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하에 와보니 그는 외로운 이였다
        2009년 06월 12일 01: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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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유럽여행이라도 떠나지 왜 이 번잡한 곳에 남아 있었더랬습니까?

    2009년 5월 23일 오전 10시, 그 날 난 망월동으로 가는 택시를 타고 있었다. ‘님을 위한 행진곡’, 그 영혼결혼식의 주인공 박기순 누이와 윤상원 열사를 비롯하여 80년 5월 26일 공수부대의 총탄을 머리에 맞고 꽃처럼 쓰러져간 박용준 전사, 그 날 밤 윤상원과 함께 콩볶듯 쏟아지는 총알을 뚫고 살아남아 상무대 영창으로, 광주 교도소로 끌려 다니다 정신을 놓아버린 김영철을 비롯하여 박관현, 신영일, 박효선이 다함께 한솥밥을 먹었던 ‘들불’야학의 마음을 기리는 그 날 오전, 온 국민이 그러했듯, 들려오는 전파의 음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사진=사람사는 세상

    문득 도봉산 산행길에서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고 장준하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벽에서 떨어져, 양산의 병원으로 실려 가다니….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해가 안치된 봉하의 정토원을 찾은 것은 6월 10일이었다. 고속도로 곁, 남도의 산하엔 밤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밤꽃의 내음이 코끝을 건드릴 때,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곁을 떠났다.

    왜 떠났을까? 풀리지 않는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봉하를 찾았다. 들어가는 입구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란띠들이 인간 노무현을 향한 깊은 애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정토원의 입구엔 대형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는데 다가서 보니 ‘제대로 모시지 못하여 죄송합니다.’는 이광재씨의 글이었다. ‘지장보살’ 염불소리가 청명하게 들리는 청정도량 정토원에서 마지막 하직의 예를 올리고 나왔다.

    젊은 시절의 노무현

    “21년 전 오월 이맘 때 만났지요. 42살과 23살 좋은 시절에 만났습니다. 부족한 게 많지만 같이 살자고 하였지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꿈만 가지고….불꽃처럼 살았습니다.”라고 이광재씨가 고인을 추모하였듯이, 두 분이 처음 인연을 맺었던 1988년, 우리 노동자들도 젊은 시절의 노무현과 이렇게 인연을 맺었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세상,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 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끓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입니다.”(1988년 7월 8일 노무현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

    들리지 않는가? 치켜뜬 눈매에 약간은 체념하듯 불의의 현실을 비아냥거리는 독특한 노무현의 음성. 그때 우리는 노무현에 매료되었다. 88년 국회 연단에 올라서서 정부 각료들을 호령하던 노무현은 진정한 민중의 호민관이었다.

    천하의 정주영을 냉철한 논리와 포효하는 분노로 쩔쩔 매게 한 젊은 시절의 노무현은 그야말로 멋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는 그의 연설문이 너무 좋아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의 부록에 고스란히 옮겨놓아 버렸다. 한 구절만 더 읽어 보자.

    “정부는 입만 열면 노사화합을 외칩니다. 그러나 노조 한번 해보려고 하다가 전기도 끊고 수도도 끊긴 공장 바닥에서 스치로플 한 장 깔고 앉아서 생라면 씹고 있는 이들 노동자가, 가족이 가져다 준 주먹밥마저 빼앗아서 불태우던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 노동자가, 그리고 끝내는 감옥에 갔다가 해고되어서 길거리에 내쫓긴 이들 노동자가, 그들을 내팽개친 기업주와 이 땅 위에서 서로 화합해서 살기를 기대하십니까?…” (1988년 7월 8일 노무현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

       
      ▲ 자료=MBC

    말뿐이 아니었다. 그는 온 몸을 던져 노동자와 함께 투쟁하였다. 지금은 장수의 한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또 다른 세상을 열고 있는 전 대우자동차 해고자 전희식의 기억에 의하면 노무현은 전경 버스 밑으로 몸을 던진 사나이였다. 경찰의 불법 연행을 그렇게 온몸으로 막았다.

    “노무현은 단 한 가지를 주장했습니다. 수배자가 있다면 모든 사람들을 다 제자리에 갖다 놓고 다시 적법하게 법을 집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범법자를 비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풀려났습니다. 그러자 노무현은 떠났습니다. 상의가 찢기고 넥타이는 다 풀어지고. 바짓가랑이는 흙 투성이고. 그런 모습으로 노무현은 씩씩대며 우리 시야를 벗어났습니다.”

