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선언 좋지만 쌍용에 관심 더 가져야
    2009년 06월 15일 09: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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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민주주의 압살’ 문제 때문에 교수들이 시국선언도 하고 관심도 많이 가지지만, 이와 동시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것은 쌍용자동차 사태입니다. ‘동시’라기보다는 쌍용자동차에 어쩌면 일차적 관심을 가지는 게 더 올바를 것 같기도 합니다.

시국선언 중요하나, 쌍용차에 관심을

제도적 민주주의도 매우 중요하지만, 사회-경제적 내실이 없는 민주주의는 결국 형해화돼 민심 이반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가 노무현 통치 시기에 많이 본 것입니다. 사실, 노무현의 역사적 실패란 바로 근로자와 영세사업가들에게 ‘생계 문제’ 해결을 전혀 가져다주지 못한 ‘속이 빈 민주주의’의 실패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노무현 통치 시기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이지만 사실 쌍용차의 문제의 불씨는 그 때에 결정적으로 키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에 허덕이었던 그 기업의 처리 방식으로서 공기업화 등이 제시됐지만 노무현의 신자유주의적 정부는 제대로 된 심사숙고없이 상하이차라는 외국자본에 쉽게, 너무나 쉽게 넘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자유주의적 관료들이 대체로 이렇게 처리하는 것을 "외자 유치 성과"라고 발표하고서는, 그 다음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은 특징입니다.

결국 전세계의 과잉 생산으로 자동차 산업 자체가 극심한 위기에 빠졌을 때에 그 ‘외자’는 뺄 것을 다 빼고 맨먼저 방치해버릴 것은 바로 쌍용차와 같은 재외 업체들이지요.

‘외자’를 만능해결사로 생각했던 관료들은 그 정도로 눈치 채지도 못했을까요? 여기 이 대목에서는 꼭 ‘중국인’을 지목해 욕할 것도 없습니다.

노르웨이의 유수의 제지 업체 Norsk Skog사가 자금흐름에 문제 생기가 맨먼저 팔아버린 게 한국에서의 공장이었지 않았습니까? 한국 자본이라 해도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할 것이고 이게 자본의 보편적 논리일 뿐입니다. 문제는, 이 자본의 논리로 이제 생계가 막막해진 1천여 명의 해고 대상자들입니다.

민생파괴 ‘길터주기’

우리가 그들을 자본의 논리대로 그저 해고되게끔 놓아둔다면 이는 한국이 복지주의적 상생적 공동체의 길로 가지 않고 계속해서 자본 이익 극대화 논리의 길로 갈 것을 의미할 것이고, 커다란 악영향을 미칠 선례가 될 것입니다. 요즘 정권의 집회 금지 등이 민주주의의 압살이라면, 쌍용차에서의 정리해고는 민생 파괴로의 길의 ‘터주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문제를 국가가 키웠으면 그 해결도 국가가 주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국가는 언젠가 오늘과 같은 소수 자본의 증식 ‘도움이’이자 폭압적 지배기구에서 복지 증진을 위한 재분배 기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분간 자금 흐름에 문제가 크다면 일부 노동자들의 무급 휴직 등 여러 가지 조치를 노조의 양해를 얻어 일시적으로 취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기업의 해외 매각을 다 그르쳐버린 국가는 보조금이라도 지급해 경영 정상화를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책임이 있는 자세가 되는 것이지요.

해고란 세계공황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그리고 한국이라는 특수 환경에서는 사실 문제의 개인들에 대한 사형 선고이자 해당 지역으로서도 재앙 중의 재앙입니다. 미국에서의 선례들을 들먹이지만, 월마트가 최대 기업인 미국과 달리 한국의 서비스업이란 구멍가게,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 아니면 주로 유부녀들을 채용하는 대형 마트 수준이지 않습니까?

그러한 상황에서, 더군다나 이 영세 서비스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는 대공황 시기에 공장에서 잘려버린 남성 노동자에게 어디로 가라는 이야기입니까? 본인도 사실 사회, 경제적 사형을 당하지만 그 가족들과 그 지역의 온갖 가게와 식당들도 연쇄적으로 치명타를 입는 것이지 않습니까?

토요타식 경영

한국의 상황에 그나마 어느 정도 맞는 것은 미국의 대량 해고 만능주의보다는 최소한 정규직을 절대 내보내지 않는 ‘토요타식 경영’일 것인데, 정규/비정규의 철저한 차별과 비정규직의 초과 착취는 ‘토요타주의’의 대결점입니다. 결국 이와 같은 문제들의 복지주의적 해결로의 접근법을 우리가 스스로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경제, 사회적 사형을 당하는 걸 우리가 가만히 보기만 하면 결국 그들을 위해서 울리는 조종은 우리를 위해 언젠가 울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해고와 폭력적 진압이 아닌 대화, 타협, 공동체의 원조 등으로 원만하게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선진화’인데 지금 정부와 사측은 그 쪽으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회가 대대적으로 압력을 넣지 않으면 이 문제는 모두들을 만족시켜줄 비폭력적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을 터인데 사회의 상대적인 무관심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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