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모하고 되찾을 건 민주주의다
        2009년 05월 26일 05: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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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1월 22일.

    신문에 "이태왕 전하가 중환’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다. “1월 21일 새벽 1시 반에 발병하시어 모리야스(森安)박사의 검진결과 뇌일혈로 밝혀졌고, 이후 6시35분에 중태에 빠지셨다.”

    아침부터 경운궁 대한문과 포덕문 앞으로 인력거와 자동차가 북적였다. 비보를 접하고 창황히 달려온 사람들이 궁중을 바라보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오전 10시 가량부터 모여든 사람들은 정오가 지나고 오후가 될수록 점점 많아졌다.

    1월 23일 아침에는 고종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신문 호외가 뿌려졌다. 그 전날에 몇 배되는 사람들이 대한문 앞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를 넘자 사람들이 더욱 모였다. 각 조합 기생들도 떼를 지어 와 눈물을 뿌린다. 기마 순사가 여기저기 경계를 서며 이들을 지켜본다.(<매일신보>, 1919. 1.22 2면 , 1.23 3면, 1.24 3면)

    2009년 5월 23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노무현 전 대통령 건강 이상”이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이어 “자살을 기도”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잠시 후 “노 전 대통령 사망”이라는 기사가 속보로 올라왔다. 곧 “노무현 前 대통령 서거”가 뉴스 특보로 알려졌다.

    2009년 5월 24일 오후, 시민들이 마련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임시분향소에는 오전부터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조문객들로 붐빈다. 유모차를 끌거나, 자녀들 손을 잡고 가족 단위로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은 대한문에서 서울시 의회까지 300m가량 늘어선 길을 2시간 정도 기다리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한다.

    조문객들은 4명씩 분향과 헌화를 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경찰들은 서울광장을 통제하고, <동아일보>·<조선일보> 방면을 경계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박상규·권우성기자, "국민들 추모행렬에 물대포 대기하다니", <오마이뉴스>, 2009년 5월 24일 오후 5시)

    민족엘리트의 명분과 민중의 마음

    과거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고종의 죽음을 ‘운동’의 역사적 배경 중 하나로만 평가했다. 오히려 강조된 것은 ‘민족대표 33인’이나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2.8 동경 독립선언’ 등이었다. ‘민족’ 엘리트들에게, 그리고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게 ‘3.1운동’은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 수립에 결정적인 명분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들의 마음을 흔든 것은 고종의 죽음이었다. 사람들은 독살설, 자살설 등의 풍문 속에서 고종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였다. 황제권을 지키기 위한 권신들과의 권력투쟁, 일본과 청의 간섭에 대한 무능함은 그와 분리되었다. 고종은 추모의 대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조선인이 되었다. 고종은 지금과는 다른 그때, 즉 ‘안락한’ 과거를 상징하는 표상이 되었다.

    고종을 표상화시킨 것은 이 무렵 심각했던 민중의 생활난과 고통이었다. 1919년 초 농산물 가격은 유례없이 폭등하였고, 소작료는 상승했다. 일제 식민당국에 의해 각종 세금령이 “비처럼 쏟아”졌다.

    민중들 사이에는 원성과 불신이 가득해졌지만, 중류 이상의 지주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요컨대 식민통치는 부자를 더욱 부유하게, 빈자를 더욱 빈궁하게 만들었다. (「조선헌병대장보고서」, 市川正明 편, 󰡔3·1독립운동󰡕 3권, 原書房, 1984, 229쪽)

    그로부터 정확히 90년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서조작설, 정치적 타살설이 나도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노무현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추진은 그와 분리되고, 그는 인간성, 진보, 정의를 상징하는 표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표상화 작업에는 ‘진보 인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과 정책을 구분”하자고 한다.

    그렇다. 그는 ‘바보’이자, ‘승부사’였다. 사회의 역경을 정면으로 맞서려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는 몇십 년의 정치역정 속에서 사회적 관념을 정면으로 버텨냈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는 스스로 온 몸을 던짐으로써, 인생 최대의 ‘승부’를 돌파했다. 요컨대 그는 죽음으로써 자기가 잃어버렸던 가치들의 표상이 되었다. 

    추모해야할 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민주주의다.

