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노무현 시대로 돌아가자고?"
    2009년 06월 29일 07: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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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중민주주의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

토인비는 인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했지만, 지금 한국사회를 보면 마치 ‘퇴행과 반목의 역사’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노무현 서거 이후로 마치 그가 민주주의 그 자체라도 된다는 듯 이명박에 비교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강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동기를 제공한 것은 전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소통부재, 법치를 앞세운 과도한 공권력 탄압과 언론장악 시도 등이 동시에 겹치면서 일어나는 극심한 위기감에 기인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명박 정부는 ’공포정치’의 말로가 종국엔 어떠했는가를 지난 역사로부터 자성하고, 선거를 통해 정당하게 선출된 권력이란 오만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모든 것에 우선해서 주권자인 국민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민주정부라면, 그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주권자인 국민을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국민은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한편 민주회복을 부르짖고 있는 국민들은 이제 좀 냉철하게 돌아보고 목표와 방향성을 재정립하고 나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슬픔과 분노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사진=사람사는 세상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 우리에게 비통과 충격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역시 권력자였고 기득권적 삶을 살다간 한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시대가 휩쓸고 간 깊은 상처들은 여전히 아물지 못하고 고스란히 남아 우리 민중의 삶속에서 더욱 악화되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우리 자신과 일체화 해내는 상징적 단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바로 ‘비주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른 기득권적 시각이 제공한 상징적 프레임에 불과합니다. 한때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대통령 노무현의 삶이, 어떻게 피지배계층으로서 영원한 비주류일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처지와 같은 것일 수 있겠습니까.

‘비주류’는 잘못된 감성적 동일화

그는 이미 개인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주류를 실현했고, 주류적 삶을 살다 갔으며, 사회계급적으로도 이미 주류인 것입니다. 감성적으로 동일화한다고 해서 결코 현실에서 동일화될 수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처지를 우리들의 처지와 일체화시켜서 마치 그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는 듯한 외침과 요구는, 결국 그가 살아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에 비례해서 또 다른 정치적 주류인 그의 측근들과 그의 정파에 대한 정치적 헤게모니만을 강화시켜 줄 뿐이지(지배계층 권력 강화), 정작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냉철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역사로부터, 지난 시절의 후회들로부터 우리 피지배계층인 민중들이 포착하고 각성(覺醒)해야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이제 더이상 단지 ’퇴행과 반목의 역사’를 위해 우리 민중의 피가 의미없이 희생되어선 안 됩니다.

즉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난 역사에서 단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고 타협해온 역사라면, 이젠 주권자인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자신의 이름을 걸고, 좀 더 많은, 그리고 좀 더 나은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 비록 방향성과 뚜렷한 목표없이 진행되었기에 잠재적 실패로 끝났지만 – 작년 ’촛불집회’를 돌아보면 내용면에서 정치인이나 어떤 정파적 입장을 배제하고, ‘우리 자신의 것을 위해서, 우리 자신 만으로, 우리 자신의 것을 당당히 요구’했던, ‘민중직접정치’, ‘민중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시도였으며 우리 민중사로 봤을 땐 상당히 의미있고 값진 쾌거였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중이 곧 토인비의 말대로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올바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2. MB정권은 참여정부와 이란성 쌍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왜 비극적 죽음을 맞았을까요. 그의 죽음에 왜 우리사회는 이토록 슬퍼하고 또 어떤 이들은 죄책감마저도 느끼는 걸까요. 그와 그를 포함하는 측근들의 잘잘못을 떠나, 또 이명박 정권의 표적수사라라는 의혹을 떠나서 생각해 보자면 바로 언론이든 우리사회든 ’형평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일종의 ‘억울함과 배신감’이 아마도 우리 개개인의 마음속 ‘양심’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그의 죽음을 ’인간적’이란 이름으로 ’감상적 이데올로기화’할 수 있는 근원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억울함’이나 또는 ‘감상적 이념화’에만 머물러서 과연 우리사회의 ‘형평성’이 회복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억울한 죽음들이 다시는 재발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전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형평성이 회복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형평성’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분별력(分別力)’이 제대로 작동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별력이 전제되지 않은 형평성이란 아예 존재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분별력’은 말 그대로 ‘세상물정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니 모든 ’정의(正義)’는 사실 여기서 출발해야 하고, 또 그래야 형평성을 유지하는 ‘정의 사회’가 구현될 것입니다. 바로 노무현 시대에 우리가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상식있는 사회’ 말입니다.

분별력 잃은 사회의 비극

자, 그러면 논점을 흐리지 않는 한도에서 다른 관점에서도 한 번 살펴보죠. 왜 우리사회는 이런 억울한 사회적 죽음들이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만 하는 것일까에 대해서 말입니다.

