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동맹 기반한 새 정당 창출해야
        2009년 06월 12일 02: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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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6월. 지금 우리는 ‘죽음/죽임의 정치’ 속에서 새로운 공간이 열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이 새로운 공간의 조성은 직접적으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이, 그리고 반성 없는 이명박 정부의 구시대 회귀적인 일방적 독주가 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보다 근원적으로는 그동안 누적되어 온 대중들의 분노가 특정 계기를 통해 응집되고 표출된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09년 6월, 그리고 새로운 공간

    2009년 6월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정국 향배로 국면을 구분한 뒤 몇 가지 물음을 던지면서 그것을 정리하고 또 답하는 것으로 글을 풀어나가기로 한다.

    우선 2009년 5월부터 6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 해당되는 첫 번째 물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이라는 비극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죽음 이후 많은 추도의 글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마도 거기에는 고인의 고통과 외로움, 상처받은 자존심과 모욕감, 함께 했던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자괴감, 모든 문제를 죽음으로 해결하려 한 책임감, 또 ‘실패한 대통령’의 ‘잃어버린 꿈’에 대한 경종과 죽음을 통한 부활 등 복합적인 어떤 심리들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개인의 실존적 결단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 노제가 열린 시청 앞(사진=손기영 기자)

    둘째, 그렇다면 죽음의 직접적 배경이 된, 이명박 정부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허접하지만 용맹무쌍한 보수세력은 왜 ‘노무현 박멸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토록 집요하게 고인을 물고 늘어졌을까?

    그것은 ‘잃어버린 10’년으로 철저하게 자기 무장한 ‘상식 파괴적’인 대통령-청와대-검찰-조중동에 의한, 고인 및 고인으로 상징되는 어떤 파격의 흐름에 대한 기득 헤게모니 세력의 증오에 따른 정치보복적 합작품이었다.

    예컨대 ‘국정을 마비시킨 2008년 촛불’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원시적인 증오감-그 배후에 고인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향후 유력한 도전세력으로서 재기가능성에 대한 원천적 차단 프로그램이, 국세청의 태광실업 세무조사 자료라는 호재의 출현 속에서, 또 정권의 시녀를 넘어 무소불위의 권력체로 성장한 검찰의 ‘법대로’식 오만함과 조중동의 드라큘라식 공격 저널리즘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정치적 타살인 이유들

    바로 이런 점에서 고인의 죽음은 얼치기 보수에 의한 민주주의의 급격한 역주행 속에서 이루어진, 국가폭력 네트워크의 작동에 의한 간접살인, 정치적 타살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다 긴 호흡으로 본다면 그것은 정치적 경쟁자를 용인하지 못하는 이른바 ‘정적 살해’라는 한국현대사의 극단적인 폭력적 역사 구조와도 일정하게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 번째 물음은 2009년 6월의 새로운 공간을 열고 있는, 예상치 못한 수백만의 추모 인파와 애도의 물결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이건 아니다’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두 가지 흐름이 결합된 결과였다.

    한편으론 한국현대정치사에 있어 초유의 일이자 큰 비극인 고인의 죽음에 대해 슬픔과 미안함과 분노가 착종되어 ‘이건 아니다’의 대중적 집합 심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현 정부에 의한 민주주의 파괴와 역사 퇴행, 가속화된 서민생활의 악화와 예측가능한 암울한 미래 등에 대해 ‘이대로는 안 된다’를 선언하게 한 것이다.

    결국 죽음으로 부활한 ‘아름다운 바보’의 소탈함, 가식 없음, 폼잡지 않음 등에 대한 잊혀진 기억 등이 사람들의 마음에 파동을 불러일으켰고, 또 비주류의 설움과 주류 질서에의 끊임없는 도전이 만들어낸 파격의 활동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어떤 것이었다.

    힘들을 다시 모으게 하는 힘

    바로 이런 것들이 나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적 반성의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흩어진 힘들을 결집케 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수천 명이 참가하는 가운데 전국적 차원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으며,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시민사회단체들도 새롭게 힘을 모으고 있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지지율 역전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민주당도 자성의 태도를 보이고 있고, 다른 야당들 역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공세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아마도 2009년 6월의 국면은 갈등과 긴장, 대립과 충돌 속에서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그렇다면 6월 국면 그 다음은?

