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그 이후의 전쟁
    By mywank
        2009년 06월 12일 02:17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전쟁 그 이후의 전쟁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은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고,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가 강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치욕스럽게 여기도록 만들고, 그 치욕에 겨운 슬픔으로 세상과 적대하게 만드는 것, 전쟁이다. 운이 좋아서든 남보다 강해서든 살아남은 것이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에 슬픈 것은, 그러나 전쟁의 주체인 전쟁기계, 남성의 몫이다.

    전쟁의 빌미를 만든 것도 아니고, 전장 한가운데서 죽고 죽이며 전투를 벌이는 것도 아닌 남성 이외의 존재들에게 살아남는다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킬레스와 맞서 싸웠다던 아마조네스의 전설이 트로이 전쟁에 휩쓸렸던 숱한 용사들의 이름들 가운데 여전사의 용맹을 떨치는 본보기가 되기도 하고, 차도르 속에 폭탄을 두르고 적의 소굴로 돌진한 중동지역 이슬람 여교도의 비장한 폭사 소식이 중동 지역의 강퍅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게끔 하지만, 유사 이래 전쟁은 남성중심적 세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중에서

    그래서 거대서사인 전쟁은 남성의 이야기인 역사/history를 이리저리 뒤틀어가면서 남성이 아닌 존재들- 여성, 어린이, 또는 정상적 남성이 아닌 존재들 -의 이야기를 휩쓸어 버린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벙어리 어머니, 보리 한말에 부역자가 되어 총살당하는 약혼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조차 전쟁 그 자체로부터는 비켜서있는 수동적 인물이 되어버린다. 전쟁을 거부하는 남성은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성장을 거부하며 어린이로 남아 전쟁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비정상적 존재인 난쟁이들과 함께 부유한다.

    전쟁영화는 전쟁기계의 작동을 스펙터클로 그려내는 세계다. 이 스펙터클의 세계에서 남성이 아닌 이들은 전쟁의 주체인 남성들의 갈등을 부추기거나 방해하는 ‘소음’이다. 이 소음은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은 요란한 전화에 묻혀버리는 미약한 신음이지만 포화가 가라앉은 다음에까지 가녀리고도 길게 지속되는 비명이 된다.

    그러므로 이 ‘소음’에 귀 기울이는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라 전쟁의 잉여에 대한 영화가 된다. 전쟁의 잉여는 전쟁이 없다면 생겨날 수 없는 것이지만 전쟁 그 자체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전쟁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지만 전쟁의 잉여는 승자도 아니고 패자도 아닌 ‘피해자’를 만들어낸다. 피해자의 세계는 거대한 스펙터클로 펼쳐지는 대신 자잘한 상처와 흠집으로 비어져 나온다. 그 상처와 흠집은 전쟁의 잉여 그 자체가 전쟁의 지속, 또는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라는 것을 호소한다.

    침략국가 일본의 잉여, 피해자 의식

    한 무리의 군인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는 곁으로 초췌한 몰골의 사내가 웅크리고 지나가는 풍경은 <감각의 제국>이 전쟁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유명한 이미지다. 이 사내는 전쟁기계의 부속으로 합류하는 대신 섹스에 몰입한다. 전쟁이든 섹스든 사내가 도달하는 것은 죽음이다. 섹스 말고는 숨을 곳이 없는 막다른 인생으로 이 사내를 끌어들인 욕정은 쓰레기처럼 썩어든다.

       
      ▲ 영화 <감각의 제국> 중에서

    더 이상 발기할 수 없는 페니스. 그래서 목적지를 잃은 남성.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라는 시대적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기미가요를 목청껏 불러 제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사내의 남성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페니스를 가지고 있는 한, 이 사내는 끊임없이 거대 남근 중심의 세계에서 의혹의 대상이 된다. 결국 자신이 도발한 여인의 손으로 페니스를 절단당할 때까지 사내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군국주의가 최고조로 일본을 들뜨게 만들던 시기에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은 전쟁을 애써 지우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포르노그래피임을 보여준다.

