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죽음에 눈먼 눈뜬 장님들의 데마고기
        2009년 06월 18일 02: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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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 위기

    노무현 서거 후, 요즘 여기저기서 ‘민주주의 위기’라는 말이 마치 유행처럼 회자되고 있다. 양심 좀 있다는 지식인들이 잇달아 ‘시국성명’을 발표하며 ‘장군’ 부르니, 먹물깨나 먹었다는 수구세력들 또한 질세라 앞다퉈 ‘반대성명’을 내며 ‘멍군’이라고 맞받아친다. 보다 못한 영원한 ‘선상님’ 김대중이 사자후 한 마디 내지르니, 이번엔 상대적 ‘듣보잡’들이 또 여기저기서 고양이 발톱 세워 가르릉댄다. ‘생산’은 과잉되고 ‘소비’는 필터 망가진 정수기처럼 감정의 강으로만 곧장 낙하 되었다 되돌아 와선 넘실댄다.

    이렇게 비극은 현실에서 갈팡질팡 세습되고, 역사는 지겹게 반복되는 슬픈 시지프스가 되어 바윗돌이나 굴리고 있다. 본질도, 새로울 것도 하나 없는 이런 정치적 데마고기(Demagogy;선동적 허위선전)식의 몇 가지 사안만을 놓고 벌어지는 ‘장군’, ‘멍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사실은 오히려 우리의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있다는 비극적 사실까지를 눈치채고 있는 ‘참지식인’, ‘참언론’을 만나보기란 요즘 현실에선 좀처럼 쉽지가 않은 것 같다.

    ’87체제’가 갖는 가장 큰 민주사적 의미는 ‘직선제’ 쟁취를 통한 ‘형식적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첫걸음이 되었다는 데에 있다. 동시에 이전의 ‘군사파시즘세력’의 헤게모니가 ‘자유주의세력’으로 넘어갔다는 정치사적 의미도 결코 간과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 한계는 ‘자유주의 세력’이라는 신흥귀족(정치적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 되어온 22년의 한국사회가 결과적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 즉 ‘민중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고착화’되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바로 가장 큰 민주주의의 위기고 우리시대 비극의 근인(根因)이다.

    그러게 말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일상을 습격해 모든 파탄을 다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오로지 그 지긋지긋한 ‘진영논리’ 하나에만 매몰되어 ‘본질’ 같은 건 전혀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 눈뜬 장님들의 사회다.

    만약 이대로 계속해서 진행된다면, 잘해야 ’97체제’로의 복귀, 즉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재림’이고 재수없으면 ’87년’으로의 회귀, 즉 ‘자유주의 군사세력의 재탄생’으로 귀결될 것이 너무나 뻔한데도 한번 타오른 광기는 데마고기의 특급전사들로 거듭나 각자의 체제 굳히기에 날새는 줄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미약한 역사의 ‘경고등’마저도 묵시의 침묵과 함께 더욱 짙은 어둠속으로 잠기고 나면, 승리한 이 시대의 배덕자들이 지르는 진군나팔소리만, 온.전.히 살아있는 ‘민주주의 위기’는 그대로 고스란히 꽁무니에 매단 채, 21세기 시대찬가를 다시 한 번 소리높여 부르리라. "아아, 자유주의는 영원하리라~ 신자유주의 만세!"… 젠장할!

    자유주의(liberalism) 세력

    ‘자유주의’는 ‘공동체’ 보다는 ‘개인’의 여러가지 자유에 보다 존엄성을 갖는 사상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전제 하에 각자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사조는 최근 4세기 동안의 세계 문명사회를 지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조류는 주로 ‘언론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보다 깊이 연구되어 왔으며, 가장 최근엔 인간의 합리성이 갖는 한계에 대한 회의론, 즉 (한국의 예를 들자면) 조.중.동과 같은 ‘거대독점자본언론’이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지배권력과 깊이 밀착하여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왜곡’과 ‘선정성’의 문제..같은 것들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점으로 대두되면서 그 대안적 사조로서 사회책임이론(social responsibility theory)이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이 글에서 자유주의 사상이 가진 모순점들이 한국정치에 그대로 접목되어 자본(신자유주의)과 암수동체를 이루어서는 결국엔 실질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에 주범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과없이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그러니 글의 논지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면 ‘진영논리’ 같은 건 잠시 꺼두는 미덕을 발휘하시길.^^

