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들은 앞다투어 임금을 올리고…
        2009년 07월 01일 10: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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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가 위기인 것은 옛 것이 무너지고 있어서이기보다는 새 것이 등장하지 못하는 데서 나타난다. 신자유주의의 붕괴가 이론(異論)의 여지 없이 자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삶이 팍팍하고 미래가 암울한 것은 신자유주의 이후에 무엇이 올 것인지 현실의 장에서든 상상의 영역에서든 너무도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또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향한 수많은 도전과 실험이 있어왔고,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다양한 대안이론이 창출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안이론이 공히 가지는 난점 중 하나는 그 이론이 비현실적이라거나 치밀하지 못하다는 상투적인 비판뿐 아니라, 대안으로 힘을 가질 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는 물리적 한계에서도 비롯된다.

    <레디앙>은, 북경 인민대의 김정호씨와 함께 여러 대안이론을 알리는 긴 연재를 시작한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한국에서 지하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김정호씨는 현재 북경 인민대학 박사과정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레디앙>에 대안사회주의론에 관련된 몇 편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앞으로 연재될 ‘대안사회주의’ 시리즈는 필자인 김정호씨가 가진 이론적 관점에 의해 쓰여질 텐데, <레디앙> 편집진은 그러한 이론적 관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보다는 이번 연재에 담겨 있을 문제의식이 대안사회주의에 관련한 다양한 토론과 논쟁을 촉발시켜주길 바랄 뿐이다.

    아래는 필자가 계획하고 있는 연재 주제와 순서다. 각 주제의 제목은 집필과 편집 과정에서 다소 변경될 수 있다. – 편집자 주

                                               * * *

    Ⅰ. 유고 ‘노동자 자치 사회주의’에 대한 회고
    Ⅱ. 사회주의 본질론
    Ⅲ. 사회주의 발전단계론
    Ⅳ. 사회주의의 내적 동력문제
    Ⅴ.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Ⅵ.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비교

                                              * * *

    Ⅰ. 유고 ‘노동자 자치 사회주의’에 대한 회고
    1. 들어가는 말
    2. 유고 사회주의 자치이론의 발단과 전개과정
    1)유고 사회주의 자치이론의 발단
    2)원전학습열풍과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재인식
    3)노동자 자치의 사회자치로의 발전
    4)자치정치제도 개혁
    3. 유고의 사회주의 자치이론
    1)자치경제이론
    가. 사회소유제이론
    나. 자치와 연합노동이론
    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이론
    라. 확대재생산이론
    2)자치 정치이론
    가.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
    나. 당과 사회정치조직이론
    다. 자치 민주정치이론
    4. 연방해체 과정중의 유고
    1)80년대 전반기의 조정과 개혁
    2)최후의 노력과 반성
    5. 사회주의 자치제도의 성과와 한계
    1)자치제도의 성과
    2)자치제도의 한계

    2) 원전학습열풍과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재인식

    일정기간의 고통스러운 사색을 거친 1949년 여름, 유고의 맑스주의자들은 차츰 다음과 같은 인식을 획득하게 되었다. "우리가 소련의 사회주의제도를 모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여전히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소련식 사회주의제도 자체에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좋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사회주의를 계속해서 배우니 보단, 차라리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찾아 나서는 편이 낫다."

       
      

    이 같은 관념이 일단 세워지자, 유고 당 지도부와 맑스주의자들의 사상해방은 한 차례 큰 진전을 이루면서 정신적으로도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의 피동적인 방어와 혼미스러운 방황에서 벗어나 상황에 주동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대단한 열정을 발휘하여 맑스ㆍ엥겔스‧레닌의 저작에 몰입하며 현재 긴급하게 해결하거나 증명해야 할 이론문제에 대한 근거들을 찾아 나섰다.