    60년대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종전 후 일본 사회의 왜곡된 의식, 빗나간 윤리관, 통제력을 잃어버린 시스템 등이 만들어 내는 문제들을 파헤치는 영화들을 만들면서 예민한 정치적 현안들을 급진적인 스타일로 그려내는 전위적 감독으로 평가받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작품 세계는 <감각의 제국>을 기점으로 탐미적인 포르노그래피(<감각의 제국>, 1976), 불길하게 아름다운 괴담(<열정의 제국>, 1978), 우수에 찬 사무라이영화(<고하토>, 1999) 정도를 넘어서 그 이면들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도발하는 대신 탐닉하는 영상은 시대를 읽는 대신 사건에 집착한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이전 작품들은 다큐멘터리 정신을 바탕으로 당대 일본사회를 직접 스크린에 불러들이면서 전체 대중이 아닌 대중의 일면을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감각의 제국>이후의 작품세계는 여전히 일본의 어떤 역사적 시점으로 카메라를 가져가면서도 발언은 우회적이거나 소극적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스타일리쉬한 영상은 고혹적이지만 그 사용방식은 노회하다. 그래서 <감각의 제국>에서의 성기절단은 곧 감독 자신의 노쇠 또는 거세처럼 보인다.

    사내가 자신의 몰락을 여인의 집착과 과도한 욕망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는 동안에도 대일본제국의 군대는 침략과 정복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스스로 도발한 욕정조차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추접스런 행실이 미학의 문제로 전치되는 것은 전후 일본 사회의 떳떳하지 못한 역사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사내는 희생자가 되고 여인은 피해망상에 젖은 가해자가 된다. 사내의 정액을 입가에 흘리는 여인은 그야말로 섬뜩한 잉여로 제쳐 진다.

    여기서 카메라가 스크린에 펼쳐 보이는 것은 전쟁의 실체가 아니라 전쟁의 그림자다. 그림자에서 애써 전쟁에 대한 메시지를 읽으려고 하는 것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환영을 텍스트로 재구성하려는 노력의 산물일 뿐이지,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목소리가 아니다.

       
      ▲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의 한 장면

    그런가하면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는 어른들이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사위어간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침략국’ 일본이 아니라 ‘패전국’ 일본으로 포커스를 옮겨간다.

    영화는 담담한 소년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소화(昭和) 1945년 9월 21일 밤, 나는 죽었다.’라고 말하는 소년 세이타의 영혼은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죽어가면서도 소년이 굳이 발언하고자하는 것은 자기보다 먼저 죽어간 여동생 세츠코와 자신이 어째서 죽게 되었는지, 전쟁의 포화 속에 희미한 반딧불이 어떻게 깜박이다 사위었는지를 알리고 싶어서다. 그래서 소년의 유령은 동생의 유령과 나란히 서서 퀭한 눈으로 관객에게 자신들의 자취를 되짚어가도록 주술을 건다.

    불과 석 달 전, 고베에 미군 폭격기 B29의 대공습이 있던 날, 열네 살 소년 세이타는 네 살 박이 여동생 세츠코는 어머니와 집을 잃고 말았다. 먼 친척 아주머니의 집으로 찾아간 이들 오누이를 처음에는 연민과 인정으로 거두어주던 친척도 전후의 팍팍하고 사나운 인심으로 돌아서고 만다. 전쟁의 주체가 아닌 이들 오누이는 이미 집/사회/국가로부터 추방당한 잉여일 뿐이다. 결국 갈 곳 없는 오누이는 어두운 방공호에서 살게 되고 척박한 환경에서 굶고 병들어 시들어간다.

    방공호는 폭격/전쟁을 피하기 위한 공간이다. 전쟁이 휩쓰는 시대에 전쟁을 피하는 것은 사회에 쓸모없는 행동이다. 사회에 쓸모없는 존재들에게는 어떤 배려도 주어지지 않는다. 날이 저물면 방공호 앞 연못에서 반딧불을 잡아 어둠을 피하는 정도가 고작인 아이들의 생존방식은 날이 밝고 나면 모두 죽어버리는 반딧불처럼 위태롭다. 공습사이렌이 울리면 다른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방공호를 찾아가지만, 세이타는 바로 그런 때 방공호를 빠져나와 죽음을 무릅쓰고 빈집에 들어가 식량을 훔친다. 물론 그런 순간에도 전쟁을 주재하는 국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에게 잡히기도 한다.

    침략국으로서의 반성이나 성찰 없이 일본 내부의 피해자만을 그려낸다는 것은 직접 그 총칼에 짓밟혔던 입장에서 보자면 뻔뻔할 뿐 더러 위험하게 보일 수도 있다.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 속에 한 나라와 한 시대를 온통 엮어놓자면 두 오누이의 아버지도 전쟁기계의 한 부속이었을 터이고, 그러므로 그 피해라는 것이 리얼리즘을 빙자한 자기연민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 영화 <의리없는 전쟁> 포스터

    대부분의 일본 반전영화들이 그렇듯 <반딧불의 묘> 또한 침략의 실상보다는 전후 패전국의 피해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런 피해의식은 남성 장르인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의리없는 전쟁>과 같은 액션영화에서는 야쿠자의 폭력적 세계를 설명하는 배경이 되면서 극단으로 치닫는 무법천지로 나아간다.

