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로 둘 수 없다. 살인기계, 언론권력"
        2009년 06월 01일 12: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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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와 관련해 조중동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을 때 순간 망설였다. 어디 어제 오늘 일이던가, 지금껏 해온 말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렇고 그런 말을 부질없이 레코드처럼 또 풀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쓰기로 했다.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무현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을 그대로 두고서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더 추락할지 알 수 없다. 노무현과 같은 비극이 얼마든지 또 되풀이 될 수 있다. 현실의 민주주의는 그들을 넘지 않고서는 결코 진전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검찰’과 ‘언론’의 문제를 새삼 실감하고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 검찰과 언론이 각각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제 말하기 시작했다. 노무현의 죽음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 살인기계와도 같은 검찰 권력과 언론 권력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살인기계와도 같은 검찰 권력과 언론 권력

    검찰 권력에 대해서는 비교적 간명한 답이 나온다. 여론조사 결과는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제도적으로도 그 방향은 오래 전에 나와 있다. 검찰의 기소독점권을 해체하는 방법이 그 하나이다. 사법개혁이라는 보다 큰 틀에서의 접근도 필요하겠지만, 이 정도에 집중해도 될 일이다.

    노무현은 검찰 해체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비극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 점이 적지 않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공개 수사 브리핑을 통한 여론 재판은 바로 검찰을 해체하려 했던 데 대한 검찰 권력의 사적 보복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언론 권력의 문제는 더 복잡하다. 노무현은 <조중동>의 공격을 물리치고, <조중동>에 맞서 대통령이 됐다. 그는 조중동과 싸워 대통령이 됐고, 임기 내내 <조중동>과의 싸움을 계속해나갔다.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중동>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공격과 비방, 그리고 왜곡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조중동>은 한국 사회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이 ‘상수’의 극복 없이는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도, 국민적 통합과 화해를 모색하기도, 보수와 진보의 기우뚱한 균형마저 기대하기 힘들다.

    이제 그들은 한국 사회의 그 어떤 정치집단보다도 강력한 그들의 정치적 주도권을 공공연하게 행사하며, 시민사회의 발언까지도 철저하게 봉쇄하고, 짓밟으려 하고 있다. 자본 권력과 연대하고, 정치권력을 조종해 그들은 한국 사회의 지배 권력으로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무한 증식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안티’ 운동으로는 <조중동>이라는 ‘상수’를 극복하기에 역부족임을 지난 ‘안티운동’의 경험이 잘 보여준다. 반면 그것에 필적할만한 건강한 비판언론, 대안언론의 성장은 더디고, 되레 정치권력과 자본의 공세로 그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그나마 균형을 잡아주던 공영방송은 권력의 수중에 들어가거나 집중적인 견제와 탄압으로 그 역할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 이 정권은 차제에 신문과 방송의 겸영 등을 허용하는 언론 관련법을 강행 처리해 보수 권력과 자본, 그리고 <조중동>에 의한 미디어 주도권 장악을 확실하게 굳히려 하고 있다.

    조중동 ‘상수’ 극복 없이 민주주의 획복 어려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당장은 언론 관련법 강행 처리를 막는 것이 급선무다. 6월은 그 분수령이 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언론권력의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설령 언론관련법 강행 처리가 저지된다고 하더라도 <조중동>의 문제는 고스란히 남게 된다. 시민사회의 비판과 견제, 불매운동만으로는 그들의 폭주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꿔왔던, 그리고 현실적 한계는 있었지만, 그 꿈을 위해 도전했고, 그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끝내는 그 진정성을 ‘극한적인 선택’으로라도 지켜내고자 했던 ‘바보 노무현’의 정신을 되살리자면 적어도 ‘검찰권력’의 문제와 ‘언론권력’의 문제를 분명한 정치적 쟁점으로, 선거 쟁점으로 쟁점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쟁점화를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검찰 권력의 문제는 비교적 간명하다. 언론 권력의 문제는 복잡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논란이 될 때는 어김없이 ‘언론의 자유’라는 방패를 들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여론 조작과 선전 선동의 폐해를 경험했던 독일은 나치에 대한 추모나 지지는 물론 나치에 관한 일체의 기념품 판매나 거래까지도 불법으로 엄단하고 있다.

    정치세력이 나서야

    2차 세계대전 후 그 어느 나라보다도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중시하고 있는 독일이지만,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미디어를 통해 국민들을 오도했던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나치와 나치즘에 대해서만은 그것을 철저하게 규제하고 처벌하고 있다.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반언론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는, 시민사회의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부정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권력의 횡포를 공공연히 지지하고, 나아가 독려까지 하는 언론은 언론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권력화된 흉기다. 그런 반언론적이고, 반민주적인 ‘언론기관’들에 대해서는 시민적 통제가 필요하다.

    이제는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 시민들에게 그에 대한 심판을 물을 수 있는 정치 세력의 등장이 필요한 때다. 상상을 초월하는 뜨거운 노무현 추모 열기에서 그것을 읽어낼 수 없다면, 그런 정치세력에게는 희망이 없다.

    시민들의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언론기관의 횡포’까지를 ‘언론 자유’라는 명분으로 보호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를 위한 ‘언론의 자유’여야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언론의 자유’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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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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