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투! 대한민국 여성정치인, ‘공주님’ 빼고
    [영화잡론] 영화, 드라마 속의 여성정치 & 새로운 흐름 읽기
    By 문석
        2012년 05월 08일 10: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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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1 총선, 여성정치인 존재감 두드러지다

    4.11 총선은 그 결과를 차치한다면(물론 그렇게 하기란 심정적으로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여성 정치인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장이었다.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의 선거전 수장이 각각 박근혜, 한명숙, 이정희라는 여성이었고, 최고의 화제를 몰고 온 후보도 여성인 손수조였으며, 당세에 비해 유난히 목소리만 요란한 대변인 겸 비례대표 후보 여성도 있었다.

    한국 정치사를 돌이켜 봐도 여성이 이렇게 전면에 등장한 경우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 당선자도 비례대표를 포함해 역대 최다인 47명이라니 정치권에서도 여성의 위상은 대단히 높아진 셈이다.

    세계적인 차원으로 보더라도 여성이 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꾸준히 커지는 추세다. 이런 흐름 때문일까, 여성정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영화와 드라마도 늘어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란 세상의 변화에 극도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매체 아닌가.

    시대의 대세를 따르는 건당연한 일일 터. 그렇다면 영화와 드라마에서 바라보는 여성정치인은 어떤 모습일까. 또 영화가 특유의 상상력으로 미래를 내다봐왔다면 이들 작품에서 여성정치의 새로운 흐름을 읽을 수는 없을까.

    여성 정치에 대한 남성들의 판타지

    <미스터 에이스>(Mr. Ace, 1946)는 여성정치 시대를 예고하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영화는 주지사가 되고자 하는 한 여성의 야망을 그린다. 마거릿 윈댐 체이스(실비아 시드니)라는 이 여인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도시의 갱이자 킹메이커인 에디 에이스(조지 래프트)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여성과 정치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제의를 거절하고 홀로 선거운동에 나선 체이스는 좌절한다.

    그런데 에이스가 체이스와 사랑에 빠지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그는 더러운 수단을 이용해 깨끗한 정치를 구현하려는 이 여성을 돕게 된다. <미스터 에이스>는 여성과 정치에 대한 당시의, 그리고 남성들의 생각 또는 판타지를 반영한다. 여성이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 계기는 사랑이 만들어준다는 것 말이다. 물론 1946년에는 그것이 현실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영화 '지아이제인'의 한 장면

    시대가 바뀌어 정치계에 여성들이 속속 진출하자 영화도 변화한다. 이제 여성이 정치가가 되는 건 신기한 일이 아니다. 대신 여성정치인의 행태에 초점이 맞춰진다. <지. 아이. 제인>(G. I. Jane, 1997)에는 야심에 불타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한 명은 네이비씰 대원으로 선발되고자 하지만 남녀차별의 벽에 가로막힌 주인공 오닐(데미 무어)이고, 다른 하나는 군의 성차별을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선거전에서 승리하려는 상원의원 드헤이븐(앤 밴크로프트)이다.

    드헤이븐은 오닐을 희생시켜 여성 유권자의 마음을 얻으려는 전형적인 정치가다. 이제 여성정치인은 권력을 얻기 위해 교활한 술수와 잔인한 발톱을 사용하는 인물이 된다. 그녀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논리는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여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일정한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기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2005~2009)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부통령 레이놀즈(패트리샤 웨티그)가 등장하는데 그녀도 비슷한 인물이다. 결국 여성정치인은 남성 중심적인 정치 세계에서 유사 남성이 되거나, 남성보다 더 마초적인 여성이라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성보다 더 마초적인 여성

    이처럼 여성정치인은 그들 위에 있는 ‘유리천장’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는데, <컨텐더>(The Contender, 2000)의 부통령 후보 레이니 핸슨(조안 알렌)의 경우는 끔찍한 상황까지 마주해야 한다.

    부통령의 공석이 발생하자 대통령(제프 브리지스)은 이 자리를 여성인 핸슨에게 맡기려 한다. 하지만 부통령 인준위원회의 의사봉을 잡은 하원의원 러니언(게리 올드먼)은 여성 부통령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다.

    그 와중에 레이니가 대학시절 벌였던 섹스파티 사진이 공개된다. 청문회의 집요한 추궁에도 불구하고 레이니는 과거의 사생활과 자신의 자질은 무관하다는 것을 밝히려 하지만 여론은 더 나빠지기만 한다.

    <컨텐더>를 통해 남성보다 스캔들에 훨씬 취약한 여성정치인의 처지를 드러냈던 로드 루리 감독은 5년 뒤 다른 작품에서 여성 정치인의 또 다른 약점을 보여줬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 <커맨더 인 치프>(Commander in Chief, 2005~2006)가 그것이다.

    부통령이었던 매켄지 알렌(지나 데이비스)은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물려받는다. 그러니까 드라마 제목 그대로 군 최고사령관이 된다는 말이다. 그녀는 이상주의적 가치관을 현실 정치 속에 구현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남성들이 둘러쳐 놓은 벽이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높은 장벽은 ‘여자는 군 최고통수권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여자는 군 최고통수권자가 될 수 없다?

    영화와 드라마가 상상했던 여성 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상황은 현실화될 뻔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세라 페일린의 경우 말이다. 당시 69살이었던 대통령 후보 존 매케인은 암수술 전력까지 있어 건강 문제가 꾸준히 제기됐다.