    먼저 나는 다분히 ‘태생적 원죄’에만 치우친 시각에서 ‘범한나라당파’의 현 세력들을 ‘범민주당파’의 세력들과 도식적으로 이분해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탈피하여, 정치가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실질적 영향의 주요 도구가 결국 ‘정책’이라 한다면, 큰 틀에서 그러한 정책들이 갖는 ‘유사성’ 차원에서 바라볼 때, 87년 이후의 ‘범한나라당파’ 역시 분명 이 ‘자유주의 사상’을 근간으로 한 정치세력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해서 나는 이 두 세력을 동일한 ‘자유주의 세력’으로 묶어서 바라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87년 직선제 쟁취 이후의 한국 민주주가 노태우라는 과도기적 체제를 거치며 김영삼 정부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군사정부를 대표하던 다수의 민정당계 주류가 사실상 자유주의 세력에 녹아들어 융합된 결과 곧바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의 도입’이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군사정부들이 갖는 ‘국가주도형 폐쇄적 경제체제’가 자유주의자들의 ‘시장방임형 개방적 경제체제’로 완전히 넘어갔음이 이를 방증할 뿐 아니라 현 이명박 정부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의 연속성에 있음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한미FTA’와 같은 ‘시장주의 개방체제’는 자유주의자들에 있어 갈등의 소지가 거의 없는 일치된 지향점이라는 점 역시 이러한 주장에 보다 타당성을 부여해준다.

    위기의 본질

    진영논리를 배제하고 바라볼때 또 하나 발견되는 주목해 볼 관점은, ‘민주주의 위기’라는 것이 사실상 ‘언제, 무엇으로 부터 기인된 것이냐’에 대해 깊이 통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깨야만 하는 논리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상호관계다.

    왜냐하면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문제를 논하다 보니 ‘실질적 민주주의’가 부재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불가피하게 구분해 적용한 이 두 개념이 마치 ‘형식적 민주주의→실질적 민주주의’라는 마치 민주주의 발전단계인 것처럼 대중에게 잘못 전달되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담고 있는 본래 이념은 출발점부터 이미 이러한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이제 환기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우리의 ‘민주주의 위기’는 사실상 ’87체제’로 부터 ‘민중(인민)민주주의’와 괴리된 상태로 출발한 불완전성에서 이미 그 위기를 온전히 떠안고 진행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시각일 것이며, 단지 그것을 자각해 낸 시점이 공교롭게도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정점에 다다른 ‘노무현 시대’였다…고 정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 위기’에 ‘본질’이 현재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만의 특이한 현상으로도 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동안의 한국정치가 얼마나 자유주의 세력들의 과잉에 의해 인민의 실질적 민주주의가 박탈된 절름발이 상태였는가..와 함께 오로지 ‘자본의 수호’라는 한가지 방향으로만 내달려 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오늘날 ‘금융위기’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한 요소는 될지언정, 이것이 곧 ‘민주주의의 위기’로 곧바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 주로 회자되고 있는 ‘민주주의 위기론’은 지난 군사정부와 비교해 일부 파시즘적 요소가 일치한다는 면에서 긍정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과거 군사정부와 완전히 동일시 할만큼의 전면적 위기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 뿐더러 더구나 그것이 곧 우리의 ‘민주주의 위기에 본질’이라고 하기엔 어설픈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이명박 정부를 몰아낸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의 민주주의 위기가 전부 상쇄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용인’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지금 이명박 정부의 행태는 분명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임에는 분명 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의 ‘민주주의의 위기’와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든지 ‘정권타도’로서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적시해 내고자 함이다.

