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밀 투쟁은 계속된다
        2009년 05월 25일 11: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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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넘게 지속되온 타밀 독립 투쟁이 큰 분기점에 있다. ‘타밀 일램 해방 호랑이’(Th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이하 타밀 호랑이)가 5월 16일 패배를 인정했다.

    즉각 라자파크사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이 끝났다"고 공식 발표했고. 2천만 스리랑카의 다수 인종 ‘싱할레스’ (Singhalese, 인구의 80%)는 승리를 자축했다 10만 명 타밀들이 그 긴 투쟁 속에 목숨을 잃었고. 60만 명의 타밀이 ‘국제 난민’으로 세계 곳곳에 흩어졌다.

    인종 갈등

    아주 오래 전부터 싱할레스와 타밀은 ‘실론섬’에서 같이 살았다. 16세기에는 포르투칼, 17~8세기에는 네델란드 식민지였다. 포르투칼과 네델란드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싱할레스와 타밀을 ‘분리 지배’했다. 19세기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은 ‘분리 지배’대신 ‘통합 지배’를 택했다.

       
      ▲ 가두 시위 중인 타밀 (사진=김병기) 

    싱할레스와 타밀의 인종적 갈등은 영국이 떠나자 더욱 깊어졌다. 1948년 싱할레스는 1백만 타밀들의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1956년 ‘싱라라’ (Singlala, 싱할레스 언어)만이 실론의 공식언어로 인정되었다. 1972년 싱할레스는 타밀 참여를 배제한 채 국가 이름을 ‘실론’(Ceylon)으로부터 ‘스리랑카’(Sri Lanka)로 변경했다. 그 이후 싱할레스 지배계층은 "스리랑카는 싱할레스만의 나라"라는 자극적인 발언들을 해댔다.

    1977년 타밀82%의 지지로 ‘타밀 독립 결의안(Resolution for Independence)’이 채택되었다. 초기 타밀 독립 투쟁 노선은 ‘비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검은 칠월’(Black July)이 전환점이 되었다. 1983년 7월 싱할레스 폭동이 발생했다. 3천 명의 타밀들이 살해되었고 2만 채의 타밀 집들이 파괴되었다. 수 많은 타밀들이 도망치듯 스리랑카를 떠났다.

    타밀의 정서가 비무장 투쟁에서 무장 투쟁으로 옮겨졌다. 무장 투쟁의 선봉인 타밀 호랑이가 스리랑카와 해외 타밀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타밀 독립 투쟁의 중심 세력으로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인종 학살

    싱할레스 군대의 ‘무차별 집중 포화’로 지난 몇 달 동안 1만 명의 타밀들이 살해되었다. ‘타밀 호랑이’의 자치 영역이었던 스리랑카 북/동쪽 지역을 싱할레스 군인들이 점령했다. 소수 인종 타밀(Tamil, 인구의 20%)은 ‘삶의 자리’를 잃었고 35만 명 타밀이 강제 수용소에 갇혀 있다. 결국 ‘타밀 호랑이’는 무기를 내려 놓았고 타밀은 울었다.

       
      ▲ 퍼포먼스 중인 타밀 청소년들 (사진=김병기)

    5월 23일 12시 ‘자유, 평등, 정의, 독립’ 투쟁으로 숨진 타밀에 대한 묵념으로 ‘호주 타밀 청년회’(Tamil Youth of Australia)와 ‘전쟁 중지 연합’(Stop War Coalition)이 공동 주관하는 가두 시위가 시드니 ‘마틴 플레이스’에서 시작되었다. ‘독립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다짐하는 1천 5백 명 타밀은 애도의 표시로 검은 옷을 입었다. 검은 띠를 둘렀다. 검은 깃발들이 펄럭였다

    "많은 타밀들이 죽어서 슬프다"는 조샤나 제콥(9)과 "식량과 의약품이 절대 부족한 강제 수용소에 갇혀있는 타밀이 걱정된다"는 조엘 제콥(10)은 ‘전쟁 범죄를 조사하라’는 피켓을 움켜 잡고 있다.

    호주 타밀 청년회’(Tamil Youth of Australia) 대변인 에드란 프란시스(19)와 타밀 시위 주최자 모한 라잔(25)은 이구동성으로 "35만 명 타밀의 자유로운 이동, 식량과 의약품 즉각 반입, 외국 언론 취재 허용, 타밀 난민 신청 허용, 전쟁 범죄 진상 조사, 타밀 독립 보장" 등을 위해 국제 사회가 앞장서서 노력해 줄 것을 힘있게 요구했다.

       
      ▲ 에드란 프란시스와 모한 라자 (사진=김병기)

    국제 사회가 공범

    해외 타밀들은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촛불집회, 단식투쟁, 가두 시위 등을 통해 ‘타밀 학살 중지’와 ‘휴전 협정’을 국제 사회에 끊임없이 호소했지만 결과는 ‘소귀에 경읽기’였다. 몇 달 사이에 1만여 명의 타밀인들이 침묵 속에 처참하게 살해되어도 국제 사회는 냉혹하게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탐욕스런 ‘자국 이익 우선’ 때문이다.

    무기 판매와 아시아 지배를 위한 인도양 장악이 목표다. 인도양은 세계 석유의 40%를 생산한다. 세계 유조선의 50%가 인도양을 항해한다. 인도양의 지정학적 요충지인 스리랑카 항구를 이용하기 위해 미국, 이스라엘, 인도는 경제원조, 군사정보, 군사훈련을 제공했다. 중국과 영국은 막대한 무기 수출로 스리랑카 군사력 강화에 이바지했다. 2006년 서방 세계는 타밀 호랑이를 ‘테러리스트 조직’으로 낙인찍고 모든 관계를 끊었다.

    미국 일리노이스 대학 프란시스 보일 교수가 정확하게 표현했다. "유럽 국가들과 미국이 라자파스카에게 타밀 호랑이를 파괴하라는 파란등(the green light) 신호를 주었다"

    자유의 투사

       
      ▲ 샘 파리 박사

    그래서 타밀은 분노한다. "국제 사회는 타밀 보호에 실패했고, 스리랑카 정부의 타밀 학살 공범"이라고 비판하면서 "타밀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고 우리의 독립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독립만이 유일한 해결"이라는 샘 파리 박사(시드니 타밀사회 대변인, 26세)의 연설은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타밀을 살해한 사람들이 테러리스트다. 스리랑카를 지지하는 것은 인권에 반하는 불법"이라는 변호사 필립 볼텐의 연설에 환호를 보냈다.

    "타밀 호랑이는 자유의 투사(Freedom of Fighter)"라는 거친 함성이 타운 홀 가두 행진 중에 줄기차게 울려 퍼졌다. ‘타밀호랑이’가 ‘테러리스트’가 아님을 항변하는 것이다. 행진 대열속의 40대 여성 마도나 제콥은 "타밀 호랑이와 타밀은 하나"라고 확신있게 말하면서 "타밀 학살로 본인은 이모와 삼촌을, 남편은 형제를 잃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우울했던 날씨가 햇살을 뿌리더니 가두 행진이 끝나자 비가 내렸다. 빗줄기가 계속 거세졌다. 타밀과 하늘이 같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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