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새끼’의 자유와 무질서를 옹호한다
        2009년 07월 02일 11:13 오전

    Print Friendly

    가까운 과거, 박정희가 사망하고 전체주의 유신의 시대가 물러가고 서울의 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터진 광주에서의 민주화 의거.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 의거에 대한 역사적 가치, 진보적 가치는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다.

    뒤이어 6. 10 항쟁. 그리고 촛불 시위. 이것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얼마 전, 중국 지진 후 국가로부터의 조치가 취해지기 전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동남아에서 쓰나미가 덥친 후, 그 어떤 도움도 없었을 때 난민들은 스스로 어떤 일을 했을까? 1945년 해방, 일본이 떠나가고 미군이 들어오기 전, 정부는 없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조직했을까?

    유럽, 1871년 파리코뮌, 제1차 올더마스터 행진(1958년 핵무기 반대를 위해 약 1만여 명이 런던에서 올더마스터까지의 평화행진), 1946년 여름, 스쿼터에 의한 군대 막사 점거 운동, 1960년대 록 페스티발, 그리고 미국의 인스턴트 도시 우드스타 페스티발. 공통점은 무엇일까?

    서유럽, 체코 프라하의 봄, 그리고 이어진 폴란드와 헝가리에서의 민중 봉기. 바티스타 정권이 무너지고 카스트로가 입성하기 전의 쿠바의 아바나.

    그리고 이루 말할 수도 없는 수 없이 많았던 무질서의 순간들. 역사상 수많은 혁명의 순간, 자연 재해후의 임시 조직, 기존의 조직과 후임 조직 간의 임시적인 무질서의 순간들. 이 순간들 사이에 있었던 모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인민들의 자위, 역사가들의 무질서

    이 순간들을 무질서라고 표현했던 자들은 역사가였다. 나는 지금 역사가들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살아남은 자들이었고, 그들은 전부의 시선은 어느 쪽인가의(좌 혹은 우) 정권의 편이거나 권위의 시녀였을 뿐이다.

    그들은 수많은 혁명의 순간들, 엄청난 고통의 자연 재해들, 그들을 돕기 위해 혹은 탄압하기 위한 정부 또는 그들의 혁명을 조직하기 위한 새로운 혁명 세력, 새로운 조직이 나타나기 전의 시기를 정확하게 또는 역사로 기록한 역사가는 없었다. 오로지 그들의 눈에는 무질서였을 뿐이었다.

    질서를 사랑하며 처벌하고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자기가 자유롭지 못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권위가 온 몸에 육화되어 있는 역사가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무질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국가의 억압이 법과 질서라고 믿어 오고 세뇌된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부자연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또는 탄압하기 위한 정부나, 새로운 혁명을 조직하기 위한 좌파 정부가 오기 전에, 틀림없이 그들만의 자발적인 질서가 존재했었다. 그것에 대한 증거는 역사는 외면했지만, 용기있는 저널리즘은 증언했었고, 용케 살아 남아 있는 힘없는 인민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조직화에 대한 아나키스트 접근 방식의 중요한 요소는 자발적 질서이다. 자발적 질서를 아나키스트들은 정상으로 보았고, 권위주의자들은 비정상으로 보았다.

    좌우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는 것과 정치적 존재로 보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인간을 믿는 것과 인간을 믿지 않는 것의 차이가 아닐까?

    러시아,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신당

    소련의 사회주의 실패는 사회적인 원리를 정치적인 원리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소비에트(평의회)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다가, 1920년 3월 볼세비키는 각 지역의 소비에트를 중앙 행정조직으로 개편하였다. 그 후 혁명은 사라지고 권위만 남았다.

    그리고 소련은 망했다. 러시아가 탄생하고 또 다른 권위가 나타났다. 사회적인 원리는 자발적인 질서이다. 정치적 원리는 권력, 권위, 형식, 지배, 계급, 법과 질서이다.

    진보신당에서 당기위로 당원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황당했다. ‘개새끼’ 당원의 ‘개새끼’라는 말에 모든 사람이 난감해 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해한다. 그러나, 개새끼는 스스로 개새끼라고 스스로를 규정했고(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스스로가 조직에 의해 그렇게 불려지길 원했다. 조직은 기분 나쁘지만 그를 그렇게 불러주면 그만이다.

    그는 그것을 감수할(또는 변태적으로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기분 나쁘다고 처단이라니. 그는 이미 당원들의 원성과 욕으로 이미 처벌을 받은 상태였다. 설사, 당원들(법과 질서에 의해 노예화되어 있는)의 징계에 대한 요구가 있더라도 조직은 징계를 해서는 안 된다. 개새끼 당원과 당원들 간의 스스로의 질서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으로 커다란 것을 잃어버렸다.

    진보신당은 지금까지의 당원들에 대한 처벌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진보신당은 더 이상 진보좌파가 아니다. 새로운 우파 정당의 탄생을 증명했을 뿐이다. 마치 민주노동당처럼.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