    그러니 너무 과장해서 지금의 사태를 바라보지는 말자. 누구말대로 노무현 씹는 것이 ‘국민스포츠’이던 시대에서, 이제 이명박 씹는 것이 ‘국민스포츠’로 대체된 것일뿐, 사실상 본질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좀더 깊이 통찰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작 더 큰 문제는 글 모두(冒頭)에서 언급한대로 진영논리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언론과 일부 정치 선동가들에 의해 기존 ‘체제 굳히기’의 목적으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이 ‘데마고기’가 대중들 사이에서 자꾸 확대, 재생산되고 증폭되기만 하고, 정작 – 한국사회가 출발점부터 안고 있던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본질들을 제대로 극복해 내어서 궁극적으로는 완성된 민주주의로 이행시켜야 한다는 – 시대적 과제 같은건 오히려 완전히 망각된채로 현체제 그대로 ‘고착화’되어 버리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 재생될 수 있다는 점을 오히려 더 우려해야될 상황이 아닐까 한다.

    신자유주의의 쌩얼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사상적 토대가 ‘개인의 자유와 자율’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이는 곧 정책적인 면에서 ‘시장의 자유’ 또한 완전히 자율적 흐름에 맡겨야 한다는 ‘시장방임주의’, ‘시장만능주의’에 폐해로 직결되었다.

    즉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와 자신들의 가치가 정확히 일치하다 보니 ‘자본’이 가진 ‘비인간성’은 간단히 무시되고, 국가의 기능이 오로지 자본에 봉사하고 수호하는 체제로 급속히 변태(變態)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곧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작은정부론’이다.

    그렇다. 설령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 인정해놓고 바라볼 때에도 자본과 시장은 그 자체로 공격성만 지니고 있을 뿐이지, 결코 이성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간단한 사실조차 ‘신자유주의’에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러니 진행은 당연히 ‘머니게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과는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의 격차를 급속히 벌려놓는 양극화의 극단을 향해 치달려 가는 포악한 흉기로 작동되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이 가지는 모든 ‘땀과 노력’의 가치 같은 건 기업의 효율성 앞에선 아예 아무런 의미조차 가질 수 없는 재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이는 결국 기업이 ‘효율성’을 위해 수시로 휘두르는 ‘구조조정’과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비정규직 확대’라는 참담한 결과로 귀결되어지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재화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과정에는 인간의 땀과 눈물이 직접적으로 작용함으로 인간의 얼굴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자본의 철학에는 이러한 가치가 오직 ‘상대적 가치’, 즉 ‘비교우위’로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즉 예를 들자면, 농부가 생산하는 농산물에는 농부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그러나 자본의 눈으로 볼 때는 한 농부가 그 농산물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땀과 눈물을 흘렸느냐는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니고, 오로지 동일한 상품들에서 상대적으로 얼마만큼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정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효율’과 ‘경쟁’ 그리고 그 ‘결과’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는 신자본주의의 쌩얼이고 추구하는 가치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다른 산업군과의 비교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한국의) ‘농업’같은 것은 다른 산업의 효율적 성장을 좀먹고 기생하고 있는 잉여산업으로 평가절하 되어 졸지에 도태 되어야할 공공의 적으로 둔갑해 버린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무형의 자본에 결집체인 ‘금융업’ 같은 경우는 최고의 가치로 추구되어 ‘절대가치’로서 막강하게 군림한다. 지난 노무현 정부의 야심찬 계획중 하나인 ‘금융허브론(financial hub)’은 바로 이와 같은 자유주의자로서의 이념이 정책으로서 구체화 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같은 좋은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정치까지 인간성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단 말이다.