    이리하여 맑스주의를 새롭게 학습하자는 열풍이 일시에 전국에 출현한다. 2차 대전 중에 열독했던 원전들, 예컨대 맑스의 『자본론』, 『프랑스내전』, 엥겔스의 『반듀링론』, 레닌의 『국가와 혁명』 등이 다시 유고 맑스주의자들의 책상에 올려 졌고, 그들이 자주 토론하고 인용하는 중요한 저작들이 되었다.

    맑스, 엥겔스, 레닌의 글에서 길찾기

    이론학습과 토론은 확실히 그들로 하여금 많은 수확을 거두게끔 하였다. 그 중 가장 큰 수확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과도기(주: 사회주의 시기)에 있어 국가의 역할", "당과 국가의 관계" 그리고 "사회주의 생산수단의 소유제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이들의 새로운 해석에 따르면, 사회주의제도를 수립한 이후 국가의 역할 특히 경제적 역할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약화되는 것이고, 당과 국가기관은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는 것이며, 생산수단은 국가소유가 아니라 사회소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렵 그들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맑스의 사상가운데 무산계급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점차 사멸되어가는 국가"라는 것과 "생산자간의 자유연합"에 관한 부분이다. 그들은 이것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이자 실질로 간주하고, 현실 사회주의운동이 오직 이러한 방향으로 전진할 때만이 정확하게 맑스 레닌주의 원칙에 부합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맑스 레닌주의로부터 벗어난다고 보았다.

    이 같은 인식을 획득한 후, 다시 소련과 유고를 비롯한 다른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 건설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유고 맑스주의자들은 소련식 모델에 문제가 있다는 자신들의 이전 관점에 보다 확신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문제들이 존재하고 그 문제들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비교적 명확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유고 자치주의자들의 소련에 대한 인식

    그들이 보기에 소련 사회주의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과 결함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1)국가가 경제ㆍ정치ㆍ문화ㆍ교ㆍ육 및 기타 일체의 사업에 대한 관리권을 독점하고, 노동자 계급과 노동대중은 이러한 관리권과 인연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여전히 고용되는 지위에 처해있다. (2)사회의 일체의 사업을 관리하는 방대한 행정기구와 함께, 2차 대전 중의 전시체제 하에서나 실시되던 엄격한 계급등급질서가 여전히 실행되고 있고, 이 같은 등급질서 하에선 하급은 반드시 상급의 지시와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

    (3)국가에 의한 생산ㆍ분배 및 사회생활 각 방면에서의 통일적인 계획은 사회주의발전의 유일한 법칙이 되었다. (4)당과 국가가 하나로 융화되어, 당은 대중에 대한 교육자와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담당하지 않고 국가기구의 구성부분이 되어 국가사무의 집행자로 변질되었다.

    이상과 같은 특성들이 존재하기에, 소련식 사회주의는 불가피하게 관료주의의 독단과 전횡/직권과 특권의 남용ㆍ부패 등의 부정적인 현상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이로부터 사회주의의 건강한 발전은 심각하게 저해 받게 된다.

    따라서 정권을 장악한 후에, 무산계급과 당이 관료주의의 독단과 전횡 등 부정적인 현상의 해악을 극복하고 사회주의가 정확한 방향으로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권력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해 비판과 억제의 태도를 취하여 가능한 빨리 국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티토를 포함한 카더얼, 지더리치 등 유고 당 지도자들과 이론가들은 모두 국가의 중앙집권제로부터 벗어나 관료주의를 극복하는 유일한 출로는, 맑스가 일찍이 얘기한 사회자치이론을 실제로 구현함으로써, 노동대중이 직접 국가 기구와 기업에 대한 모든 관리에 참여하게 하여 국가와 기업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게 만드는 것이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은 ‘비관료화’ㆍ’민주화’ㆍ’권력분산’ㆍ’노동자 자치’ 등 대단히 호소력 있는 많은 구호들을 제시한다.

    1950년 6월 26일 유고연방공화국 인민의회는 <노동자의 국영기업과 고급경제연합조직의 집체관리에 관한 기본법령>을 통과함으로써, 위의 구호가 실제 실현될 수 있는 법적장치가 마련되었다. 이것은 유고 맑스주의자들이 본국적인 사회주의 발전경로의 탐구에 있어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은 것을 의미한다.

