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빼앗긴 광장, 빼앗긴 민주주의
        2009년 05월 28일 11:22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27일에 덕수궁 앞 시민 분향소에서 전경버스를 뺀다는 보도가 나왔다. 당연히 조문하려는 시민들이 시청 앞 공간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저녁 때 시민 분향소에 가보니 웬걸. 달라진 게 없었다. 단지 시민 분향소를 둘러싸고 있던 전경버스의 벽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버스가 있던 자리엔 전경들이 지키고 서있었다. 비좁은 덕수궁 앞은 여전히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시민의 공간인 시청 앞 광장을 공권력이 점거하고 있는 상황에 변화가 없었다. 시민은 단 한 명도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경찰이 길까지 완전히 봉쇄하는 바람에 시청역 광장 출구에서 덕수궁 횡단보도까지 가기 위해 을지로 방면으로 광장 전체를 빙 돌아가야 했다.

       
      ▲ 사진=손기영 기자

    광장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공권력이 광장을 점거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점거하고 있는 것과 같다. 광장에 모일 자유마저 박탈된 상황에서 헌정질서가 유지된다고 할 수 있을까?

    미어터지는 정동길

    바로 길 건너에 있는 드넓은 광장이 텅 비어있을 때, 덕수궁 뒤안길인 정동길은 미어터졌다. 조문객들이 전경을 피해 그리로 몰렸기 때문이다. 덕수궁에서 경향신문 방면으로 가려면 상당한 곤란을 겪어야 했다.

    꼬불꼬불 길게 늘어진 조문객들의 줄도 여전했다. 지하철역에서부터 청계천 방면과 동화면세점 방면으로 이어진 줄도 여전했고, 정동길로 뻗어나간 줄도 여전했다.

    지난 24일 오후 6시경엔 정동길로 뻗어나간 줄이 덕수궁을 끼고 돌아 덕수궁 뒷담에까지 이르렀었다. 27일 오후 10시경엔 그 수준이 아니었다. 정동길을 완전히 관통해 스타식스 극장까지 줄이 이어졌다. 거기서 다시 전경이 길을 막아, 줄은 횡단보도를 건너 서대문 방면으로까지 뻗어나갔다.

    이게 다 공권력이 광장을 점거했기 때문에 국민이 겪은 불편이다. 조문객들에게 몇 시간씩 길바닥에 외롭게 서서 기다리는 고통을 국가가 강제한 것이다. 이건 국민에 대한 린치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모습들 중 하나로 기록될 일이다. 그걸 우리가 당대에 겪고 있다.

    빼앗긴 광장

    공권력의 광장 점거는 이번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5월1일 노동절 때도 그랬다. 노동절은 산업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날이다. 과거 농업국가 시절엔 농민을 국가의 근본이라 했다. 지금은 노동자가 국가의 근본이다. 노동절은 바로 그런 국가의 근본을 되새기는 날이다.

    한국은 지금 그 근본이 흔들리고 있다. 노동소득도 상대적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고, 노동자의 처지도 불안해지고 있으며, 사회적 위상도 하락하고 있다. 민생파탄이다. 국본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당연히 노동절엔 한국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광장인 서울광장에서 노동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됐어야 했다. 그것 때문에 시청 앞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 노동자는 없었다. 나를 맞은 건 광장을 점거한 전경버스와 전경들이었다. 서울광장은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었고, 몇몇 시민들이 한가롭게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 요구는 원천봉쇄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시민이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를 분출하는 정치체제다. 하지만 한국의 대표적 광장은 정치를 거세한 채 페스티벌과 한가로운 여흥의 용도로만 쓰이고 있다. 국민을 우중으로 만들려고 작정했나? 결국 노동절 다음날 페스티벌 현장에 진입한 시위대는 무차별 진압을 당했다.

    노동절에 전경은 사진을 찍는 내 카메라를 손으로 막기까지 했다. 국민의 입을 막는 것으로도 모자라, 눈까지 막으려 했던 것이다. 물리적인 광장뿐인가? 인터넷 광장에서의 정치적 발언까지 압살당하는 분위기다.

    또, KBS기자협회는 최근 보도본부장이 정부에 비판적인 조문객의 인터뷰를 빼라는 지시를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물리적인 광장과 가상 광장, 그리고 TV에서까지 국민의 입과 눈을 막아가고 있는 것이다.

       
      ▲ 노동절날 내 카메라를 막으러 다가오던 전경의 손 (사진=하재근)

    민주주의 정도가 아니라 물질적 불이익을 당한다

    강자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들에겐 매체가 있고, 엄청난 예산을 활용하는 연구집단이 있고, 유학을 보내 키워낸 지식인 집단이 있다. 이들에겐 광장이 아쉽지 않다. 얼마든지 자신들의 이익을 주장할 언로를 확보할 수 있다.

    광장이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와 서민들이다. 이들은 광장에 모여 큰 소리를 치는 방식이 아니고선 사회에 목소리를 낼 방법이 없다. 이익을 지켜낼 방법도 없다. 툭하면 반복되는 공권력의 광장 점거는 이들에게서 발언권을 앗아가는 짓이다. 이번엔 시위가 아닌 조문인데도 막음으로서 한국의 광장이 완전히 닫혔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줬다.

    특정정치세력의 이해관계나, 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일반 서민의 입이 막힌 다음 찾아올 것은, 일반 서민의 물질적 피해다. 광장 폐쇄는 필연적으로 소득분배를 악화시키고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또, 향후 민생파탄이 더 심화되더라도 광장이 폐쇄된 상태에선 국민이 어디 하소연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평화롭게 조문할 자유조차 막힌 나라에서 무엇인들 가능하겠는가. 꽉 막힌 광장, 꽉 막힌 국민의 입. 여름이 더울 것 같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