노무현의 죽음이든, 박종태의 죽음이든, 용산참사의 죽음이든 아니면 그 이전 노무현 시대에도 끊이지 않았던 23명의 죽음이든, 또 그 이전 정권들에서의 죽음들이든,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런 비극적 상황들을 대를 물려가며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겪어내야 하며, 또 일차적 책임을 물어 당대의 정권들을 뒤집던 갈아엎든 해봐도 단절되기는 커녕 오히려 늘어나기만 하는 근원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죄를 짓기 위해, 죄를 겪어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리 만무한 우리들이 왜 모두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말입니다. 이 당혹감, 이 비통함, 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들을 불러들이는 정체는 도대체 어떤 괴물이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언론을 포함한 우리사회가, 우리 개개인 다수가 모두 분별력을 상실했기에 그렇습니다. 본질을 보려는 노력보다는, 분별력을 상실하고 오로지 ‘진영주의’, ‘지역주의’, ‘패권주의’에만 매달려 그러한 시각에서만 보려하고, 재단하려 하며, 주장하려 하기 때문에 결국 정치를 정치답지 못하게 하고, 사회를 사회답지 못하게 하며,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극은 이 연속선상에서는 결코 희극으로 바뀔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비교할 수도 없이 서로 다른 ‘극과 극의 정부’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특히 노무현 서거 이후를 보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주장은 얼마만큼의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주장일까요.

‘분별력’을 회복하기 위해, 고질적 ‘진영주의’의 폐단과 단절하기 위해,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결국 ‘민중민주주의’로 나가기 위해, 과거(노무현정부)와 현재(이명박정부)에 대한 비교는 지금 우리(사회)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투명하게 비춰주는 리트머스 용지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명박 시대가 아직 반환점도 돌지 못한 상황이라 부득이 노무현 시대를 중심으로 현재까지의 이명박 정권에 나타난 정책과 현상들만을 비교해 가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럼, 투과해 보죠.

1) 토건국가와 노가다 정권

이명박이 당선되자 언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과거 경력과 ’대운하 정책’을 꼽으며 이제 곧 대한민국이 ’토건국가’로 변질될 거라며 많은 우려들을 쏟아냈고, 또 지금도 그런 비판들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을 뒷받침 해주듯이, 현재 ‘4대강 정비사업’으로 이름만 바꿔 진행 중인 ‘대운하 사업’은 이번에 새로 추가된 4조 7천억을 합하면 약 18조 6천억 원의 예산이 소요되는 대규모 공사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이명박 정부만 놓고 볼 때는 타당성을 가질지 모르나, 바로 직전의 노무현 정부와 비교하면 분별력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무현 시대의 대규모 토건사업 중에 하나였던 ‘행정수도이전사업’은 2004년 국회예산처 보고에 따르면,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수치를 반영하여 2016년까지 무려 103조5,175억 원으로 추정되었고 그의 임기 중에 약 50조 원이 이미 토지보상금 등으로 집행되었습니다.

또 이와는 별도로 임기 중 발주했으나 다 마치지 못해 다음 정권으로 넘긴 각종 지방공사들만 해도 약 110조 원에 이릅니다.

그러니 설령 앞으로 일각의 우려처럼 이명박 정권이 4대강 정비사업을 최초의 원안인 대운하 사업’으로 다시 전환해 밀어 붙인다 해도 대략 30조 원의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했는데, 이걸 감안해서 비교해 보더라도 노무현 정부에 비하면 총량면에서 여전히 상당한 차이가 있는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각 공사들이 가진 타당성이나 경제성 등은 각각의 사업마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 별도로 하더라도, 적어도 한 정권이 집행한 총 토건사업의 규모나 예산 등으로 보면 ‘토건국가’, ‘노가다 정권’이란 소리는 이명박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노무현 정부가 들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는 이명박 정권 역시 4대강 사업과 참여정부로부터 이어받은 토건공사만 하더라도 앞으로 새로이 어떤 사업을 발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그의 임기 내내 파 엎을 땅은 차고 넘칠 거라는 점에서, 이 두 정권은 닮은 꼴이자 상호 연속성을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서민 대통령

노무현 서거 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미지만을 형상화해서 그를 ‘서민 대통령’이라 부르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명박 역시 요즘 부쩍 서민 경제를 강조하며 서민대통령으로 불리기를 내심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서민 대통령이란, 무엇보다도 서민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성공한 대통령이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정권에서든지 서민경제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야는 아마도 부동산 정책, 고용 정책 그리고 물가 정책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이러한 문제에 관해 일일이 도표와 분석 등을 통해 좀 더 자세히 검증해 낼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다수 서민들이 당시에 몸소 겪었던 체험적 고통들만큼 더 실질적이고도 정확한 평가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노무현 퇴임시 “부동산 빼곤 꿀릴 게 없다”고 했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부동산 정책은 그냥 실패 정도가 아니라 아주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한창 부동산이 폭주했던 2005년 경에는 자고나면 어디가 “몇 억씩 올랐네” 같은 소문들이 입에서 입을 타고 마치 일상의 인사처럼 반복되었던 시간들을 아마 모두들 기억할 것입니다.

