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일 힘들 때는 새끼들 볼 때"
        2009년 05월 29일 10: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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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10월 만도기계 문막공장에 입사했던 전부호씨는 입사 17년차로 위니아만도에서 일하다가 얼마 전, 98년에 이어 두 번째 정리해고를 당했다. 전부호씨에게 들었다.

    군 제대 후 부여에서 농사짓고 있는데 “독신 아들이 농사지으면 어쩌냐”며 어머님이 수소문해서 동네형님이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만도기계에 입사했다. 기계가공, 조양사업부로 입사해 핸들과 바퀴의 축을 연결해주는 자동차 부품을 조립했다. 잔업특근 120시간을 한 후 받은 첫월급이 90만 원 정도, 당시에도 주야간 맞교대였고 같은 공정에 14명이 일했다.

    처음에는 노동조합의 노자도 몰랐다. 부품 들고 가다 기름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져 손가락을 다쳤는데 산재고 공상이고 아무 것도 모르고, 다치고 나니까 일하기 싫어서 회사에 말도 안하고 집에 가버렸다. 동네에서 난리가 나고, 그러거나 말거나 회사 때려치웠다고 놀고 있는데 2주쯤 후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왔다. 회사에서 관리자가 집으로 찾아오고, 어머님이 회사에 안가면 당신이 집 나가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회사에 다시 갔다. 말썽 많은 놈이 노동조합 해서 사람된 거다.

    노동조합 해서 사람된 거다

    사람들은 그때보다 지금이 많이 좋아진 것 같이 말하지만, 내 느낌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현장의 일하는 조건은 비슷하다. 바닥에 기름이 많고, 늘 화학약품 냄새가 난다. 현장이고 작업복이고 기름때가 묻어 있는 것이 익숙하다.

    94년 여름에 야근하면서 깜빡 졸고 있는데 그 당시 직장이 와서 “너 아산 가라” 그래, 일하면서 “아산이 어딘데요?” 하니까 “충청도에 있다” 해서 집이랑 가깝구나 해서 잠깨자마자 바로 가방 싸서 옮겼다.

    언제부터 노동조합을 알았냐면, 아산공장으로 와서 코일반에서 일했는데, 김창한 위원장 시절인데 전환배치를 가장 많이 당한 사람 중 하나가 나였다. 코일반의 그 많은 공정들을 7,8번을 옮기며 안가본 공정이 없다.

    나중에는 화가 났다. 그래서 못가겠다고 했다. 프레스쪽에 마지막에 있었는데 그때 버티면서 싸우고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했다. 대의원이 되었냐고? 떨어졌다. 떨어지면 뭐 어떤가. 그때부터 현장활동도 하고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라고 아산공장에 현장모임도 있었다. 거기 활동도 했다.

    98년에 처음 정리해고 됐을때의 느낌은 “왜 내가 해고되어야 하나?”였다. 당시 노동조합 간부였던 형님들이 무조건 버티라고 해서 버티다가 어느날 보니까 나혼자 남아 있더라. 대부분이 투쟁 과정에서 희망퇴직 쓰고 나갔다. 최종적으로 마지막까지 남아서 복직 합의된 사람이 14명이었다.

    "해고자 명단에 이름이 있었다. 다행이다"

    2009년의 정리해고가 98년의 정리해고와 다른 점은, 우리는 투기자본 문제를 이미 2001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다. 처음에 딤채가 매출이 늘어날 때는 몰랐는데 외환은행을 비롯한 투기자본 문제가 신문에 나고, 우리 회사도 그렇다는 것을 2001년에 이미 알았다.

       
      ▲ 금속노조 위니아만도지회는 해고자의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서울 상경 시민선선전 및 1인 시위를 전개했다.(사진=이은영 기자)

    두 번째 정리해고 당한 후의 느낌은 ‘회사가 순서대로 하는구나.’ 어차피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투기자본이란 단물 다빼먹고 마지막에는 인원조정해서 한 번 더 빼먹고 망하든 말든 내빼는 게 투기자본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나는 해고자 명단에 들어가서 싸우는 것이 우리 투쟁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해고자 명단에 이름이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투쟁하며 좋았던 것은 명단발표 후에도 조합원들이 스스로 머리띠 묶으며 열의를 확인하며 함께 했다. 그때가 가장 좋았고 시간이 흐르며 이탈하는 조합원들이 생겨서 마음이 아프다.

    4월 16일 집행부에서 43명의 우선 복직을 합의했다. 조합원들은 불안하고, 50명의 남은 조합원들은 어떻게 할 건지. 일단 정리해고된 93명이 모두 ‘정리해고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정원투)’를 구성해서 전원 복직까지 함께 싸우기로 했지만, 그래도 불안하다.

    솔직히 43명이 온전히 복직될지도 불안하고 나머지 50명 포함해서 전원복직 요구하고 싸우면 지금까지 위니아는 비정규직이 없었는데, 식당, 경비 포함해서 현장의 라인까지, 전원복직과 비정규직 받는 문제를 바꾸자고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 살자고 비정규직을 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우리가 뭉쳐서 싸워야 하는 것 뿐 아니라 앞으로 어떤 수로 회사가 공격해 올지 예상하면서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어려운 건 사실이다.

    지금 현재의 정원투 동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이다. 흔한 말로 ‘나를 믿고 동지를 믿고’ 그런 말처럼. 집행부 역시 잘못된 게 있다고 조합원들이 말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끊임없이 자기들의 정당성만 말하면 오히려 조합원들과 멀어진다.

    금속노조 충남지부와 지역동지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모두 끝나지 않은 투쟁이라고 말하는데, 끝나지 않은 투쟁 힘차게 하려면 지역 총파업을 염두에 두고 위니아뿐 아니라 여러 사업장의 요구를 모으면서 지역 총파업을 준비하며 투쟁을 조직했으면 좋겠다.

    제일 힘들 때는 새끼들 볼 때

    제일 힘들때는 새끼들 볼때. 7살 4살이다. 형수님 소개로 결혼했다. 아내는 열심히 싸우라고 한다. 아내에게 쪼끔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다. 나를 믿고.

    고등학교때 내 꿈은 고물상을 하는 거였다. 그냥 공터에 온갖 물건 모아놓고 놀면 재밌을 것 같았다. 지금은 힘 닿는 데까지 이 공장에 다니다가 퇴직한 후에는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든지, 크레인 자격증 있으니까 쪼그맣게 사업을 하든, 그러고 싶다.

    다시 복직할 수 있을까? 조합원들이 두 번 정리해고 되었다고 놀리면 “야구에서도 세 번 스트라이크여야 아웃인데 이제 두 번 정리해고 되었다. 다시 복직되면 10년 후에 정년퇴직하기 전에 한 번 더 정리해고 되는 것이 가능하다” 고 말하고 웃는다.

    언제, 어떻게 복직될지 어떻게 알겠나. 93명 원직복직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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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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