    이 법령이 통과될 즈음에 티토는 <유고에서는 노동자가 공장을 관리한다>라는 제목하의 중요한 연설을 하였는데, 여기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유고 사회주의 자치이론에 관하여 설명함으로써, 이 법령의 관철과 집행을 위한 사상적 정치적 기초를 놓았다. 티토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장악할 수 있다’

    "공장과 기업의 노동자가 그들의 공장과 기업을 집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이 법안은 유고 사회주의 건설사업 발전의 논리적 결과이다. 아마도 일부 사람들은 이 법안이 아직 시기상조로, 노동자들은 아직 공장과 기업관리를 위한 복잡한 기술을 장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할지 모른다.

    무릇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사실상 이 법안은 너무 일찍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간 늦은 감이 있다. 왜냐하면 이전에 우리당은 소련이 했던 것들을 받아들이고 실시하는 데 있어서 너무 많은 환상을 갖고 비판정신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미 고정화된 사상과 모델을 남한테서 아무런 여과 없이 빌려옴으로 해서, 노동자들로 하여금 공장과 기업관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 엄중한 결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낄 수 있을 지경이다. 이제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목적은 바로 이 법률적 조치를 이용하여 각 방면으로부터 기존의 잘못된 실천을 종식시키고, 이미 고정화 되어버린 사상과 모델이 조성한 해약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 티토

    이 법률의 통과와 티토의 연설 이후, 유고는 노동자자치에 의한 사회주의건설이라는 참신한 실험을 본격적으로 실행하였는데, 이로써 유고는 사회주의발전과 관련한 개혁에 있어 여타 다른 동유럽 국가들보다도 한발 앞선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952년11월2일부터 7일까지 개최된 유고 제6차 당 대회는 유고공산당을 "유고공산주의자연맹"(주: 이하 약칭 유고연맹)으로 개명하였다. 이상의 이론과 실천적 성과를 법률적 형식으로 공고히 하기 위해, 1953년 1월13일 유고연방의회는 건국 후 제2차 헌법인<유고연방인민공화국의 사회조직과 정치조직의 기초에 관한 근본법>(이하 약칭<근본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자치제도의 기본적 형태를 확립하게 된다.

    3) 노동자자치의 사회자치로의 발전

    50년대 시작된 노동자 자치는 유고 사회주의 자치이론 실천의 제일보이다. 노동자 자치는 기업관리제도에 있어서의 일대 근본적인 변혁이다. <노동자자치 법령>이 규정한 중요한 조치사항을 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적절히 분리한 뒤 민주적으로 선발된 노동자 관리위원회가 기업에 대한 경영권을 행사한다. 둘째, 기업경영권 가운데서 노동자집단의 주도적 지위를 확립하고, 기존 기업경영자의 지위와 역할을 변경, 기업경영자는 노동자집단의 일개 고용원으로서 더 이상 국가기구의 파견 대리자나 기업 내 정책결정권자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는다. 셋째, 기업 내에 광범위하게 직접민주제를 실시, 기업간부와 노동자위원회 그리고 관리위원회 성원에 대한 민주선거제와 정기윤번제를 시행한다.

    티토와 유고 공산주의자들이 보기엔 이상과 같은 내용을 갖는 노동자 자치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조치이었다. 그러나 실제 실천에 들어가서는, 노동자 자치의 발전은 기대와는 달리 매우 더디게 나타난다.

    그 이유는 과거 맑스 레닌주의 저서 중에 사회주의 자치제도와 관련해 의거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실천적 경험사례도 당시에는 참고할 만할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많은 간부와 대중들은 상응한 사상적 준비나 필요한 이론적 지도가 결여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노동자 자치의 원칙을 확립한 이후에도, 노동자 집단의 자치권한이나 노동자 집단과 국가의 소득분배방식 등과 같은 구체적인 현실 문제에 있어 장기간 명확한 방침이 주어지지 못하였다. 이렇듯 현실적이고 가능성 있는 타당한 조치들이 제시되지 못하였기에, 개혁은 종종 대중들의 현실적 요구에 비해 뒤처지게 되었다.