특히 수도권은 말할 필요도 없고 행정수도 이전지인 충청권을 비롯해서 기업도시, 산업도시 후보지 등으로는 특히 심했고 그밖의 지방들도 약간의 정도 차이는 있을 지언정 한 마디로 폭등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한 결과는 이미 참여정부 초기의 ’분양원가 미공개’의 혼란으로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후 잇달아 내 놓은 보완책들마다 오히려 역으로 투기세력들의 좋은 지침서처럼 되버렸으니까 말입니다.

결과론적으로 보더라도, 90년대 초에 세계에서 토지가치가 가장 높은 일본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토지가치 317.5%라는 수치로 인해 심한 버블현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절에, 한국은 이미 그 배가 훌쩍 넘는 804.9%라는 깜짝 놀랄 한계상황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는 잇다른 실책으로 여기에 다시 투기광풍이 또 한 번 휩쓸고 지나가도록 조장 내지는 방임했으니 이것이 무능이 아니면 무엇이며 실패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한국 토지가, GDP 여덟 배

그래서 그 결과 김대중 정권 말기인 2000년 1월에는 전국 아파트 시가 총액 ’334조’와 증권거래소 상장주식 총액인 ’322조’가 거의 엇비슷했던 상황을 2005년 4월에는 각각 ’1000조/436조’로 무려 2.3배의 아파트 자산가치를 훌쩍 높여놓고 말았던 겁니다. 이는 ’한-미-일’간 부동산이 전체 가계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보더라도 미국이 전체의 36%, 일본이 43% 인데 비해 한국은 무려 89%가 부동산 자산에 쏠려 있는 것에서도 불안정성은 극히 높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세계 경제위기의 주범인 미국발 모기지론 사태에서 보듯이 미국은 불과 36%가 가계자산이 몰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으로 부터 거의 공황사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89%가 가계자산에 몰려있는 한국은 지금 이만큼이라도 근근히 버티고 있는 게 기적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동산 광풍이 아무리 몰아쳐도 국민 모두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큰 문제가 될 수 없겠지요. 올라도 같이 오르고 내려도 같이 내릴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택 보급율은 통계상으로 이미 예전에 100%를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체 43%는 무주택자의 처지에 놓여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는 한국의 주택시장이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지를 잘 나타내 줍니다.

즉 일부 가진 자들이 여러 채의 주택을 소유 독점하고 있다는 표면적 사실 이외에도 부동산 시장이 한 번씩 들썩일 때마다 부의 쏠림현상은 더욱 극심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서민들의 주택마련 꿈은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절망적 진실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노무현 정부가 광풍이 모두 쓸고간 후에야 부랴부랴 내놓은 ’종부세’ 보완책이 어느 정도 주택시장을 안정시켜 갈 즈음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종부세 폐지를 통해 또 한 번 인위적으로 부동산 열풍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미국발 금융위기 사태로 아직까지는 시장이 급격히 요동치고 있지는 않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신호가 떨어지면 이는 폭탄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곤 다시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겠지요. 노무현 정부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물론 분별력 잃은 사회에선, 위기시엔 언제든지 가장 큰 피해자로 남는 건, 항상 힘없고 가난한 우리 민중들이 될 것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어서 노동정책을 살펴 보겠습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만큼은 노무현 정부가 역대 정부 중 최악의 정부였다고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노동환경이고 노사관계고 다 떠나서, 노동의 미래를 완전히 목졸라 살해한 ‘비정규직 악법!’, 이 하나만으로도 그러한 평가를 받기에 조금도 모자라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무현은 비정규악법의 입법자

이 법은 애초부터 절대 법제화 해서는 안되는 것이 었습니다. ‘노동 유연화’니 ‘기업 경쟁력 재고’니 하면서 자본의 손을 들어준 이 법의 파괴력이란 것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설 때가지 순식간에 번져나갔고 이런 문제점이 드러나자 부랴부랴 ’‘년 유예 후 정규직 전환’이란 카드를 빼들었지만 마치 부동산 정책에서와 같이 오히려 ‘만기해고’를 정당화하는 법으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한 번 만들어진 악법은 마치 국보법이 그러한 것처럼, 폐지의 실날 같은 희망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세대를 지나야할지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 법의 포악성은 노동의 미래인 이 땅의 청년들을 장기간의 실업상태로 내몬 것은 물론이고 직종과 직업군을 넘어 점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가기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 이것을 다시 4년 연장안으로 바꾸려 하지만 이 안은 결국 비정규직은 영원히 비정규직으로서만 살다 가라는 것에 다름 아니고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는 더 확대시키라는 것밖에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부의 발상이 애초부터 ‘비정규직 축소’나 ‘실효성 있는 보완책’을 고민한 것도 아닌 달랑 기간연장에 올인하는 것만 봐도 이 법이 도대체 누구의 편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노무현 정권에 이어 이명박 정권의 정체는 어디에 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니 말입니다. 비록 지금 5자연석회의니 뭐니 하면서 일각에선 묘안을 찾아내려고 분주하다지만, 과연 폐지 이외에 근본적 대안이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잊을 수도 없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탄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텐데, 더구나 민주정부라면서 이명박은 용산 철거민들을 불태웠고 노무현은 이랜드 해고 노동자들을 철문으로 막고 용접을 했습니다.