    전희식은 1980년대의 노동현장에서 치열하게 젊음을 불살랐던 노동자이다. 그의 가슴에 노무현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재벌과 권력자에 맞서 적수공권으로 으르렁대던 모습’ 말이다. 한편 ‘민주노조 하지 말걸 그랬습니다’는 추도사로 노동자의 마음을 대변한 김진숙, 그녀의 가슴에도 노무현은 새겨 있었다. ‘정 많은 부산 머스마’로…. 김진숙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 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서둘러 봉하의 부엉이 바위를 찾았다. 나직한 바위였다. 솔숲 사이로 봉긋솟은 저 바위, 부엉이 바위에서 무슨 한이 그리 깊어 몸을 던져야했나? 오후의 태양은 빛나고 있었고, 텃밭의 고추는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봉하 마을은 어수선했다. 텔레비전에서 본 봉하 마을은 한적한 시골이었으나, 와 보니, 퇴임 후 농사지으며 살만한 터가 아니었다. 마을 입구, 부산에서 밀려온 중소 공장들이 즐비한 것도 그렇고, 노후의 여생을 보내기에 봉하는 몹시 장터스러웠다.

       
      ▲ 사진=사람사는 세상

    살아생전 고인의 생가를 조성하고 있는 것도 이상했고, 포장마차 같은 가게들이 즐비하여 있는 것이, 꼭, 상업화된 관광 명소에 온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국민들이 “나오세요.” 외치면 늘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

    “차라리 유럽여행이라도 떠나지 왜 이 번잡한 곳에 남아 있었더랬습니까? 책도 읽을 수 없다며 한탄하시지 말고, 그냥 나가 버리지 뭐했습니까? 이스탄불의 토카피 궁전도 보고,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도 오르고, 시베리아 대륙 횡단 기차도 타보시고, 바이칼의 물도 마시고, 만주에서 송화강의 아침 해도 보시면서, 한 5년 세월 보내다 들어오시지, 왜 그랬어요?“

    안쓰러웠다. 봉하의 부엉이 바위를 보기 전, 나에게 노무현은 청와대의 노무현이었고, 지체 높은 분이었다. 봉하에 와 보니, 노무현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노무현을 ‘제대로 모시는’ 사람은 없었음을 직감하였다. 진보적 지식인들, 참 많았다. 그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 가운데, 진실로 마음을 열고 노무현과 소통하는 진보적 지식인이 있었던가? 참, 의아했다.

    청와대에 갇힌 바보 노무현

    사람들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선거전에서 7%의 경제성장을 약속하였던 과거를 다 잊어버렸을 것이다. 까마득히 잊었을 것이다. 그때,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선거는 유독 치열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한겨레 신문을 보니, 7%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겠다며 노무현 후보측이 신문의 1면 하단에 광고를 실었다. 당시 이회창 후보는 6%의 경제성장을 공약하였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존경의 마음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왜냐?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것은, 민중을 버리겠다는 것이다.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것은 가난한 노동자의 살림을 더욱 힘들게 하겠다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의 현실에서 정부’,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것은 재벌들의 뒤를 체계적으로 밀어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의 저 오만한 불법 행위에 작두로 단죄를 가해도 부족할 판에, 정부가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것은 앞장서서 삼성의 보호자가 되겠음을 공약하는 것이었다. 또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것은 국민의 혈세를 가지고 토건세력들 배를 불려주겠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경제성장 7%의 공약은 이회창 보다 더 확고히 민중을 압살하겠음을 공약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공약을, ‘부패원조당’ 한나라당을 따라 ‘부패신장개업당’이 되겠음을 아무 부끄럼없이 선포한 공약으로 이해하였다. 그렇게 노무현은 자신의 신조를 배반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88년의 국정연설에서 민중의 대변자 노무현은 이렇게 포효하지 않았던가?

       
      ▲ 재임시절 수석보좌관회의 장면 (사진=사람사는 세상)

    “아직도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비유컨대 ‘빵’의 크기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희생이 계속되어야 합니까?”( 1988년 7월 8일 노무현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

    아니나 다를까, 제16대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노무현 신임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동북아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박정희가 내건 성장주의의 기치를 전두환, 노태우로부터 물려받아, 이를 21세기의 여건에서 완성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봉하의 비극은 여기에 있었다. 이 취임사는 노무현의 것이 아니고, 삼성의 것이었다. 한 표라도 더 얻어야 하는 대통령 선거에서 고도성장의 충실한 후예가 되겠다는 것은 공약(公約)이 아니라, 공약(空約)이었다 치자.

    대통령 취임사는 삼척동자도 듣고 산천초목도 기억하는 역사적 문건이었다. 동북아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로 거듭나겠다는 취임사에서 참여정부는 이미 ‘한미 FTA의 구걸’을 예고하고 있었다.