    또 한 가지 신자유주의를 작동시키는 핵심 원리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있다. 그러다 보니 신자유주의는 상대적으로 ‘시장의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후발국가들에서 보다 수월하게 효율적으로 작동하며 최대치의 이익을 끌어올릴 수 있다.

    여기서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동’이라는 유동성의 원리에 있다. 즉 ‘투자’가 주로 유형의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산업들에 치중되는 것이 아니라 유동성 원리에 의해 언제든 효율성이 떨어지면 치고빠질 수 있는 무형의 재화를 중심으로 하는 분야에 보다 집중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노무현 정부가 주장했던 ‘일자리 창출효과’ 같은 것은 다분히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봐야한다.

    신자유주의는 ‘신종 피라미드 금융사기’

    자, 그러면 ‘신자유주의체제’ 하에서 효율성이란 측면에서 최고의 가치로 추구되는 금융업이 자유주의자들이 지향하는 ‘시장방임주의’ 시장에 만약 변칙 적용되면 얼마만큼의 불특정 다수가 극심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 이 헛점을 교묘하게 가장 잘 파고들어 세계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신종 ‘피라미드 금융사기’에 한번 대입시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비교해 보겠다.

    ‘피라미드 금융사기’는 여타 피라미드 사기에 주로 동원되는 어떤 특정된 유형의 상품같은 것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돈’ 자체가 그 상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이 ‘1백만원’을 내고 피라미드 금융회사에 가입하면 이 가입자가 낸 1백만 원 중 절반인 50만 원은 회사(발기인)가 갖고 나머지 50만 원은 이 사람을 소개한 소개자에게 돌아간다. 만약 단계마다 각각 두 명의 회원을 끌어들이는 가장 기초적 단계를 설정해 놓고 가정해보면, 단지 5단계까지만 내려가도 발기인은 가만히 앉아서 ‘1천5백만 원’이란 거금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각 단계마다 두 배씩 회원이 증가하므로 만약 15단계까지만 내려가 보면 무려 ‘3만2천7백2십8명’의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고, 피해금액의 절반인 ‘1백63억6천4백만 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이 고스란히 발기인 한사람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원리상 단계가 거듭 되는 건 거의 무한대에 가까움으로 1997년 알바니아의 사례처럼 한 국가를 무정부상태로까지 내몰 수 있는 것은 이 작동원리를 이해한다면 별로 놀라운 사실도 아니다.

    그렇다. 분명 이 사례에서 보듯이 자본의 투자도 있었고 시장의 자율에 의해 효율적으로 왕성한 생산활동도 이루어 졌지만 어느 단계에서 자본의 이동이 시작되는 순간, 즉 치고빠지는 순간 막대한 다수의 피해자만 남고 결국 투자를 유치한 국가나 국민은 ‘닭?던 개’ 꼴이 되기 쉽상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극단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여기에 대입하는 것은 분명 모순이 있겠지만 소위 ‘선진화’라는 미명하에 상대적으로 ‘우월적 지위와 우월적 자본’으로 무장한 국가에 대항해 신자유주의가 성공적으로 연착륙한 국가의 사례가 있기나 한가.

    다시말해 동등한 지위와 엇비숫한 경제력을 갖는 국가사이에서는’FTA’와 같은 것이 서로간에 활발한 인적, 물적 교류에 의한 상승작용효과를 일정부분 기대해 볼 수 있겠지만, – 그렇지 못한 국가들이 주로 블록을 형성해 이에 대항한 사례들을 제외하고, 게다가 협약의 조건마저 불평등하다면 – 상대적 열세에 놓여있던 국가들이 과연 성공한 사례가 있냐는 것이다.

    덧붙여 이제 코앞에 닥친 ‘한미FTA 비준처리’가 예상되는 6월 정기국회에서, 이제는 노무현을 계승하겠다 선언한 민주당에 대해 만약 한나라당이 "그러니 노무현 유지를 받들라"고 요구하고 나온다면 민주당이 과연 이 사안에 대해 거절할 명분이나 있는 것일까? ‘초록은 빨아도 그저 초록’일 뿐이다.