다행히 사고가 안나서 그렇지 도대체 인간을 대하는 본질에서 이 두 정권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겁니까. 나는 이 두 정권의 차이점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노무현이 이명박을 만들었고 이명박은 노무현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저잣거리에 떠도는 헛소리가 아닙니다. 토목사업을 이어받았고, 실용이라는 자본 프렌들리 경제정책을 이어받았으며, 부동산 광풍을 답습하려 하고 있으며, 노동정책의 근간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하물며 자유주의자라는 배태에 신자본주의라는 자양분을 먹으며 ‘성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서민 대통령으로 불리고 싶은 바램까지 모두가 똑 같습니다. 이쯤이면 생긴 겉모습만 다른 이란썽 쌍둥이가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단지 형제 중에 더 포악하거나 더 순한 형제가 있다고 해서 그들을 형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진영주의 벗어나 우리 손으로

작년 7월 <시사IN> 보도에 따르면, 우리사회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가 무려 7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상대빈곤율은 1996년 11.3%에서 2006년 17.9%로 10년 사이에 6.6%가 증가했고 또한 빈곤층을 뜻하는 하위 20%의 소득점유율은 2007년 5.6%로 1980년 이래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단순 양극화를 넘어 중산층은 점점 줄어들고 빈곤층은 한층 더 늘어나고 있다는 절망적 지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제전문가들은 어떤 현상들이 통계의 수치로 잡힐 때는 이미 위기상황에 들어선 것이라고 하더군요.

가진 것 변변찮은 우리 민중들에게는 거의 직격탄이 될 수 있는 위의 두 가지 정책실패만 살펴봐도 왜 오늘날 우리 민중들의 삶이 이토록 걍팍해졌는지 굳이 또 다른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이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대한민국에서 민중으로 살아간다는 건, 집이 있고 없고를 떠나 – 집이 있어도 자산가치에서 89%를 차지한다는 건 대다수가 은행 대출을 끼고 산다는 가정하에 안정성은 매우 떨어진다고 볼 수 있고, 집이 없어도 그만큼의 주거비용을 또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야 할테니 – 항상 폭탄을 지고 사는 것처럼 불안한 나날의 연속인데 게다가 고용문제 마저도 그 불안정성이 더욱 높아만 가니 누가 감히 희망적 꿈을 말할 수 있고 하물며 밝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 지경까지 내몰았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정치’입니다. 그럼 정치를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요. 그것은 민주주의는 정치를 작동케 하는 원리가 되어야 하고, 정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주장하건데, 이제는 우리 민중 스스로 우리 자신을 위해 진영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처럼 패를 갈라 천년 만년을 아옹다옹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국 기존 기득권과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해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정치를 국민에 복무케 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가 국민 위에 군림케 하는 것을 돕는 행위라는 것을 이제는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권력은 용인을 먹으면 오만이 됩니다. 방임을 먹으면 독버섯이 됩니다. 또 냉소를 먹으면 살얼음이 되고 참여를 먹을 때에야 비로소 순한 양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참여인가 입니다. 진영주의에 포획된 참여는 참여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진영만을 위한 용인과 방임의 참여입니다. 진정한 참여정치란 우리 민중끼리 똘똘 뭉쳐, 저 강고하고 오만한 기득권으로부터 우리의 이름으로, 우리의 권리를 찾아내고 마침내 모든 정치적 행위가 우리의 손을 거쳐 우리를 위해 작동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중직접정치’이고 ‘민중직접민주주의’인 것입니다.

저 허울만 좋은 ’대의민주주의’는 이제 더이상의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한번 위임한 권력도 잘못하면 언제든지 우리 손으로 거둬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이 자본의 천국에서 하물며 기업도 주주들의 힘으로 언제든 경영진을 갈아 치울 수 있는데, 왜 나라의 주인인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단 말입니까.

몹시 부당한 일입니다. 심히 고약한 일입니다. 억울하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세상천지에 주인이 하인의 허락을 구해야 하고 게다가 하인에게 몽둥이 찜질까지 당해야 한다는 법은 조선시대에도 들어보지 못한 몰상식의 극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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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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