    이 밖에도 구체제와 구 전통적 관념의 속박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었기에, 노동자 자치를 포함한 사회주의 자치제도의 진전은 어쩔 수 없이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렇듯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유고 공산당원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자치제도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잃지 않았으며, 각종 장애들을 제거하면서 개혁이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1956년에는 소련공산당 20차 당 대회가 개최되어 후루시쵸프 주도하에 스탈린의 개인숭배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유고에 대해서도 전 사회에 걸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급격히 변화하는 국제 및 국내정세의 요구에 적응키 위해 1958년 4월, 유고연맹(주: 유고 공산당) 제7차 당 대회는 <유고연맹강령>문건을 토론 후 통과시켰는데, 이 강령은 훗날 유고 사회주의 자치제도발전의 헌장이라고 불려진다.

    국가주의 반대, 국가 축소 지향

    신 강령은 먼저 이론상 맑스 레닌주의의 국가와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사회주의 자치실천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저평가 하거나 무정부주의 경향에 반대함과 함께, 또한 국가를 사회위에 군림하는 만능의 것으로 보는 국가주의경향에 대해서도 반대를 표시했다.

    신 강령은 국가주의경향이 노동자계급의 창조적 활동을 질식시키고 노동자계급 역량을 쇠퇴시켰으며,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타인의 이익과 자기소외적 힘의 영향 밑에 처하게 만들어, 이로부터 심각한 사회동란과 정치위기 그리고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었다고 지적했다.

    다음으로, 신 강령은 자치제도가 노동 및 노동자계급 그리고 인간의 사회적 해방의 구체적 역사적 형식임을 재천명하면서, 생산자는 사회주의 사회발전의 기본적인 담당자이자 사회주의의 기둥임을 강조하였다. 사회주의 자치는 노동인민이 사회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는 방식을 통해 "당이 없는 직접사회주의 민주주의 길을 실현"하고, "국가의 특정 기능들이 소멸하는 길", "국가의 특정 기능들을 사회자치기능으로 전화시키는 길"이라고 규정하였다.

    유고 공산당 7차 당 대회 이후 1958년부터 1961년 사이에 유고는 다시한번 자치제 개혁의 열풍에 휩싸이면서, 자치를 기업관리영역으로부터 경제체제 전체로 확대하는 근본적 변혁을 시도한다. 1961년 3월 유고연방의회는 일련의 법률을 통과시켜 기업의 자주권을 진일보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이 가격/화폐신용/축적과 확대재생산/계획영역 등으로 확대되기도 전에, 국민경제의 균형적 비례의 상실로 말미암아 경제상황이 대폭 악화됨으로써 개혁이 뒷전에 밀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특히 신 분배제도를 시행한 이후부터, 기업 간에 앞 다투어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 직원들의 월급을 인상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1961년 경제부문의 개인소득이 23% 성장한 반면에 생산성은 겨우 3.4% 성장한 통계수치에서도 잘 나타난다. 경제상황의 악화와 소득분배영역의 혼란현상은 정치적 반대자들로 하여금 다시금 득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961년 말부터 1962년 중에 사회적으로 노동자 집단의 자치권리 확대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활동들이 출현했다. 이론계의 어떤 이들은 소위 "자유의지론" 학설을 제시했는데, 그들은 자본주의하에서 자본가들이 잉여가치 중에서 개인소비와 축적의 비율을 자율적으로 처리하는 원리를 들어, 만약 개인의 소비기금과 확대재생산기금에 대한 분배권한을 노동자 집단에게 넘겨주면 노동자들은 "자유의지"에 기반 하여 기계 설비들을 모두 "먹어치워 버릴 것" 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와 같은 사상적 조류 하에서, 1962년 4월 소득분배위원회는 새로 법률ㆍ조례를 제정하여 구 분배제도를 다시 회복시키는데, 이로써 자치개혁은 잠시 좌절을 맛보게 된다.

