼬마삼촌 민호와 포기하지 않고 새 신을 소망하는 혜옥에게 유현목 감독은 아직 빗나가지 않은 희망의 과녁을 남겨 놓았다.

   
  ▲ "가자, 가자"를 외치는 할머니

개봉 당시, 한국사회를 부정적으로 그려낸 것도 고까운데 영화 속 노모가 ‘가자, 가자’ 외쳐대는 대사를 두고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상영금지처분을 받았던 <오발탄>은 필름으로서의 영화적 실체 자체도 내용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혹독하고 무작스러운 독재 시절을 거치며 한국에서는 온전히 남아있을 수 없었던 <오발탄>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된 한 벌의 프린트로 발견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모가 ‘가자, 가자’ 외칠 때마다 ‘Let’s go, let’s go!’라는 영문 자막을 함께 봐야한다.

한국어 대사만 들으려 해도, 이미 필름에 새겨진 영문 자막의 시각적 침입은 기이하게도 시각과 청각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면서 의도하지 않은 몽타쥬가 되어 한 번 잘못 쏘아진 탄알의 궤적이 얼마나 오래오래 빗나가게 되는지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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