    민주당뿐 아니라 공화당 일각에서조차 매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갑작스런 사고를 당한다면 여성인 페일린이 군 최고통수권자가 될 수 있다는 ‘협박’을 유권자를 상대로 하기도 했으니, 이들 드라마가 앞서 예견한 셈이다. 세라 페일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녀처럼 얘깃거리가 되는 인물을 할리우드가 그냥 내버려뒀을 리 없다.

    '게임 체인지'의 한 장면

    지난 3월10일 미국 케이블 채널 HBO에서 방송돼 대단한 화제를 모은 <게임 체인지>(2012)는 바로 세라 페일린을 주인공으로 다룬 TV영화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한국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다.

    두 명의 미국 저널리스트가 2008년 대통령 선거를 생생하게 재구성한 내용인데, 사실 이 책의 3분의 2 가량은 오바마와 클린턴 부부에 할애돼 있고, 나머지 3분의 1의 대부분은 존 매케인을 다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제작진은 페일린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만큼 대단한 뉴스메이커였다는 이야기일 터.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다고 할 법한 이 영화는 공화당 선거본부의 핵심 참모였던 스티브 슈미트(우디 해럴슨)의 시선으로 세라 페일린(줄리언 무어)을 그린다. 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매케인(에드 해리스)은 애초 민주당원인 조 리버먼을 부통령으로 지명하려 했지만 보수파의 반발을 우려해 부랴부랴 다른 인물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여성들의 지지도에서 오바마에게 크게 밀리던 매케인측은 알라스카 주지사였던 무명의정치인 페일린을 대항마를 발굴한다. 다행히도 5남매의 엄마로 ‘사커맘’을 자처하는 그녀는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고 마침내 대선의 폭풍이 된다.

    대처와 페일린 시대의 여성 정치인

    이 영화 속 페일린은 대단히 강단 있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인물이다. 남한과 북한을 구별하지 못하고, 연방정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를 혼동하며, 영국의 실권자를 여왕으로 알고 있는 그녀는 백치에 가깝다.

    <게임 체인지> 속 세라 페일린은 ‘여성정치인’이라기보다 우매한 정치게임 속에서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스타가 된 보통 사람처럼 보인다. 얼마 전 HBO에서 방송을 시작한 코미디 드라마 <비프>(2012~)의 주인공은 여성 부통령 셀리나 마이어(줄리아 루이스 드레퓌스)인데 푼수끼가 다분한 인물로 페일린에서 영감을 얻은 듯 보이기도 한다.

    실존 여성정치인을 다룬 또 다른 영화로는 <철의 여인>(2011)이 있다. 영국 마거릿 대처 수상의 삶을 다루는 이 영화는 대처를 연기한 메릴 스트립에게 3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영화 속 대처는 치매에 걸린 불쌍한 노인네다. 영화는 현재의 대처와 과거의 대처를 대비시키며 그녀의 삶을 조명한다. 이 영화 또한 대처를 ‘여성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정치인’으로 묘사한다.

    감독은 정치인 대처가 아니라 인간 대처를 드러내려 했다지만, 스트립의 훌륭한 연기에 비해 만듦새가 현저히 떨어지는 이 영화는 노동조합을 깨부수고, 탄광을 폐쇄하고, 포클랜드전쟁을 일으킨 그녀의 삶을 찬양하려는 의도 또한 뚜렷하게 노출시켜 불편하게 느껴진다. 아무튼 대처와 페일린의 시대에 와서는 여성정치인을 그저 정치인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한국의 여성정치인들이여, 건투하라!

    시대가 이러할진대 한국의 창작자들이라고 여성정치인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았을 리 없다. 장진 감독의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와 드라마 <대물>(2010)은 공히 여성 대통령의 이야기를 그린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한 장면

    3명의 대통령 이야기를 엮어냈지만 신통치 않은 반응을 얻었던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여성 대통령 한경자(고두심)는 남편 최창면(임하룡)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특히 자신이 부동산 투기 근절을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와중에 남편의 노후용 부동산 구매가 폭로되면서 정치적 위기와 가정의 위기를 동시에 맞이한다.

    <대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남편이 사망한 뒤 국가권력의 무능함을 느낀 아나운서 혜림(고현정)이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어 이상주의를 실현하려는 이야기를 그린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완성도 면에서는 언급하기 민망한 수준인 탓에 여성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의의 정도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성정치인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점은 영화와 드라마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여성들의 정치권 진출이 활발해지고 남성 중심의 정치문화가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성정치인들이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험하고 높아 보인다. 어쩌면 여성정치인들은 <미스터에이스>의 여성처럼 여전히 남성의 프레임 안에서 정치를 펼쳐야 하고, <지. 아이. 제인>의 상원의원처럼 남자보다 더 남성적이어야 하며, 그 와중에 <컨텐더>의 부통령 후보처럼 성적 수치를 감내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성대통령을 다루는 영화가 바뀌어왔던 것처럼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더욱 크게 변화할 것이다. 여성정치인들이여, 부디 건투하시라!

    아, 잠깐만. 이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실 ‘공주님’만큼은 여기서 예외로 하자.

    필자소개
    중앙일보 기자로 있다고 영화가 좋아서 씨네21로 이직하여 현재 씨네21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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