    전쟁의 주체인 남성들은 패전을 ‘힘의 논리’로 파악하고 일상을 전쟁으로 만드는 야쿠자 조직으로 스며들어간다.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가 살아남았더라면 오빠는 여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야쿠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녀린 오누이는 죽었고, 죽은 자의 목소리로 전쟁을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전쟁기계로부터 어떻게 버려졌는지를 증언한다. 한때 가족/국가의 희망이었을 어린이들이 어떻게 전쟁의 잉여가 되어 내쳐지는지를 이야기하지만 유령의 목소리는 산 자의 귀에 닿지 않는 공허한 소음일 뿐이고, 일본은 여전히 아무런 책임도 지려하지 않는다. 이 아이들의 목소리는 영화 속에서 울려퍼지는 ‘즐거운 우리 집 Home, Sweet Home’의 노랫소리만큼도 현실적인 울림을 만들지 못한다.

    아이들은 살아남지 못했고, 살아남지 못한 자의 슬픔을 이야기 한다. 이 아이들의 슬픔은 브레히트의 말을 빌자면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본 안의 잉여, 피해자에 대한 책임은 일본이 승전했더라면 생기지도 않았을 문제다. 그러나 일본의 군화와 총칼을 고스란히 받아야했던 식민지와 피침략국가의 입장에서는 피해는 유령으로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의 상처로 아로새겨져 있다.

    오래도록 삭혀진 울음소리, 종군위안부

    전쟁이 불러내는 것은 젊고 건장한 남성들이다.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수컷들인 것이다. 이들 수컷의 공격성은 상대방을 상처내고 살육하는 데는 제격이지만, 제대로 길들이지 않는다면 무기로 쓰기에 만만한 것이 아니다. 흥분한 수컷을 길들이는 데 가장 값싸고 달콤한 방법은 섹스다. 그래서 일본은 종군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섹스를 징발했다.

    여성에게서 다른 모든 인격을 제거하고 오직 섹스만을 필요로 하는 종군위안부 제도는 전쟁터 한복판이 아니라 막사 주변을 터로 삼았다. 부풀대로 부푼 살기와 욕정과 불안을 고스란히 남근에 모아 여성을 찌르고, 터뜨리고, 해소하면서 전쟁기계는 인간을 물화한다.

    전쟁이 끝난 후, 종군위안부로 학대받았던 여성들은 인간으로 돌아오기에는 너무도 심하게 능멸당했을 뿐 아니라 남성중심의 성담론 속에서 목소리를 억압당했다. 종군위안부들은 역사 속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올릴 수 없었고,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존재 전체를 걸고 전쟁을 계속해야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이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울리기까지 반세기의 세월이 흘러갔다. <낮은 목소리> 연작은 전쟁 중에는 군화와 총칼에 짓밟혔던 여성이 전쟁이 끝난 후에는 순결과 정조 이데올로기로 다시 억눌려 만신창이가 되어 속으로 삭혀버린 목소리를 세상으로 끌어낸다. <낮은 목소리>는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2편 부제)>의 참혹함과 목소리보다 가녀린 <숨결(3편 부제)>을 이어가기가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3 – 숨결> 중에서

    ‘조국’과 ‘민족’이 귀를 막았기 때문에 종군위안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예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숨통을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남성/국가가 얻고자 하는 것은 강한 힘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강한/강하고자 하는 자의 부끄러움을 환기시킬 때, 그 슬픔 자체를 억누르고 지워버린 역사의 폭력은 종군위안부로 상징되는 전쟁의 상처를 봉합해버렸다. 봉합된 채로 곪아 터진다 해도 치유되지 않는 한 상처는 상처로 남아있다. 숨통을 틀어막는다 해도 목소리는 낮은 소음으로 울린다.

    식민지 여성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자기 나라 남성에 의해 재식민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전쟁은 평생을 걸고 지속된다. 그 전쟁이 환기시키는 부끄러움은 천민자본주의에 기댄 성담론 속에서 포르노그래피로 전화된다.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전쟁의 잉여로 제쳐져왔던 자신들의 존재를 오롯이 되살리려고 낮은 목소리를 모아 광장에서 외치는 동안, 종군위안부 누드 동영상이 제작된 것은 전쟁의 잉여가 어느 순간 쓰레기가 아니라 부가가치 높은 상품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종군위안부 여성들이 전쟁에서 징발 당했던 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아니라 젖가슴과 성기일 뿐이었노라는 물신화된 이데올로기가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런 가시화 방식은 거대 서사인 역사를 피하고, 공적인 스펙터클로의 현재화를 비켜간다. 가장 개인적인 매체인 모바일 폰을 통해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료 동영상 서비스라는 방식으로 전쟁의 잉여를 소비하려 한다. 여기서 목소리는 필요 없는 소음일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새디즘적 욕망의 페티쉬로 물화시키면서 전쟁의 잉여가 자본의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포획 당한다.