    개인소득은 23% 성장, 생산성은 3.4% 성장

    사회주의 자치개혁 중 겪게 된 곤란에 대해 유고공산당 지도부는 그간의 과업수행에 대한 중간분석과 총괄을 진행하였다. 1962년5월부터 7월까지의 기간 중 티토는 여러 차례 연설을 통해 경제영역에 출현한 혼란과 비정상적 현상들을 지적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자치제도의 발전과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구 경제관리체제간의 모순을 반영하는 것으로, 국가기관이 여전히 2/3의 확대재생산기금을 장악하고 연방정부가 경제관리체제에서 여전히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의 위기가 출현하는 것이 피하기 어려웠다고 평가했다.

    그는 따라서 반드시 공화국(주: 유고연방을 구성하는 자치공화국)의 권한과 책임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2년 7월 22일부터 23일 사이에 개최된 유고공산당 제7기 4중 회의에서, 티토는 경제문제를 논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탈 중앙집권화로부터 출발하여야 하고 노동자 집단을 경제 일체화의 최종적인 구현자로 삼아야지, 결코 국가가 그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중앙에 집중된 기금의 일부를 관리상 이미 시험을 거친 노동자 집단에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티토는 "오늘날 단지 하나의 사회주의 길(주: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만을 고집하거나, 다시 과거에 규정했던 길로 되돌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라고 하면서, 오직 사회주의 자치제도를 발전시키는 것만이 올바른 길이기에 개혁을 심화시키는데 있어 더욱 대담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티토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자치제도 주창자들은 자치제도의 더욱 굳건한 승리를 획득하기 위해, 1962년 하반기부터 1963년 4월까지 신 헌법초안 마련작업을 진행했다. 이 헌법은 4월 7일에 통과되었다. 신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새로 명기되었다.

    첫째, 사회주의 자치제도를 생산영역으로부터 사회영역으로 확대하여, 교육ㆍ문화ㆍ위생ㆍ사회복지 등 사회서비스 사업기구 내에서 노동조직의 자치권리를 확립한다. 둘째, 기업과 구역(区域) 그리고 연방에 이르는 3등급 사회조직을 확립하고, 모든 의회는 구역과 노동조직의 직접선거에 의거 구성한다.

    셋째, 연방의회는 연방원(민족원을 포함하여)ㆍ경제원ㆍ조직정치원ㆍ사회보험원ㆍ교육문화원을 설립한다. 넷째, 국가 지도층은 윤번제와 연임 제한제를 실시하여 정치업무의 독점을 방지하는 한편 간부의 소장화를 이룬다. 다섯째, 전 국민 방위체제를 건립하고 연방과 공화국 그리고 노동자 집단이 공동으로 국방업무를 담당하도록 한다.

    1963년의 신헌법은 유고 사회주의 자치제도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것은 헌법적 형식을 빌려, 1953년 <근본법>이 공표된 이래의 자치제도개혁의 성과를 긍정한 기초위에 노동자 자치를 다시 사회자치로 전면 확산시켰으며, 이후 사회자치제도의 발전을 위한 출발점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 헌법은 <자치헌법>이라고도 불린다.

    4) 자치정치제도개혁

    사회주의 자치제도 건설과정에서 유고는 여러 차례 중대한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1차 개혁은 자치제도의 초기인 1949년부터 1953년 사이에 수행되었는데, 국가관리기구에 대해 대규모 개혁과 조정을 진행하여 여러 차례 연방과 공화국 정부를 개조하고 기구를 축소 정예화, 10만 명의 정부직원을 삭감하는 한편 권리를 하방하였다.

