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공선 그리고 공산당
    2009년 06월 19일 10: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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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

31세, 지방대 중퇴, 비정규직. 지금까지 살아온 이력이다. 서른을 넘겼으니 꽤나 길게 살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과거를 되돌아보면 “도대체 살아서 무엇을 했는가”라고 한탄한 만큼 삶의 궤적이 단조로워서 민들민들하니 미끌어질것만 같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도 사계절이 있고 길가의 풀 한 포기마저도 비록 짧은 생이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역정을 거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글을 끄적이는 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의미가 무색할 만큼 그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것 같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게 과연 스무살이 올까, 그때가 오면 집과 학교만을 오가는 이 비참한 인생에서 벗어나 삶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남은 건 안개에 싸여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를 혼자서 지친 모습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걸어가는 어느 한심한 인간의 모습이다.

말 그대로 잉여인간(剩餘人間)이고 일본어로는 다메닝겐(ダメ人間), 즉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물론 일도 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꾸는 꿈이라는 것도 머릿속에 그려본다.

하지만 그것은 비온 뒤 부들부들 뭉쳐진 흙덩이처럼 손에 쥐는 순간 금방 부서져버리고 도리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피가 굳어가듯 확신만 굳어진다. 현실은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죽는 날까지 이런 삶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어쩌면 내가 태어나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죽어서 화석이 되어 몇 백만, 몇 천만 년이 흐른 후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기 위함일까라는, 문득 그런 쓸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1929년 일본, 고바야시 다키지와 『게공선』

그러던 어느 날 『게공선(蟹工船)』을 만났다. 일본에서는 이미 지난해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고 한다. 올해 초 누적 판매부수는 160만 부이고 영화로 제작되어 오는 7월 4일 개봉한다고 한다. 이 책의 작가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는 일본공산당 초창기 멤버이며 1929년 게공선을 집필하고 1933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으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여느 소설과는 달리 개인이 아닌 하나의 노동자 집단이다. 그래서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어업노동자, 잡일꾼, 보일러공, 선원, 학생 등 그들이 가진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그들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농촌이나 다른 노동판을 전전하다 게공선에 오른 노동자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하나같이 어리고 순박하다. 누구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누구는 더 나은 벌이를 찾아서, 누구는 좋은 직장이라는 꼬임에 빠져 그렇게 훗카이도의 하코다테 항으로 밀려 들어왔다.

“어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친다. 이처럼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단순한 배도 아니고 더 나은 삶이나 돈벌이도 아닌 문자 그대로 지옥이다.

   
  ▲ 게공선의 한국어판 표지(왼쪽)와 일본어판 표지(오른쪽). 일본어판 표지 가운데에 있는 ‘망치와 낫’은 공산당 적기를 연상하게 한다. 누적 판매부수 160만 부 돌파와 함께 올 여름 영화를 개봉한다는 광고가 실려 있다. 참고로 개봉일은 오는 7월 4일이다. 지난 2월쯤 나온 광고이니 현재는 몇 만 부가 팔렸을지 궁금하다.

‘게공선은 선박이 아닌 공장선이기에 항해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순수한 공장선인데도 불구하고 공장법의 적용도 받지 않는다.’ 완전한 무법지대인 이곳에서 노동자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가혹하리만치 극심한 노동에 시달린다. 훗카이도의 북쪽 사할린과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 인근의 바다에서 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바람, 집채만한 파도가 게공선을 덮쳐오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담벼락 위에서 눈물겨운 사투를 벌인다.

파도가 심하고 폭풍이 몰아친다고 해서 항구에 정박하는 일도 없다. 게가 많이 잡히는 날에는 차디차게 쏟아지는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도 그물을 걷어 올리고 게를 가공해 통조림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다만 몇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보급선만이 육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감기나 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노동자는 감독관이 매를 때리거나 주먹질을 하고 짐승을 부리듯 질질 끌고 가서 억지로 일을 시킨다. 일을 하다 쓰러진 어느 학생은 꾀병을 부린다며 감독관에 의해 차가운 쇠기둥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형벌을 당하기도 한다.

살인적인 노동과 가혹한 폭력, 이 모든 것을 감독관은 ‘조국의 발전과 번영을 위한’ 일이라고 강변한다. 처음에는 그런 허울 좋은 말에 넘어가 모든 것을 감내하며 묵묵히 일을 하던 순진한 노동자들은 자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감독관과 선장 등 회사 간부들의 부조리한 행동을 하나하나 목격하며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한다.

애당초 자본가인 회사 대표와 그들에게 고용된 충실한 개-감독관을 비롯한 간부들은 노동자들에게 오직 먹고 자고 싸는 일 외에는 죽도록 일을 시켜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을 뿐 처음부터 그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극심한 노동에 병을 얻은 노동자 한 명이 마침내 죽어나가고 죽은 동료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간주하는 감독관의 행태를 지켜본 노동자들은 고립된 배 안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평소 감독관의 이간질에 넘어가 서로를 적대시하던 선원, 어업노동자, 잡일꾼, 보일러공들이 결국 뭉치고 외부에서 들여온 전단지를 나눠읽으며 행동강령을 마련한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들은 파업이라는 집단행동을 결행하고 대표자들을 보내 감독관에게 협상을 요구한다.