    "그러니 어쩌라구"

    위에서 살펴본대로 현재 우리사회가 처한 ‘민주주의 위기’란 것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의 과잉’에 기인한 비극임을 이제 더이상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유주의자들로 양분된 현체제에 대한 근본적 고민과 이에 대한 체제 전환의 노력없이는 어느덧 고질적으로 변해버린 우리의 민중없는 ‘민주주의 위기’는 결코 사라질 수가 없을 것이다.

    정말 지긋지긋하지도 않은가? 그래봐야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 없이 맨날 기대에 반해 거짓말들이나 일삼으며 합법적으로 착취만 해가는 지배세력들을 두고, 뭐가 그리 좋다고 지지하네 마네, 내편이 낫네 늬편이 그르네…하면서 시간, 돈 뺐기고 같은 민중끼리 아웅다웅 다퉈대는 이 상황이 정녕 서글프지도 않단 말인가?

    봉건시대도 아닌데 우리 민중의 미래를 스스로 갉아먹으며 한낱 지배계급들의 노예 꼬라지를 자임하는 이런 어리석은 행동들은 이젠 제발이지 더이상 반복하지 말자!

    그러면, 이쯤에선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의 "그러니 어쩌라구" 같은 당연한 의문이 대두될 것이다. 해서 나는 우선 두 가지 면에서 우리사회 민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다.

    첫째, 자유주의자들이 다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갈라놓은 이 지긋지긋한 진영논리를 우선적으로 파괴하고 이제는 좀 더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시선을 갖고 정치를 ‘정치 본연의 책무’, 즉 ‘다수 민중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두고 이에 일조 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참여정치, 본래 의미의 ‘민중직접 참여정치’로 우리 생각의 틀을 완전히 바꿔내자. 그 첫걸음은 연예인 팬글럽 수준을 넘지 못하는 현재 참여정치의 한계를 극복해 내는 것으로 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노동조합의 (보다 확장된) 조직화나 노동파업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궁극적으로 우리 민중 모두의 이익을 정치적으로 쟁취해 낼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전향적 시선을 가지는 일이다. 화이트 칼라니 블루칼라니, 자영업이니 정규직이니 비정규직이니 따지지 말고, 우리 모두 사실상 자본의 지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다 같은 ‘노동자’며 자본의 횡포는 우리 민중 어느 계층도 결코 사정을 봐주며 비껴가지 않는다는 냉철한 위기의식을 갖자.

    언제까지 "프랑스에선 지하철 노조가 파업하고 청소부들이 파업하면시민들 발이 묶이고 쓰레기더미가 쌓여 온갖 악취를 풍겨도, 노조에 묵묵히 지지를 보내며 참아내는 시민의식이 참 부럽다."는 타령들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 말이다. 또한 삼성같은 세계적 기업에 노조가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계적 부끄러움이자 우리 노동시장의 열악한 아킬레스건이란 경각심 또한 항상 가졌으면 좋겠다.

    이밖에 대안세력의 부재만을 답답해하지 말고, 이제 한국사회에서도 ‘좌파정치’가 실질적으로 정책으로서 구현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이 제대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고 싶지만, 이 조차 지금 시점에서는 또다른 ‘진영논리’로 해석될까봐 그저 아쉬움으로서만 남긴다.

    맺는다. 민주주의는 원래 다수 민중의 보다 나은 삶과 행복할 권리를 위해 설계된 이론이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이념적 자긍심을 토대로 정치자영업자들에게 임시로 맡겨놓은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 오는 것이 곧 ‘민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며 실질적 민주주의를 획득하는 지름길임을 자각하고 전의를 다질 때다.

    정치를 정치인들에 맞추지 말고 우리 민중의 공동의 이익에 정치가 봉사하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쟁취해 내는 것, 그 길만이 우리가 정녕 인간다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임을 다시 새기자.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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