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은 좀비 영화였다"
        2009년 06월 29일 07: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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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간다. 영화를 볼 수 있는 창이 영화관말고도 공중파를 비롯해 케이블이나 위성 등등 다양한 채널의 TV, 인터넷, DVD, 이동통신 등등 참 다양해진 매체환경에도 불구하고 영화관에 간다.

    더구나 어둠의 경로를 통해 때로는 영화관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영화를 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널려있는데도 불구하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신이 즐길 대상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작품을 만든 이의 저작권을 존중하기 때문에 기꺼이 관람료를 내는 합리적이고 양식을 지닌 사람들이다.

    억지로 광고보는 것도 억울한데

    이런 올바른 문화소비 주체로서의 관객들에게 자신이 낸 관람료 외에 다른 것들까지 억지로 보라고 하는 건 불합리하고 무례한 짓이다. 그런데도 많은 영화관들은 관객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광고를 틀어댄다. 광고를 보는 만큼 관람료를 깎아주는 것도 아니면서.

    공공기관도 아닌 사설영화관에 자기 돈 내고 영화 보러 가서 극장주가 일방적으로 들이미는 광고까지 봐야하는 것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이제는 정부까지 나서서 ‘대한늬우스’를 보라는 뻘짓을 하고 있다.

    맙소사, ‘대한늬우스’라니!

    따분하고 민망해서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관제 홍보영상물의 본질을 이토록 속속들이 내보이는 제목을 붙인 걸 보니, 이런 일을 벌인 주체의 수준이 한심한 건 둘째 치고 영화관객으로서의 대중이 고작 그 수준의 대상으로 취급당한 자체가 참 기가 막히다.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만든 건지.  

    모름지기 ‘뉴스’란 새로운 소식이어야 하건만 묵어도 한참 묵어 군내 풀풀 나는 영상효과를 만들겠답시고 부러 화면에 죽죽 비 내리는 스크래치를 낸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2009 대한늬우스’라는 타이틀 아래 밑도 끝도 없이 ‘대한민국 정부’라고 박아놓은 건 또 무슨 배짱인지.

    ‘정부’란 넓게 보자면 한 나라의 통치기구 전체를 가리키고, 좁혀 보자면 내각 또는 행정부 및 그에 부속된 행정기구만을 가리키는 말로 헌법에 따르자면 ‘대한민국 정부’는 대통령과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로 구성된 강력한 권위와 권한을 지닌 정치의 중심이다.

    그런데 ‘대한늬우스’라는 표제는 이런 권위와 권한이 얼마나 주체성도 없고 무식한지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굴욕적인 정부의 의식수준

    ‘늬우스’라는 말은 어디서 온 걸까? 영어로 news의 발음은 [njúːz]인데 이걸 일본어로는 ‘ニュース’라고 쓰고, 그 음 하나하나를 따로 읽으면 ‘니유-스’가 되지만 제대로 이어 읽으면 ‘뉴-스’가 된다.

    일제 식민통치에 미군정까지 거치면서 이 말이 한국에서는 ‘늬우스’가 되었다가 외래어표기법이 정리되면서 ‘뉴스’로 고쳐진지 오래다. 그런데 굳이 ‘뉴스’가 아니라 ‘늬우스’라고 하는 정부의 의식수준은 시대착오적인 것을 넘어 굴욕적이라고 할 밖에.

    ‘대한늬우스’가 형식과 일부 출연진을 빌어온 ‘대화가 필요해’는 또 어떤가? 한때 개그콘서트의 장수 인기 코너였던 ‘대화가 필요해’가 주는 재미의 핵심은 ‘대화’가 아니라 ‘대화 불능’에 있는 것이었다.

    ‘대화가 필요해’는 흔히 ‘밥도(밥 줘)’, ‘아는?(애는)’, ‘자자’ 세 마디로 모든 대화를 해결한다는 경상도 남자의 가부장적 권위가 무식하고 낯 두꺼운 아내의 도발과, 자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소심한 아들의 반항에 부딪히는 소통 부재의 가정을 풍자하면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여성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장면. 

    남편은 아내를 못났다고 무시하고, 아내는 남편을 무능하다고 비난하고, 아들은 아버지가 권위적이라고 반항하는 이들 가족은 밥상머리에서 각자 다른 소리하다가 번번이 다투고 결국은 서로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 가족이 말 안 통하는 건 자기들끼리 만이 아니라 가족 밖의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 가족을 찾아오는 사람은 집안 어른이든, 이웃이든, 음식배달원이든, 잘못 찾아온 방문객이든 다들 대화가 안 통한다.

    그래서 대화가 필요한 상황이 지속되고, 그런 상황이 웃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막상 대화가 통하는 순간이 되면 이 프로그램은 끝나야한다.

    다 우려먹고 폐기처분한 꼭지

    한동안 인기 있던 이 프로그램이 폐지된 건 그 형식 안에서 우려먹을 건 다 우려먹었기 때문이다. 특별출연자도 불러오고, 극중 아버지가 삭발까지 해보면서 버티다가 그 형식을 가지고 더 이상 뽑아내봤자 재미는커녕 식상하기만 할 것이 뻔해 폐지된 프로그램의 형식을 따와서는 정부정책을 홍보하겠다니.

    홍보물 끝자락에 던져지는 ‘상상하라 새로운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민망하게도 대한민국 정부의 상상력은 이런 식으로 또 다른 조롱거리가 되어 웃음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웃음은 코웃음이고, 비웃음이고, 쓴웃음이다.

    이미 관객들은 ‘대한늬우스’ 상영하는 극장 안가기를 제안하고 있다. 그걸 틀겠다고 정부가 극장에 지불하는 비용이 2억, 극장 수익 중 유료관객 5~6만 명분의 금액이다.

    영화관이 영화가 아니라 광고를 팔아서 수익을 내겠다고 작정한 바가 아니라면 이런 식의 정부와 극장의 거래는 관객에게 폭력이다. 관객은 분명 영화를 보기 위해 관람료를 낸 것인데, 자신이 낸 세금으로 만든 홍보물을 또 자기 돈 내고 억지로 봐야한다면 이건 이중과세인데다가, 선택권 박탈이다.

       
      ▲독재와 함께 기억되는 대한늬우스의 추억. 

    게다가 정부당국은 뉴스가 아닌 정책홍보라고 주장하면서 이 ‘대한늬우스’를 ‘부활’시킨 것이 잘한 일이라고 뻐기기까지 하고 있다.

    원래 폐기되는 것은 그만 사라질 때가 되었기 때문에 폐기되는 것이다. 1945년 조선시보로 시작했던 ‘대한뉴스’가 1994년 폐지된 것은 그것이 사라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부활과 좀비

    죽은 것을 되살리는 것이 ‘부활’이라고 정부는 주장할지 몰라도, 영화에서는 죽은 시체가 되살아나는 것을 ‘좀비’라고 한다는 걸 알기나 하는지……

    좀비 영화에서 떼로 몰려다니며 사람을 공격하는 것 말고는 말도 안 통하며, 꾸역꾸역 되살아나 세상 모든 인간을 좀비로 만들려는 괴물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좀비의 존재 자체를 산산이 없애버리는 것뿐이다. 마침 극장가에서 대목으로 보는 여름방학 시즌인데 ‘대한늬우스’가 다른 영화들까지 물고 늘어지는 좀비가 되는 걸 보니 가뜩이나 더운 여름 불쾌지수만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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