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똥파리>와 <나쁜남자> 그리고 폭력
        2009년 06월 15일 03: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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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갔네요. 너무 늦게 쓰는 리뷰라 감독에게 미안함이 들 정도예요. 영화가 시작되면서 두 번이나 길가는 여성에게 깡패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저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남자>가 오버랩 되는 걸 피할 수가 없었어요.

    영화 보는 내내 이 영화는 여자를 어떻게 난도질 할까 궁금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뭔가 터질 듯한 긴장감. 그러나 제 기대(?)는 가차 없이 무너지고 말았죠. 그렇게, 단지 영화 도입부에서 발생한 사소한 연상작용에서 시작하여 저는 김기덕 감독과 양익준 감독의 폭력을 다루는 방식을 많이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영화가 폭력을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했을까요? <나쁜남자>는 어떻게 약자가 폭력에 굴복하고, 그 폭력을 하나의 위계질서로 받아들여 나아가 그걸 마땅한 섭리로 인식하고 순응하는지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사실적입니다.

       
      ▲ 영화 <똥파리>와 <나쁜남자> 포스터

    그런가 하면 <똥파리>는 관객이 깡패에게 직접 구타당하는 듯한 불쾌함을 받습니다. 영화를 보며 폭력에 분노하게 된다기 보단 폭력에 노출되어 위협받는 섬짓함을 느낍니다. 그렇게 폭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실성을 표현했습니다.

    두 영화 모두 사회의 따듯한 조명에서 벗어난 지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빈곤층이기도 하고, 법의 질서가 아닌 폭력의 질서로 유지되는 곳이기도 하지요. <나쁜 남자>가 꽤나 있는 집안의 여대생을 폭력으로 짓밟아 음지로 내동댕이친 후, 폭력의 세계에 순응시키는 과정을 그렸다면, <똥파리>는 다른 계층의 인물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진 않습니다.

    <나쁜남자>가 표현한 소위 밑바닥 사회는 법질서의 사회와 철저히 단절된 채 서술되지만 <똥파리>는 다릅니다. 가진자들이 사회 약자들로부터 더 빼앗기 위해 못 가진자를 이용하는 시스템을, 누구나 다 알지만 애써 외면하고 눈으로 직접 확인하길 꺼려했던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공개했습니다. 말 그대로 차마 눈 뜨곤 못 봐줄 지경이죠.

    제가 김기덕의 영화에 분노하여 비판할 때, 주위에 <나쁜남자>를 옹호한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솔직하잖아?”라는 것. 그렇듯 영화 안에서 폭력의 근원은 욕망이었습니다. <나쁜남자> 만큼이나 ‘불합리한 폭력의 세계를 향한 낭만적 감성을 관객에게 요구’하는 위험성이 <똥파리>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똥파리>가 아슬아슬하게 그 선을 넘지 않는 건 폭력의 근원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폭력이 어떻게 되물림 되는지, 법의 질서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은 이들이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사회 약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폭력의 순리를 이야기하기 때문이죠.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언제 어떻게 누구로부터 죽임을 당하는지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너무 뻔해서 김이 샐 지경이죠. 하지만 묘하게도 이게 큰 단점으로 작용하진 않습니다.

    사랑을 깨닫고 이제 폭력을 포기하려는 순간 끝을 맞이하는 주인공. 하지만 자신을 향한 그 폭력은 자신이 행한 수많은 폭력 중 단 하나의 응징이었을 뿐이었고, 미흡하게나마 그 복수의 의미가 담긴 폭력을 휘두른 이는, 그 폭력을 행한 순간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간 폭력시스템의 행동대장으로 승진합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길에서 죽어갔듯, 이젠 그 아들이 길에서 또 다른 어머니를 두들겨 패 죽음으로 내몹니다.

       
      ▲ 영화 <똥파리>의 한 장면

    이렇듯 영화에서 서술한 폭력의 되물림과 순환이란 것은 폭력가정이 자식을 또 하나의 폭력가장으로 키운다.라는 것 하나만이 아닙니다. 다소 낭만적으로 서술될 법했던 시나리오는 지긋지긋한 폭력의 묘사를 통해 애틋하게만 흐르는 걸 차단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길은 자본의 충실한 투견이 되어 가난한자를 단호하게 짓밟는 폭력이란 리얼리즘 앞에서 관객은 낭만적 애틋함에 젖어들 여유가 없을 테니까요.

    <나쁜남자>는 한 여인이 무참히 짓밟힌 후 폭력의 체계에 순응하여 자신을 파멸시킨 폭군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여인의 폭군을 향한 사랑에 동의를 요구합니다.

    그것 또한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일 수 있다고. 저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동의한다는 건 폭력의 불합리함을 긍정하는 결과이니까요.

    관객이 피부로 폭력을 경험하는 불쾌한 영화(똥파리)는 여운이 애잔하면서도 오히려 교육적입니다. ‘당신은 저 폭력에 동의하시나요?’라는 질문이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관객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폭력이건 사회약자를 교묘하게 겁탈하는 폭력이건, 어느 누구도 그러한 폭력을 긍정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엄기호님 책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를 보면 어찌하여 빈곤층에 예전보다 더욱 가족애가 무너지고 알코홀 중독과 폭력이 증가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의식이 영화 속에 담겨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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