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부관참시된 최진실
    2009년 06월 11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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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 패소? 그녀는 죽었다. 지난해 가을, 가장 슬프고 외로운 방법으로. 국민 모두가, 전직 대통령도 무엇도 아니었으나 늘 우리 옆에 있었던 그녀를 잃은 슬픔으로 그 가을을 보냈다.

그런데, 죽고 나서 그녀는 자본주의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다. 5년 전, 남편에게 맞은 얼굴의 상처를 언론에 노출한 채 인터뷰했던 행동 등으로, 아파트 모델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이 죽은 그녀에게 내려진 죄목이다.

   
  

돈을 받고 광고했고, 광고주가 모델의 사생활로 인해 기업이미지에 손상을 가져올 경우 2배로 배상한다고 계약했으니, 남편에게 맞아 멍든 사진을 언론에 노출시킨 모델이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건, 자본의 논리로 보자면 나무랄 데 없이 명료하다.

그러나 바로 이 점. 자본주의의 잔인함을 낱낱이 드러내는 단순명료함으로 이 사건은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자본의 논리가 그것을 적시하기만 한다면, 죽은 누이의 무덤을 파헤쳐 간이라도 떼어 파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그 사실에 우린 문득 마주쳐 버리는 것이다.

문득 마주쳤다, 한국 사회의 본질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상식, 도리 따위는 거추장스런 포장지나 되듯 던져버리는, 우리가 지난 반세기 동안 급속하게 익숙해져온 한국 사회의 가장 거대하며 질긴 토대의 본질과.

자본주의는 자기파괴적이다. 그것은 같은 인류를 파멸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파멸시켜 결국 제 뿌리가 썩어가도 정작 썩어서 푹 쓰러질 때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파멸을 계속한다.

건설사는 자신들이 지불한 모델료의 12배에 해당하는 30억 5천만 원을 최진실에게 배상하도록 요구하면서, 계약을 파기한 후에도 그녀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신한건설이라는 회사에 실추될 이미지 같은 것이 있다면, 이번 대법원 판결은 가장 효과적으로 그 이미지를 실추시킬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건설사가 당신 때문에 실추되었다고 호통치며 달려드는 그 ‘이미지’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마치 아파트가 마음 바뀌면 버리고 하나 더 살 수 있는 소비재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아파트 회사들이 너도 나도 미녀 모델들을 내세워 방송이며 신문광고를 하는 광경은 90년대 말부터 가열되기 시작한 한국적 초현실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현상이었다.

분양가 자율화 지역이 확대되면서, 아파트 회사들은 브랜드화를 서둘렀고, 아파트 이미지 광고는 광고시장 20%를 차지할 만큼 비대해졌다. 모든 아파트 브랜드들은 미녀들을 하나씩 내세워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 공간을 경쟁적으로 조작해냈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아파트 원가공가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울 만큼, 아파트 건설업은 서민경제를 압박하는 조폭적인 수준의 폭리를 취하는 사기(詐欺)업이며, 권력을 얻은 노무현이 금세 그 공약을 포기하게 할 만큼, 건설조폭들의 권력은 거대하기도 했다.

아파트는 사기

수십억을 들여 거짓 이미지를 실어나르는 광고를 하고, 입주자들을 주저없이 사지로 내몰고, 도저히 원가를 밝히기 민망한 수준으로 폭리를 취해온 건설조폭들. 그것이 그들의 실체이며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다. 그들이 대법원의 검은 가운을 입고 법의 권위를 빌어 죽은 누이의 어린아이들의 주머니를 갈취하는 것을 ‘합법’이라 부르는 세상에 우린 산다.

가고 없는 그녀, 최진실은 물론 이 모진 자본주의 세상을 열심히, 격렬하게 살아낸 또순이였다. 그녀는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60년대의 가련한 여공은 아니다. 90년대를 CF퀸이라는 영광스런 명예를 거머쥐며 살아냈고, 대부분 한국의 연예인들이 그러하듯, 최대의 수입원에 해당하는 광고를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그리고 우린 해마다 저축상을 타는 최진실을 보았다.

한국사회에서 연예인에 대한 최대의 욕도 “광고 다 끊겨라”이고, 그들의 시세(?)를 입증하는 가장 유효한 기준도 출연 광고의 개수이다. 우리는 묻지 않는다. 그들이 선전하는 보험에 정말 그들도 가입했고, 그들이 선전하는 화장품을 정작 그들도 발랐는지를. 어차피 광고는 대부분 사탕발림이고 소비를 충동질하는 거짓 선동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배우가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가꾸고 또 다른 이미지로 도약하기 위한 내공을 쌓기보다는, 잘 팔릴 때, 최대한 자신의 이미지를 팔아버리는 이 나라의 배우들의 행태에 대해 우린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어야 했다. 그녀에게 한없이 관대하던 그 자본주의는 결국 뒤에서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고, 그래도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던 것을. 이 자기 파괴의 본질을 가진 자본주의는 전설의 고향에서처럼, 죽은 그녀에게까지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서를 날리며 그녀를 괴롭힐 거라는 사실을. 누군가가 죽어도 끝나지 않고 결국 모두가 자멸해 버리고 나서야만 끝나는 한 점 아량도 온정도 없는 호러영화, 그게 자본주의다.

아량도 온정도 없는 호러, 자본주의

광고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불안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아무 의미없는 거짓말을 끊임없이 지어내면서, 스스로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하게 부유하는 현실 속에서 살고자 했다. 그러다가 광고쟁이가 되면서 이건 자신에게 최상의 직업이라고 감탄한다. 어차피 광고쟁이는 거짓말을 하는 직업이라는 것. 현실에 대한 부정과 자기 환멸, 착시와 환각을 거듭하며 꾸역꾸역 이 거짓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안쓰럽긴 하지만 경멸스러운 건 없다.

그러나 이 뻔한 스토리에서, 어차피 자본에 머리를 조아리기는 마찬가지면서, 권위의 옷을 무겁게 걸치고 있어야 하는 사법부의 꼴은 심히 역겹지 않을 수 없다. 이 나라 사법부의 권위가 이미 개밥그릇 속에 들어간 것은 이미 오래전이지만, 그러나 이 같은 이 상황에서 원고 승소의 판결을 감히 내지를 수 있었던 건 노골적인 마초, 조폭정부인 이명박 정부하였기에 가능했던 것 아닌가 싶다.

질긴 대법관 신영철의 이름은, 죽은 최진실에게 손해배상을 명한 이 대단한 판결(주심 대법관 박시환, 대법관 박일환, 대법관 신영철)에서도 보인다. 그도 조폭들과 같이 먹고 사느라 나름 바쁜가 보다.

거대한 건설조폭 패밀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이명박은 22조 원을 퍼부어주기 위해 4개의 강가에 공사를 벌리시겠단다. 그 강들이 모두 썩고 나면 이 긴 파멸의 스토리는 끝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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