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싸울 것"
        2009년 06월 24일 11: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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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볕이 너무 뜨겁습니다. 굴뚝 위로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과 살을 태워버릴 것 같은 폭염이 굴뚝을 이글이글 타오르게 합니다. 굴뚝에 올라온 지 43일이 지났지만 굴뚝이 흔들릴 때마다 멀미가 나고, 뜨거운 공기에 숨을 가누기가 벅찹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이 곳 굴뚝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참혹한 광경입니다.

    어제(23일) 아침이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사제 방패로 무장하고 공장에 나타난 400여명의 용역경비들이 우리 조합원들과 가족들의 출입을 막고 폭력을 일삼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며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 공장을 둘러싼 용역경비들 (사진=금속노조 쌍용차지회)

    회사의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관리자들과 마지못해 끌려나온 해고되지 않은 조합원들 2천여명이 버스 주차장에 모여, 천막과 컨테이너를 치고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하는 모습은 차마 눈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습니다.

    40여대가 넘는 경찰버스가 들어오고, 1,800여명의 전투경찰이 나타나자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되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전쟁이 곧 시작되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다

    용역경비들은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돌아온 우리 조합원들과 가족들을 공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연약한 우리 가족들이 절규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거친 몸싸움 끝에 공장 안에 있던 선봉대 동지들이 밖으로 나가 용역경비들을 몰아내고서야 간신히 조합원과 가족들이 공장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70m 굴뚝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너무 다급해서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는 동지들에게 긴급한 상황을 문자로 알리는 일, 잘 보이지도 않는 쬐끄마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처참한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굴뚝

    지난 세월이 떠오릅니다. 1999년 군대를 제대하고 평택에 올라와 구한 첫 직장은 자동차 정비소였습니다. 군대 가기 전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던 경험을 살려 2000년 쌍용차에 1년 정도 일을 하다, 여러 직장을 떠돌았고, 2003년 다시 쌍용자동차에 들어왔습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하는 일은 자동차의 차체를 용접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쏘, 코란도, 로디우스, 렉스턴이 제 손을 거쳐 용접되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우디 국왕이 탔다는 무쏘를 시작으로 렉스턴까지 밤낮으로 일했지만,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비정규직의 월급으로는 제가 만든 차를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았습니다.

    기술이 뛰어난 쌍용차가 중국 상하이자동차로 넘어가고, 2006년 상하이자본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파업을 했을 때 비정규직인 저와 동료들은 공장 밖에서 무심히 TV를 통해 이 소식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투쟁이 끝나고 600여명의 비정규직이 공장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던 형님들, 한솥밥을 먹던 동료, 후배들이 하루아침에 ‘끽’ 소리 한 번 하지 못하고 해고됐습니다. 그것도 노사 합의로 말입니다. 그 때 저는 살아남았지만 동료들을 지키지 못하고, 싸우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비정규직을 짜르고 찾아온 평화는 2년을 넘지 못하고

    그렇게 찾아온 공장의 평화는 채 2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공장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2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고,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고, 금속노조에 가입해 ‘쌍용자동차비정규직지회’를 만들었습니다.

    지난 해 10월 쌍용차 정규직 집행부는 또 다시 정규직 전환배치로 우리 비정규직 350여명의 동료들을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공장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우리는 강력히 항의하고 싸웠지만 동료들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집행부가 바뀌고, 비정규직의 목을 향해 내리치던 칼날은 이제 정규직을 향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이 곳 70m 높이의 굴뚝에 정규직 동지들과 함께 있고, 아래에는 비정규직 동지들이 정규직과 함께 공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회사에 끌려나온 정규직 동지들께

    오늘도 새벽부터 해고통지서를 받지 않은 2천여명의 관리직과 조합원들이 공장에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공장 전체를 봉쇄하고, 심지어 경찰까지 협박하며 진입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저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하고 따라하는 정규직 동지들이 망원경으로 보입니다.

    소처럼 끌려나온 정규직 동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쌍용차를 고물 팔아치우듯 팔아먹은 건 정부와 사용자였습니다. 상하이자본에게 유린당하고, 기술을 도적질당한 것도 정부와 사용자였습니다.

       
      ▲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사진=금속노조 쌍용차지회)

    쌍용차를 망가뜨리고, 수 천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한 저들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있는데 왜 또 다시 우리 노동자들이 해고되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아내와, 일곱 살짜리 우리 딸과 세 살박이 아들 녀석에게 아빠가 왜 공장에서 쫓겨나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회사에 끌려나온 동지들, 쌍용차의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분노는 정부와 사용자들에게 향해야 합니다. 정규직 동지들이 자기가 살기 위해 비정규직을 짤라냈던 지난 시절의 잘못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우리가 같이 싸워야 합니다.

    지난 2006년 동료들이 공장에서 쫓겨날 때 저는 그저 묵묵히 지켜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침묵과 굴종으로 선택한 노예의 삶은 2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저들이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게 쌍용자동차의, 아니, 한국 노동자의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주말 야간 문화제가 열렸습니다. 엄마 아빠와 같이 하는 어린 아이들의 팔뚝질이 어른을 닮아가게 만드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드물겠지요. 쌍용자동차 자본의 ‘노-노 갈등’ 전술로 인해 희생자를 둘이나 만들어 내고도 또 저들은 그저 ‘구조조정’이라는 말을 녹음기처럼 틀어대고 있습니다.

    시내에 있는 어느 스님이 쌀 500kg과 생수 50상자를 가져와서 “살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의 요구는 법보다 정당하다”고 하셨습니다. 농민회에서 온 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존재는 세상이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는 노동자이고, 사람이 먹을 것을 생산하는 농민”이라고 하셨습니다.

    쌍용자동차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무직까지 우리 노동자 모두가 주인입니다. 해고통지서 따위로 우릴 갈라놓을 수는 없습니다. 구사대가 아닌 동지로,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동지들과 함께 싸워 승리하고 싶습니다.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싸워서, 아빠를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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