    사실 6월 국면 이후를 전망할 때 개인적으로는 희망을 갖기에 앞서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특히 대중적 분노의 폭발로 조성된 6월 국면이 설득력 있는 정치적 대안과 결합하지 못할 때, 그것은 기억의 상흔과 집합적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창출 속에서 ‘거대한 상실감과 좌절감’의 공간을 조성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될 가능성과 그 후과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몇 가지를 묻고 답하려 한다.

    첫째, 이명박 정부의 선택과 정치적 행보에 대한 것이다. 6월 국면을 전후하여 현 집권세력 일부에서 문제 제기가 조금씩 나타나면서 갈등의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기는 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년여 동안 이명박 정부의 행태를 볼 때, 이명박 정부의 선택은 각계각층의 요구와 비판에 대한 국면봉합용의 일시적 위기탈출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

    국정 기조의 쇄신과 전환은 ‘잃어버린 10년’과 ‘밀리면 죽는다’는 확고부동한 대전제를 갖고 있는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있을 수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편으로는 그 나물에 그 밥인 인물로 당․정․청 인사의 일부 교체, 얼렁뚱땅 대국민 대통령 사과 등으로 국면을 봉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핵 카드와 개헌 카드와 경제위기-집단이기주의적 저항과 노동파업론 연계 카드 등을 통해 국면을 전환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북핵과 개헌 카드

    그러나 북핵 카드는 북한 당국이 이전의 서해교전을 뛰어넘는 수준의 군사적 직접행동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없으며, 또 개헌 카드는 기본적으로 정치권에서 화답이 없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별다른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으로 본다.

    집단이기주의적 저항과 노동파업으로 인한 경제상황의 악화라는 식상한 이데올로기 공세 역시 경제위기의 주범이 바로 현 정부의 실정이라는 것을 대다수 국민들이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큰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 (물론 과거의 경험에 비춰볼 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카드가 대중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측면이 있다는 것에 대해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국면 봉합이나 정국 전환 카드는 실패할 것이고, MB악법 포기나 가진 자들 위주의 정책 및 소통 거부의 일방주의적 공안통치 등 국정 기조의 전환은 없다고 할 때, 사회적 갈등의 심화와 대중적 분노의 누적은 집권 기간 내내 지속되리라는 것이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그리고 역사의 부메랑 속에서 현 대통령과 그 수족들은 권좌에서 내려온 후 법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 10일 낮 대한성공회 대성당에서는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6월 항쟁 2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손기영 기자)

    둘째는, 민주당과 이른바 ‘친노그룹’ 등에 대한 것이다. 6월 정국과 지지율의 역전 속에서 민주당은 일단 이전의 정체성이 모호한 권력기회주의 집단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을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실정의 근원을 이명박 정부에 돌리며 그 그늘 뒤에 민생의 악화를 핵심축으로 하는 지난 ‘민주정부 10년’의 실패를 감추는 것으로는 의미 있는 정치 대안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이 노무현 정부 5년간 민생 악화의 반사적 결과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지지율 역전이 반사적 효과에 따른 일시적인 것이라고 할 때, 뼈아픈 자기반성과 성찰이 전제된 대정부 비판만이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당의 경우

    예컨대 ‘바보 노무현’을 넘어 역사 재평가라는 이름 아래 ‘대통령 노무현’과 참여정부 5년에 대한 미화 작업 및 세 확산 작업에 나선다거나, 진보진영에 대해 “참여정부와 손을 잡지 않고 보수진영과 마찬가지로 비판만 일삼았다”는 식으로 공세를 진행하는 것은 사실과도 맞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무현을 계승한다는 이름 아래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실패한 역사에서 배우고 깨닫게 될 때 그 교훈은 더 소중하고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이와 함께 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 일각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리고 일부 지식사회에서 불씨를 살리려는 개헌 공방은 의도와는 달리 분위기를 호도하면서 사태를 반전시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즉각 중단하는 것이 맞다.