    또한 연방정부에 있던 대부분의 공업 관리부문들을 철폐하고, 석유ㆍ야금ㆍ기계제조ㆍ교통운수 외의 모든 공업에 대한 관리 권한을 지역 정부에 이양했다. 연방정부는 또한 모든 중앙 직속 기업들을 공화국에 넘겨주는 조치도 취했다. 입법과 행정의 분권문제에 있어선, 입법기구에 예속된 집행위원회를 신설하여 입법집행권과 행정관리권을 분리함으로써, 입법권을 강화하고 행정권의 약화를 꾀하였다.

    제2차 정치개혁은 노동자 자치에서 사회자치로 전환하는 시기에 추진되었는데, 다시한번 연방정부 권한을 대폭적으로 축소하고 공화국ㆍ자치성(구)과 자치기구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한편, 그들 간에 직접적인 경제협력을 허락하고 연방정부를 통하지 않고서도 연합경제조직을 세우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연방과 공화국ㆍ자치성 간에 두 개 등급의 헌법법원을 각각 설치하여 헌법과 법률을 수호하는 한편, 법률 감독을 진행하여 연방과 공화국ㆍ자치성간 그리고 각 공화국ㆍ자치성간의 법률 분규를 해결토록 조처했다. 당의 지도방식을 개혁하기 위한 조처로는, 당의 입법기관 중의 지위를 다른 각 원(院)과 동등한 위치로 바꾸고, 연방원ㆍ경제원ㆍ사회보험원‧교육문화원과 함께 이들과 동급의 정치조직원을 설립한 후, 유고공산당의 정치조직원 내의 지도적 지위를 규정했다.

    소속 공화국과 자치성에 권력 분산

    이러한 조치들에서 보듯 유고의 정치개혁이 줄곧 민주화ㆍ탈중앙집권화ㆍ비관료주의화의 방향으로 진행된 점은 누가 봐도 명확하다. 특히 유고공산당의 지도적 지위와 지도방식의 개혁에 있어, 시종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인민과 자치조직을 통해 실현하는" 탈정권당의 관점을 견지하였던 것은 매우 독특하다고 하겠다.

    3차 정치체제개혁은 60년대부터 70년대 초, 경제상황이 매우 어렵고 정치충돌이 빈번히 벌어지는 가운데서 진행되었다. 경제영역에서는 60년대 초 이래로 정체와 경제 질서의 혼란이 상당기간 지속되고 있었다. 1964년 12월 유고공산당은 8차 당 대회를 소집하여 자치와 사회경제관계의 "탈 중앙집권화"문제를 중점적으로 토론한 뒤, 노동자 자치로부터 사회 자치로 개혁을 확대 실시한다는 기존의 방침에 대해 전면적인 지지를 재확인했다.

    유고공산당 지도부내의 투쟁은 종종 민족모순과 혼재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유고공산당은 이론영역에 있어 지난 20여 년 동안, 연방제의 건립으로 민족문제가 이미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관점이 존재해왔다.

    특히 자치이론이 출현한 이후, 많은 사람들은 노동자 자치와 사회자치가 실현되기만 하면 민족자치와 민족평등의 원칙이 자연스럽게 함께 실현되리라 생각하여 민족문제를 소홀히 하여왔다. 이러한 점은 1953년 헌법에서 민족원을 없앤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자치제도가 발전함에 따라 각 공화국간의 이익분화가 더욱 현저히 나타나고, 이에 따라 민족모순 역시 점점 돌출적인 것이 되었다. 경제체제개혁 과정 중에 나타난 각 공화국ㆍ자치성간 경쟁적인 "정치공장" 짓기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티토가 말한대로, "정치공장"을 짓는 목적은 중앙정부로부터 돈을 타내기 위해서며, 지방정부는 "정치공장"을 자기 지방의 자산쯤으로 여기면서 공장은 한 번 짓고 나면 누구도 뺏어갈 수 없을 것이라는 속셈을 지니고 있었다.