이튿날 하쓰코호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일본 군대의 구축함을 보며 노동자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틀림없이 이 나라와 군대는 노동자들의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검을 하고 모자의 턱끈을 조인 채 우르르 몰려와 총을 겨누고 대표자를 끌어내는 일본 군대의 모습을 본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에겐 우리 말고는 같은 편이 없다.” 국가와 군대, 그리고 자본가는 모두 서로의 필요에 의해 단단하게 결속된 존재였다. 그리고 노동자는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탄압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즉 노동자는 생산과 이윤 창출을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군대의 무력진압으로 파업은 실패했지만 그들은 다시 용기를 내기로 한다. “그리고 그들은 들고 일어났다. 다시 한 번 더!”

이렇게 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말미에 다키지는 이렇게 말한다 “이 한 편의 글은 식민지에 있어서 자본주의 침입사의 한 페이지다.”

2009년, 끝나지 않은 게공선

재일조선인 학자 서경식은 한겨레 신문 지면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바야시 다키지 따위를 읽는 것은 연구자나 기인들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일본은 ‘빈곤’이 다시금 절실한 실감 속에 거론되는 사회가 됐다. 젊은이들이 『게잡이 배』를 읽는 것은 거기에 묘사된 비인간적인 착취의 세계에 자신들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서,

“물론 이런 움직임을 과대평가해선 안 될 것이다. 경험도 조직도 없는 고립된 비정규직인 그들은 점점 출구 없는 게잡이 배 밑바닥으로 내몰리고 있다. 고바야시 다키지가 죽었을 때 루쉰이 발한 부르짖음은 지금도 살아 있다. 자산계급은 무산계급을 속이고 경계선을 긋는다. 무산계급은 벌써 몇 번이나 속아왔다. 이제 더 속아선 안 된다.”

사실 이런 현상이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진다. 일본 젊은이들의 자의식은 제로(零)에 가깝다고 여겨왔기 때문에 80년이나 된 프롤레타리아 고전 문학이 미친 듯이 팔려 나가고 이제는 게공선에 관한 서평이 따로 책으로 엮여져 나오는 현상이 빚어진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은 어떨까.

지난 촛불 시위를 보더라도 그렇고 아직은 대학에서 학생운동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을 지켜보자면 적어도 일본보다는 한국사회가 훨씬 젊고 역동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지만 일본과는 달리 한국의 젊은이들은 게공선을 읽지 않는다. 동시에 자신들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하는 계급성이라든가 자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상당히 없어 보인다.

한국어판 게공선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양극화, 워킹푸어(Working Poor)…혹시 이 현상이 게공선 아닌가요?” 이런 문구가 일본과는 달리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선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역동성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을 대표할 만한 정치집단이나 고바야시처럼 젊고 열정적인 프로문학작가가 없어서일까.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더 비중을 두고 싶다.

그 밖의 다른 원인들도 있겠지만 게공선의 판매부수가 증가하면서 일본공산당 당원이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중이라고 한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미친 듯이 공산당에 입당하고 고령화된 정당으로 여겨져 왔던 일본공산당의 평균 연령이 내려가는 현상에 당 지도부는 입이 찢어졌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 시점에서 우리에게도 이런 거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당 재건, 한국에서도 가능하기를…

깡총거리는 토끼처럼, 아니면 징검다리 몇 개쯤 빼먹고 나가는 것처럼 왠지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부족한 것들은 이후에 순차적으로 추가하여 보완하기로 하겠다.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몇 날을 고민하고 오늘 아침부터 하루 종일 글을 써도 이 정도에서 그친다는 것이 “역시 나는 안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일단 부족하지만 이 글을 1편으로 하고 한 1~2주 정도 지나 이 글의 논지와 관련하여 “왜 공산당이어야 하는가”에 포인트를 맞춰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860만 비정규직을 위한, 20만 은둔형 외톨이를 위한, 100만에 이르는 청년실업자를 대표할 만한 정당이 무엇인가. 뭔가 거창하게 대표하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는 뭔가 새로운 정치조직이 필요할 것 같다.

또한 이것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기 때문에,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 것처럼 미치도록 절실해서 누군가라도 붙잡고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은 심정 때문이다.

사실 게공선을 읽고 나자 뭔가가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아서 그 후로 『공산당 선언』을 읽고 이어서 『경성트로이카』를 읽었다. 지금은 김수행 교수의 책 『자본론의 현대적 해석』을 사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들여다본다. 정운영의 『자본주의 경제 산책』과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이라는 책도 사놓고 읽어보려고 한다.

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어찌됐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해방 이후 좌익 숙청으로 사라진 조선공산당을 ‘한국공산당’이라는 이름으로 재건하자는 얘기다. 이유는 단순하다. “살고 싶으니까, 살아도 기왕이면 좀 인간답게 살고 싶으니까” 우리 사회의 소외된 계급들이 모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확성기 역할을 해주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비스로 영화 <게공선>의 예고편을 올린다. 예고편 화면에 나온 일본어 자막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재연 베스트셀러
원작 160만부 돌파
드디어 영화화
지배하는 자
지배당하는 자
고향에 소중한 사람을 남겨두고
가난하지만 따뜻함이 있는 가족들을 위해
나는 ‘절망’이라는 이름의 배를 탔다.
죽는 것 말고는 자유로울 수 없는 건가?
역시 살고 싶다
80년 전 고전문학이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혼란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바친다
이 영혼의 울부짖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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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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