    보자. 성장주의 노선을 이어받는 한, 삼성과 현대에게 손을 안 내밀 수 없다. 재벌들이 투자를 해줘야 경기가 돌아가지 않겠는가? 헌데, 생산된 물건은 어디에 팔아 먹어? 성장주의 노선을 따라 가는 한, 미국의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참여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였다. 심하게 밀어부쳤다. "사진 찍기 위해 미국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던 노무현의 배포가 무너지고, 미국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 한 명 원하였던 민중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다시한번 젊은 시절의 노무현이 안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월남전 생각이 납니다. 월남전에 대해서 온 세계가 비난을 하고 민족의 자율성을 들어서 비난하는 견해가 있었을 때, 정부는 슬그머니 여론을 이렇게 조성했습니다. ‘월남전에 참여해서 벌어 온 돈으로 우리의 경제가 발전되었노라’고, 이렇게 사람들을 속이려 했습니다.

    바로 이 발상이야말로 돈이면 무슨 짓이든 다할 수 잇다는 것입니다. 내 나라 백성 몇만 명이든 죽일 수 있다는 끔직한 발상입니다.” (1988년 7월 8일 노무현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

    성장주의 노선을 따라가는 한, 돈의 시녀가 될 수밖에 없다. 자본에는 인간의 심장이 없다. 모든 것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보는 자본의 마수에 사로잡히면 보이는 게 없어진다. 하여 대한민국의 토건세력들은 금수강산을 요모양 요꼴로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 토건세력들을 대한민국의 ‘보수’라 불러주는 현실이 미치도록 가슴 아프다. 그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을 가꾸고 지키는 ‘보수’(保守) 세력이 아니라, 삼천리 금수강산을 요절내는 ‘파괴’ 세력이다. 아니나 다를까 참여 정부는 새만금 간척 사업을 통과시켜 버렸다.

    아무도 자유롭지 않다.

    봉하를 떠났다. 그곳은 퇴임한 대통령이 쉴 곳이 못 되었다. 퇴임 후 평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면, 조용히 해외로 떠날 일이었다. 왜 봉하에서 체류하였을까? 나는 측근들의 부실함, 상상력의 부족을 절감했다.

       
      ▲ 사진=사람사는 세상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책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직접 유럽 여행을 하실 일이지. 눈이 좋지 않아 ‘책도 읽을 수 없다’며 자탄하지 말고, 로마로 영국으로 그냥 배낭 여행했다면… 그 이야기 나누기 좋아하는 분이, 유럽인들과 직접 대화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였다면… 봉하에서 돌아오는 길에 드는 생각은 온통 이런 것뿐이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은 고백하였다. 그렇다. 나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다. 지난 2003년 『레즈를 위하여』 서문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남한 부르주아지의 국가주의를 폐기하고자 나온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이라고 본다. 취임사의 절반이 동북아의 중심국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찬양하는 수사로 덮여 있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전임 대통령들을 옆에 모시고 그들과의 단절이 아닌 그들의 계승을 선언하였다.”

    봉하에 가보니, 부엉이 바위는 높지 않았다. 봉하에 가보니 노무현의 이론은 높지 않았고, 측근들 역시 부실하였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는 발언은 엄살이 아니라 몸부림이었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발언 그대로, 청와대의 주인은 대통령이 아니라 삼성이었다. 바보 노무현은 삼성의 거미줄에 붙들려 몸부림치는 한 마리 고추잠자리였다.

    지금 다시 반MB 전선이 일어서고 있다. 어떤 당파, 어떤 지도자가 다음 권력의 수장이 되더라도 좋다. 하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하자. 우리가 봉하의 비극에서 아무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제2의 비극을 만들어낼 것이다.

    지리산에서 계룡산, 그리고 계룡산에서 서울까지의 300km를 자벌레처럼 기어온 수경스님, 문규현 신부, 전종훈 신부의 외침에 귀 기울이자.

    “도반 여러분.
    제가 보건대 지금 우리 사회는 분노가 부족해서 민주주의가 역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승만 정권과 4·19, 장면 정부와 5·16, 박정희와 부마항쟁 그리고 10·26, 전두환과 5·18, 6·10…. 이렇게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로, 소위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돈, 돈, 돈을 외치면서 우리 스스로 사람다운 삶을 내팽개쳤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 필자

    주역의 64괘 중 마지막 괘의 이름은 미제(未濟)이다. 죽음으로써 삶은 완결되지만, 또 무덤 위에 자라는 풀처럼, 생은 계속되는 법.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삶을 완결하였지만, 우리의 삶은 또 이어지고 있고, 역사는 또 흘러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봉하에 내려가 나라의 미래를 궁리하였다고 한다. 측근들에 의하면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을 읽고, 주위 지인들에게 일독하길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꿈꾼 『유러피언 드림』을 코리언 드림으로, 코리언 드림을 한국의 현실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고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

    “유러피언 드림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인격적 관계를 존중한다. 부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존중하고, 무제한적인 개발보다는 환경 보존을 염두에 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중시한다. 사유재산의 배타적 권리보다는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생명권을 존중하고, 일방적 무력 침략보다 다원적 협력을 강조한다.” 『유러피언 드림』

    2009년 6월 12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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