    자기 지역에 공장 짓기 열풍

    민족주의와 지방주의는 서유럽과 가까우면서 유고연방 중 가장 부유한 슬로베니아ㆍ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를 비롯한 경제적으로 낙후된 기타 공화국 간의 모순으로 나타났다. 전자는 적극적으로 자치를 옹호하면서, 아직도 중앙집권화 된 정치경제체제를 지금보다 더욱 더 개혁할 것과, 노동자 집단 자치권의 진일보 확대, 특히 확대재생산 기금의 직접사용권 확대를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후자는 중앙집권적 체제의 보존과 강화를 희망하면서, 연방정부가 독점적인 계획적 분배를 수행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은 좀 더 많은 융자와 투자 그리고 보조금을 받아낼 수 있기를 원했다. 이러한 모순이 유고공산당의 중앙 내부에도 반영되어 유고 정치국면은 더욱더 복잡하게 변화되어 갔다.

    1963년 유고연맹 8차 당 대회를 전후하여 티토는 여러 차례에 걸쳐 유고의 민족모순이 날로 돌출되어 가는 위험성에 대해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자치를 유고 사회주의 자치제도의 기초로 보았고, 중앙집권주의와 국가주의적인 경제체제 철폐문제를 민족을 포함한 노동자의 일체의 자유로운 자치권리 획득이라는 각도에서 사고하였기에, 결과적으로 노동자 자치권과 민족 자치권을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자치제도의 최종적인 확립은 동시에 민족모순의 철저한 해결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인식하에 자치개혁과 권력하방을 동일시하고, 개혁에 곤란이 생길수록 권력하방을 더욱 추진함으로서, 마침내 60년대 중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지방 민족주의와 중앙지도력간의 충돌 위기를 배태한다.

    경제ㆍ정치와 사회위기가 차례차례로 멈추지 않고 오고 있는 가운데, 유고공산당 지도부는 60년대 중반 이후 여러 차례의 헌법개정을 통해 전통적인 연방제를 자치수준이 강한 "자치연방제"로 바꾸어 나갔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연방정부의 권한이 지속적으로 제한되고 축소되는 것과 반비례하여, 각국 공화국‧자치성의 권한과 지위는 강화되어 갔다.

    나중에는 연방정부의 역할은 단지 유고슬로비아 전체 민족의 공통이익을 실현하거나, 국방ㆍ외교ㆍ통일적인 정치경제체제유지, 내지는 대외관계 등 전국적인 성질의 기능만으로 국한되어졌다. 기타 기능은 각 국 공화국과 자치성의 일치된 동의하에서 비로소 행사할 수 있게끔 하였는데, 이로서 연방정부는 전국적인 국민경제에 대한 거시관리능력을 많이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자치주권의 부단한 확대와 연방권력의 점차적 허구화는 "연방제"를 사실상 "국가연합"으로 바꾸는 것으로, 민족분리주의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국가의 최고행정관리권력이 점차 쇠약해지는 것과 동시에, "당정분리"를 기본방침으로 하는 유고공산당의 "연방화"경향 역시 날로 가속화되었다. 1969년 3월 소집된 제9차 당 대회는 유고공산당이 "연방화"를 이루는 중요한 기념비적인 대회이다. 과도한 자치정치제도의 실험은 이미 현실 물질조건의 발전 수준을 뛰어넘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자치정치제도의 실현을 위한 민주화/탈 중앙집권화/비관료화의 개혁과정에서, 유고공산당은 자치제도원리를 당 내부에도 끌어들였다.

    1974년 2월 유고연방의회는 신헌법을 통과시켜 연합노동원칙을 헌법에 명시하고, 같은 해 5월 유고공산당 제10차 당 대회 또한 이 신헌법을 내부적으로 통과시켰다. 1976년 11월, 유고연방의회는 또 <연합노동법>을 통과시켜 연합노동에 대해 상세하게 규정함으로써, 사회주의 자치제도는 노동자와 사회자치의 기초위에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로써 티토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자치이론의 창시자들은 실천적으로 자치 정치ㆍ경제제도의 건설 작업을 일차적으로 완수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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