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 꿈은 '잘 사는 북한형 사회'?
        2009년 06월 22일 09: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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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에 집중하고 곧 나올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라는 저서의 최종 편집에 매달리느라 며칠간 한국 신문들을 거의 안봤는데, 오늘 한겨레 인터넷판을 읽고서 아주 쇼크를 크게 받았습니다. PD수첩 한 작가의 개인적 전자 우편들을 공안기관이 다 읽고, 보수신문들이 그 개인적 서신들의 내용을 (물론 본인의 허락도 없이) 만인들이 다 보게 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보고서 솔직하게 말하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야만으로 다시 돌아왔다!"밖에 없습니다. 이제 올대로 다 왔습니다. 디지털 야만의 시대로.

       
      

    인간 문화의 근본 중의 하나는 ‘개인 영역’과 ‘공공 영역’의 분리입니다. 물론 이 분리는 전통사회에서는 완전할 수는 없었고 지금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전통사회에서 개인적 불효는 사회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적 제재 대상이었고 근대사회에서 10년 전의 ‘클린턴 게이트’에서 봤듯이 부적절한 대상과 부적절한 곳에서 개인적인 성관계를 맺었다가 공공영역에서 ‘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공공영역에서 허용되어지지 않는 많은 행동들이 개인영역에서 허용되는 것이고, 그게 바로 우리가 체감하는 ‘자유’의 상당한 부분을 이룹니다. 무더운 날인데 ‘바깥’에서 벗을 수 없는 윗통을 안방에서 벗어 하늘이 낸 몸대로 앉아 쉴 수 있듯이, 사석에서 공석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들을 꽤 할 수 있습니다.

    웃통 벗고, 맘껏 말하고

    말을 다소 거칠고 ‘맛갈스럽게’ 할 수도 있고, 공공영역에서 성역으로 돼 있는 대상 (종교단체 등)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내뱉을 수도 있고, 사회가 보통 불허하는 각종 욕망들 (‘불륜’에의 욕망들)을 솔직하게 논할 수도 있는 등 ‘자아 구현’을 보다 자유롭게, 보다 완전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적 영역이라고 해서 자기 통제를 전혀 안하면 안되지만, 훨씬 덜 하는 것이고, 만약 그러한 ‘덜 통제되는 영역’이 없었다면 우리가 답답해서 어떻게 살았을까 싶네요.

    그러기에 개인 사신을 ‘기관’에서 은말히라도 본다면, 마치 나의 안방에서의 ‘나체 휴식’을 이웃이 재미 삼아 엿본 것 같아 미칠 정도로 화나지요. 우리의 ‘덜 답답한 삶살이’를 가능케 만든 공,사 영역 분별의 벽이 무너지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요.

    1834년, 경찰이 푸시킨이라는 위대한 시인이 부인에게의 서찰에서 황제가 은사한 kamer-junker (황실 시종)의 직위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언급하자 푸시킨의 모든 서한을 다 일일이 들추었던 경찰이 황제에게 고발을 하고 큰 스캔들이 일어난 일은 있었습니다.

    스캔들이 좀 정리되자 푸시킨이 ‘우리 정부의 습관화된 부도덕’에 대해 일기장에서 쓰고 아주 쓰라린 경험이라고 고백했지요. 경찰과 황제가 부부간의 서찰까지 다 들춰보니 이게 인간이 살만한 나라냐 이것이었습니다. 글쎄, 요즘 같으면 일기장을 컴퓨터로 쓸 경우 ‘기관’은 서찰뿐만 아니고 일기장까지 다 볼 것이고, "부도덕"이라고 외칠 여유도 없을 것입니다.

    ‘도덕’ 관념이 아직도 있는 사회에서 ‘부도덕’을 이야기할 의미가 있지만 모든 게 감시되는 빅 브라더의 왕국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잠잘 때도 내면적으로 검열해 ‘쓸 때 없는 말’을 잠꼬대 속에서도 안넣는 게 ‘도덕’ (?)입니다. ‘도덕’이라기보다는 생존방식이지만 빅 브라더의 나라에서는 ‘생존’ 이외의 목표란 있을 수도 없어요.

    ‘우리 정부의 습관화된 부도덕’

    우리는 다 투명인간들입니다. 매일 매시 휴대폰과 전자우편, 인터넷, 신용카드를 쓰고 도심 감시 카메라에 잡히기 때문에 ‘기관’으로서 ‘박노자의 일과’를 알 필요가 있다면 시간, 분 단위로 쉽게 작성할 수 있지요. 그리고는 우리가 다 –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 ‘관’의 영향권에 있습니다.

    대학에 있는 학자는 주로 국가에서 주는 연구비에 따라 춤추고 있지만 시민단체에서도 기업 후원 등을 무시할 수 없고 기업이란 ‘관’이 싫은 일을 절대 못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관’에서 저희 투명인간들에 대한 감시의 정도를 크게 높임과 동시에 "사적인 영역에서라도 불온한 언행을 하는 이에게 큰 불이익을 주겠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우리 사회는 상당 부분 싱가포르나 어쩌면 아예 북한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생존’ 문제가 걸린 투명인간들은 사무실에서는 물론 술집에서까지 ‘불온한 이야기’를 자제하기 시작할 것이고, 사회 전체에서 상호 의심과 공포의 분위기가 퍼질 것입니다. 뭐, 주요 재벌들의 임원들이 그 재벌의 소유자 일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공, 사를 불구하고 얼마나 조심조심하는지 보시면, 앞으로 이와 같은 정권의 행각이 계속 가속화될 경우 대한민국이 뭐가 될는지도 알만 합니다.

    각종의 ‘위대하신’ 보스들에 대해서 말을 아주, 아주 조심해야 하는, 일종의 ‘잘 사는 북한형 사회". 감시주의, 경찰주의 위주의 ‘재벌들의 준독재’라고나 할까요?

    현실 속의 북한과 아무 필요도 없는 공연한 싸움을 붙이는 이들의 대사회적 정책이 바로 북한식이라는 게 재미있는 아이러니인데, 그게 한반도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일란성 쌍둥이, 두 개의 병영국가가 서로 싸우면서, 서로를 정당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적대적 공존의 현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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