    결국 현 국면에서 중요한 것은 6월의 분노를 어떻게 긍정적인 힘으로 이어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직접적 계기로 해서 조성된 6월 국면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분노와 열정을 불러내어 새로운 힘으로 모아내는 것은 물론 당연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이 힘의 결집이 ‘노무현의 죽음’에 국한되어 결집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고인의 실패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꿈과 희망의 부활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맹목적 추종을 통한 순교적 영웅 만들기와 우상 숭배가 아니라, 노무현의 죽음을 지금 잊혀져가고 있는 다른 죽음들, 즉 1월 20일 용산 참사의 억울한 죽음들, 5월 3일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의 죽음과 만나게 하여 ‘죽음/죽임의 정치’가 남긴 상처를 함께 보듬고 함께 아파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연대’를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 실존의 문제인 죽음은 모든 이들을 슬픔으로 몰아넣고” 또 “모든 새로운 시대는 죽음 위에서 잉태된다”고 할 때,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자본과 시장지상주의의 야만적 그물망

    그 출발은 정치적, 사회적 타살의 성격을 띤 여러 죽음들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거부한 이명박 정부와 함께,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절망으로 내몬 힘의 실체로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흉측한 괴물, 즉 자본과 시장지상주의의 야만적 그물망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한편 새로운 시대를 여는 디딤돌로 2009년 6월의 국면은 기성 정치의 변화를 통해 일단 한 매듭을 풀어야 한다. 거리에서의 행동과 그 운동의 강렬한 에너지가 장기간 유지되기 쉽지 않으며, 일상적 삶으로의 자연적 회귀 속에서 그 자체의 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 대중들이 대의제 민주정치를 통한 선택과 심판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과, 가시적인 시간 안에 한국사회에서 혁명의 불꽃이 점화될 수는 없다는 점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즉 지난 ‘민주정부 10년’의 공과, 특히 참여정부 5년에 대한 대중적 기대와 실망의 양 측면을 제대로 잇고, 또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6월의 분노와 열정이 단순히 거리의 행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의미한 선거 결과로 나타나 새로운 소통의 정치의 틀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앞으로 다가올 일련의 선거들, 2009년 10월 국회의원 재보선과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양대 선거들을 어떻게 위치짓고, 누가 누구에 맞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는 향후 한국 정치사의 전개에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신당은?

    현 국면에서 진보신당의 경우 87년을 호명하는 6월의 주도적 분위기에 그냥 편승하거나 또는 이와 반대로 예리한 각을 세우며 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타고 넘으면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타고 넘기’의 전략은 말처럼 쉽지 않으며 안팎의 공세를 슬기롭게 조율하면서 가히 ‘예술로서의 정치’가 필요한 지점이기는 하다.

    한편 이와 관련해 좋은 정당이 갖춰야 할 주요 덕목 가운데 하나가 사태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자로서의 역할이며 그것은 사회와의 끊임없는 소통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진보신당은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랬을 때 그 관건은 2009년 오늘의 정세에서 87년과 97년으로 상징되는 서로 다른 두 흐름을 어떻게 온전하게 만나게 하여 하나의 새로운 힘으로 묶어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09년 초 진보신당 일각에서 제기한 서민중심 복지동맹의 구축과 그것에 기반한 새로운 정당의 창출, 우여곡절 끝에 제시된 민주노총의 사회연대 전략 등을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담은 그릇으로 잘 만들고 다듬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의 기본 동력은 바로 오늘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다수의 보통사람들의 연대, 즉 민주주의의 역주행과 자본과 시장의 야만적 질주 하에서 미래를 잃은 ‘상처받은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대, 참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통과 연대와 참된 만남의 흐름이 ‘거리의 정치’를 넘어 새롭게 결집된 정치적 힘으로 일련의 선거들을 돌파해내고, 그럼으로써 ‘87년 체제’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창출하는 자양분이 될 때 2009년 6월 거리의 분노와 열정은 역사 속에 새로운 의미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바보 노무현’의 실패한 꿈, ‘대통령 노무현’이 포기하고 만 ‘사람사는 세상’을 향한 희망을 생환해내는 지름길이 되리라고 본다. 새롭게 거듭남을 통해 진보신당이 새로운 정치 창출의 주역이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죽음/죽임의 정치가 반복되지 않는 사람사는 세상이 열리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 이 글은 주간 <진보신당>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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