    몇 년 전, 한 유명여배우의 종군위안부를 암시하는 누드 동영상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은 여전히 전쟁의 잉여를 재생산한다. 남성/국가의 무책임은 가려지고, 한 여성 연예인의 생각 없(다고 비난 받)는 육체만 드러난다. ‘공인’으로서의 무책임을 한 여성에게 묻는 공공의 목소리인 언론이나, 공적 인격으로서의 국가가 종군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역사화하지 않는 한, 종군위안부의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죽지 못한 자의 슬픔, 미망인

    미망인(未亡人), 따라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남편이 죽고 홀몸이 된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의 제목이 바로 <미망인>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오랫동안 잊혀졌던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을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가 찾아낸 것도 우연일 수 없다.

       
      ▲ 영화 <미망인>의 포스터

    1997년 여성영화제가 <미망인>을 찾아냈을 때, 영화는 프린트 상태가 아니라 포지필름 상태였다. <미망인>이 만들어진 것이 1955년이니, 무려 42년 만에야 묶여진 봉인이 풀린 것이다.

    딸을 데리고 피난생활을 하는 신은 6.25 전쟁에서 죽은 남편의 친구 이 사장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이 사장의 배려는 어느덧 애정으로 변해가고, 이 눈치를 챈 이 사장의 아내는 질투와 히스테리로 우연히 알게 된 젊은 매력적인 남자 택과 가까워진다.

    그러나 택이 해수욕장에서 익사하려던 신의 딸을 구해주게 되면서 관계가 뒤틀어진다. 택과 신은 동거를 하게 되지만, 이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불안하다. 택은 옛 애인의 추억에서 벗어날 수 없고, 신의 딸은 둘 사이에 거추장스러운 짐이다. 결국 옛 애인을 선택하고 결별을 선언하는 택에게 신은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실 꽃송이 대신 칼을 들이민다.

    <미망인>은 한 남성을 둘러싸고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여성들의 모습을 멜로드라마의 플롯으로 풀어내지만, 신파와 팬터지로 갈등을 봉합하는 대신 징글징글하게 현실적인 파국으로 치닫는다.

    개봉 당시 극장의 팸플릿을 통해 “전쟁을 하고 있는 때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전쟁이 끝난 뒤 역시 싸움터의 탄피만치도 주의를 끌지 않는 그러한 사회에 사는 한 전쟁미망인의 단면을 이 영화는 대담하게 제시하였으며, 사건전개를 예리하게 포착한 박 감독의 사실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는 극작가 조남사의 발언은 <미망인>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미망인’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가학적인 의미는 그 앞에 ‘전쟁’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더 지독해진다. 전쟁이 끝난 뒤에 남겨진 전쟁의 잉여가 현실로 귀환하려 할 때, 그래서 존재의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현실성을 획득하려할 때, 이미 전쟁을 끝낸 남성/사회는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미망인’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한 여성이기를 욕망하는 ‘죽지 못한 자’의 출현은 섬뜩하고 불온하다. 그들은 어디에고 있지만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미망인>은 그토록 오랜 세월 봉인되어 목소리를 잃었던 것이다.

    비동시적 동시성, 전쟁의 잉여

    미군 병사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이라크 여성들은 고향에 돌아가서 제 아비, 오라비의 손으로 명예살인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오래된 괴담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성들이 ‘환향(還鄕)’해서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화냥년’이 되어 내쳐졌던 것처럼, 전쟁이 일어나는 어느 곳에서든 여성들의 수난은 되풀이된다.

    여성들은 아이를 낳고, 아이들은 고아가 된다. 고아가 된 아이들은 <금지된 장난>에서 두 꼬맹이들이 자꾸자꾸 만들어내는 십자가처럼 전쟁과 죽음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 미망인과 전쟁고아는 전쟁기계/남성/국가의 결함을 증명한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전쟁을 지속하는 이 전쟁의 잉여들은 비동시적 동시성의 생생한 증거로 시대를 관통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노래할 수 없고, ‘죽지 못한 자의 불온함’으로 소음을 만들어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래오래 지속되는 이 전쟁은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 전쟁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 전쟁, 몸에 남겨진 전쟁의 잉여, 그러므로 전방위적인 전쟁인 것이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