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공산주의자란?
        2009년 06월 29일 09: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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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한-중-일 고승들의 임종게를 같이 해석하느라고 노르웨이 시인 에를링 키텔센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초역을 하고 그 시인이 시역해 우리가 같이 노르웨이어로 한국명시집과 임종게(偈, 고승들이 입적할 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편집자 주) 번역서를 낸 일이 있는데, 이제 임종게들에 대한 심층해석 작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일하다가 같이 한담을 하게 됐는데, 제가 약 1년 전에 노르웨이 저명 소설가 다그 솔스타드 선생이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텔레비전에서 밝혀 주목을 끈 사건을 거론하면서 "그래도 노르웨이가 부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솔스타드의 ‘공산주의자 선언’은 폭력 혁명이라기보다는 이윤추구가 없는 사회에 대한 막연한 내면적 지향을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대한민국에서는 만약 저 같은 중생이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노자와 석가가 궁극적으로 공산 사회를 꿈꾸었듯이 나도 공산주의자다"라고 "내면적 이상 차원의 공산주의자"란 말을 했어도 그 다음 뒷처리가 보통 버거운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뭐, 감옥에 가지 않는다 해도 방송국에는 두 번 다시 부르지 않을 확률만큼은 높을 걸요. 그러자 에를링이 그렇게 답했습니다:

    "뭐, 한국에서야 재산계급의 사유제 근간 ‘흔들리기’에 대한 공포도 아직 남아 있기도 하고 남북 대치 상황도 있고 미국 영향도 태심하기에 ‘공산주의’라는 말에 대한 지배자의 거부 반응은 아주 강하겠지만 노르웨이만큼은 이 정도는 전혀 위험시되지 않습니다. 노르웨이 공산당들이 이미 이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것도 그렇지만 공산주의는 이 체제와 행동 양식이나 근본적 마음가짐 등을 달리하지 않아 크게 이질시되지도 않지요.

    공산주의자들이 재산가의 이윤추구적 지배에 맞서 일체 공업시설들을 하나의 공장처럼 중앙집권적으로 운영하려 하는데, 이는 비록 이윤추구 시스템은 아닙니다. 하지만 근대적 생산/소비 순환, 합리주의, 공리주의, 관료적 규범주의 등의 코드를 지배계급과 공유합니다. 사회의 운영 방식을 바꾸자는 것이지 사회의 체질을 바꾸자는 게 아니거든요.

    그게 지금 이 체제로서 전혀 위험시되지는 않지만 예컨대 이슬람주의자들이야말로 위험시되는 것이지요. 현세의 ‘합리적’ 향락을 다 포기하고 신의 손에 목숨을 맡겨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그 행동의 논리 자체는 이 사회와 너무나 동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이 공산주의자들은 좀 불쌍한 사람들에요. 영국 빅토리안 시대의 얼치기 합리주의를 붙잡느니 차라리 도덕경이나 일독하게. 그러나 그 자들의 서구중심주의가 심해 진짜 책을 안읽는단 말에요"

    공산주의자들이 어차피 근대의 ‘합리적인’ 기계 문명, 생산, 소비하기 위해 규범적으로 사는 개인의 상을 공유하는데다 이미 체제에 다 편입돼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에를링의 진단이었는데, 저는 그 분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주의의 기원이야 19세기 빅토리안 시대의 나이브한 ‘진보사관’이었지만 1950-70년대의 실존주의 전성기, 반문화 운동, 환경 의식 고조 등을 경험한 오늘날의 사회주의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꼭 ‘사회의 체질 변화’와 무관하지는 않지요. 사회주의자들이 예컨대 미래 사회의 상을 설정할 때에 ‘성장’이 아닌 ‘환경적 균형 유지’와 ‘지구적 빈곤 척결’ 등을 내세우는 것이지요.

    즉, 19세기적 ‘영원한 성장’의 신화를 이미 파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급진사회주의 정당의 적색당 (구 모택동주의적 공산당과 일각의 군소 공산주의적 조직체의 연합체) 강령을 보면 미래의 상을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경제"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민주주의적으로 계획되고 통제되는, ‘다수의’ 요구에 따르는 경제" (demokratisk planlagt og kontrollert behovsstyrt økonomi).

    좋은 말씀인지라 저도 그 밑에 제 동의를 서명하고 싶지만 문제 하나만 남습니다. 그 민주적 통제권을 손에 쥘 다수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과연 환경적 상황에 맞추어서 제대로 자제라도 할 수 있을까요? 지금 로포텐이라는 아름다운 섬 근방에 유전개발을 해서 그 환경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개발’ 노선으로 갈 것이냐 라고 북부 노르웨이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다수 (52%)가 ‘유전 개발’을 지지하지요.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바로 그 다수가 자제되지 않는 소비 욕구에 따라서 또 무슨 ‘개발주의적’ 망동을 또 지지할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즉, "민주주의적으로 계획되고 통제되는, ‘다수의’ 요구에 따르는 경제"도 좋고 다 좋지만 개인, 또는 다수가 ‘개발’, 소비를 위한 소비,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 ‘편안한 삶’,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에 대한 망상을 어떻게 해서 버릴 것인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 <도덕경>이 요청되는 것이지요.

    <도덕경>에서 성인의 행동방식을 가리켜 "生而不有,為而不恃,功成而弗居。夫唯弗居,是以不去"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뭔가를 낳으면서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일하면서도 그 일에 마음으로 기대려 하지 않고 일을 이루면서도 거기에 마음으로 머물면서 그 공로를 내세우려 하지 않기에 잃을 것도 없다".

    자아 확립 욕구가 없고 소유욕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공산사회의 이상형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평생도 모자라지만 어디에서도 머무르지 않는, 소유하려 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의 심성적 시작입니다.

    "虛其心,實其腹,弱其志,強其骨", 즉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 (피할 수 없는 기본적인 욕구 – 식욕, 성욕 등)를 채우고, (남보다 자신을 우위에 두려는) 그 뜻을 약화시키고, 그 골격 (능력 등을) 강화시키는 것은 소유와 성장의 미망을 버린 사회의 생활양식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경쟁이 없기에 잘못들도 저질러지지 않습니다 (夫唯不爭,故無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그 기운을 기르는 이들은 결국 일종의 ‘성숙된 아이’와 같은, 나약 (즉, 남에게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는) 하면서도 진실로 강한 상태에 이릅니다 (專氣致柔,能如嬰兒乎). 스스로 높으면서도 남을 ‘다스리려’ 하지 않는, 권위주의란 전혀 없는 사람 (長而不宰)이야말로 노자의 주인공입니다. 사람들이 <도덕경>을 보면서 이 영원한 책의 현재성을 왜 보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하여간 국내의 각종 ‘골방 혁명가’들을 보느라면 <도덕경>이 제시하는 인간상과 가장 상반되는 타이프들을 충분히 구경할 수 있습니다. ‘長而不宰’가 아니고 반대로 ‘不長而宰’, 스스로 높지도 않으면서도 ‘다스리려’ 드는, 이런 모습을 도처에서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고, ‘영구적 혁명’ 주문을 한 번 외웠다고 해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되는 과정이지요. <도덕경>적 의미의 정상적 인간, 뭘 가지려 하지도 않고 내세우려 하지도 않는 인간이야말로 공산주의자의 원형일 것입니다. 그러한 견지로 본다면 우리야 다들 멀어도 아주 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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