    "그래도 옛날 대통령들보다는 낫잖아요." “그 시기가 지금보다는 나았던 것 같아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모되는 방식은 대조적인 쌍으로서의 시간의식이다. 그 또는 이른바 그의 시대는 나쁜 과거에 의해 긍정되는 과거, 혹은 나쁜 현재에 의해 부정된 좋은 과거로 표상된다. 사람들은 과거의 표상인 그를 추모함으로써 지금의 불만을 해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표상화시킨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추모는 이제 충분하다. 더 이상 그의 ‘인간주의적’ 면모를 그리워하고, 그를 “좋아했다”고 ‘고백’하지 말자. 우리가 향유하였던 무엇이 ‘노무현’을 그리워하게하고 좋아했다고 하게 하는지 생각해보자. 무엇이 유서조작설, 정치적 타살설 등 각종 풍문을 퍼트리게 하는지 생각해보자.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생활난과 고통 때문이다. ‘잃어버린 1년’ 동안 물가는 ‘세계 금융위기’를 명분으로 전 부문 폭등했고, 임금은 동결되거나 하락했다. 아이들은 ‘일제고사’를 통해 무한경쟁에 돌입했으며, 수 천 만원의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의 취업률은 바닥을 맴돈다.

    반대로, 개발과 환차익을 통해 일부 부유층들이 더욱 부유해지고 있다. 요컨대 지금의 정치가 부자를 더욱 부유하게, 빈자를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들이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난과 고통 때문에 사람들이 절망하진 않는다. 절망은 희망이 사라졌을 때에 나오는 패배주의적 감정이다. 그렇다면 희망은 무엇으로부터 나오는가. 바로 믿음이다. 비록 뇌물을 받았을지라도,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죽음으로 그 수치심을 갚았던 죽은 ‘제갈량’은 산 ‘사마의’를 이겨버렸다.

    앞으로도 생태계를 파괴하자면서 녹색운동을 할 것이라고 거짓말만 되풀이 하거나, 누군가 죄가 있어도 물러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정부를 불신할 것이며 ‘미네르바’는 계속 출현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생활난과 절망 속에서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있다는 점이다. 4대강 살리기 사업, 방송법 개정, 용산 참사 등 작년 촛불집회 이후 1년 여간 정부가 시행한 모든 사업들은 일방적인 결정과 강행 그리고 사람들의 용인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정부는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철저한 수색과 탄압으로 그들의 입과 생존을 ‘원천봉쇄’했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노무현’을 그리워하게하고, “좋아했다”고 ‘고백’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우리가 향유하였던 민주주의 때문이었다.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민중에게로

    추모해야 할 대상은 노무현이 아니다. 바로 민주주의다. 우리가 향유했던, 우리 속에 살아 숨 쉬었던 민주주의를 추모하자. 믿음을 추모하자. 희망을 추모하자. 왜 우리는 절망 속에서 우리가 향유하였던 것을 포기하고 있는가.

    그들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이다. 이제 우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속에서 계승하고 극복해야 할 것은 바로 민중들이 주인되는 민주주의다.

    언젠가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그 발언은 그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발언이었다. 과연 권력이 어쩔 수 없이 재벌에게 넘어간 것일까. 아니, 그것은 그의 인식이 재벌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이 모두 재벌의 경제연구소에서 나온 보고서들로 이루어졌기에, ‘서민 대통령’이 되겠다던 그는 FTA를 추진하며 암묵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권력을 ‘시장’에게 넘겼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경제주의가 대한민국을 지배했다. 이명박을 낳은 것은 노무현이었다.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민중에게 있어야 한다. 재벌이나 소수 엘리트들이 아니라 이 땅의 서민들에게 넘어가야 한다. 민중의 민주주의적 소통과 의사결정을 통해 권력이 집행되어야 한다. 선거를 기다릴 것인가. 이미 선거는 국민들이 권력을 지도자에게 넘기는 ‘합리적’ 절차가 되었을 뿐이다.

    촛불집회 때 유행했던 노래의 한 소절은 우리들에게 이 시대의 문제가 정말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1919년 3월 중순, 고종에 대한 추모는 지방 민중들의 폭력적이고도 자발적인 봉기들로 전환되었다. 3·1운동은 전혀 ‘평화적’이지 않았다. 민중들은 면사무소, 헌병경찰관 주재소, 우체국 등을 습격하였고, 일제의 군대와 경찰에 쫒기면서도 악희, 즉 저항의 놀이를 계속하였다.(「조선헌병대장보고서」, 市川正明 편, 『3·1독립운동』 3권, 原書房, 1984, 253쪽)

    복수의 민중들이 따로따로 갖고 있던 식민 지배자와 ‘무단통치’에 대한 수많은 불만요소들이 이 시기 하나의 전쟁으로, 요컨대 조선 민족과 식민 지배자인 일본과의 대결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1919년 3월의 봉기들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더 광범위하고 일반화된 민중봉기들을 가능케 한 요소들이었다. 2008년의 촛불집회야말로 그 지향이 아무리 불완전한 것이었을지라도 저 전투적 민중봉기들의 ‘전통’을 재인식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모이고, 퍼트리고, 외쳐야한다. 모인다는 것. 퍼트린다는 것. 외친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는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주었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권력을 시장에서 되찾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90년 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인터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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