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예종은 황지우가 아니다"
        2009년 05월 25일 09: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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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이 글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의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감사처분을 둘러싼 사태에 대해 한 명의 졸업생으로서 입장을 전하기 위한 글이다. 글을 쓰던 도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보를 들었다. 그는 지난 4월 22일 마지막으로 자신의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며 이렇게 전한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그의 자살은 단순히 어떤 가치의 상징이었던 인물의 죽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이 자기 삶 속에서 치열하게 만들어 가고자 했던 자기만의 가치와, 이미 ‘노무현’이라는 이름으로 단박에 정리되어버리는 가치 사이에 서 있던 그의 고민과 갈등을 보여준다.

    나는 굳이 이 시점에 고인의 과거를 들추며 각을 세울 필요는 없겠지만, 생전에 지지하지 않았던 인물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하나의 표상으로 불리기엔 지나치게 자기 윤리에 충실했다. 그의 윤리에 동의하건 아니건 이제야 비로소 나는 그의 죽음을 아파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1.

    어떤 가치들은 누군가의 이름으로 대변된다.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의 이름이 어떤 가치를 대신하게 되기까지는 그가 그 가치를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직접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통해서만 그들은 하나의 ‘이름’이 된다.

    그렇지만 이름을 부르는 우리에게 그것은 손쉬운 일이다. 이를테면 (죄송스럽게도 다시금 그 이름을 들먹이자면) 우리가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혹은 좌빨을 ‘노무현’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하게 불러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자기 몸을 부딪히며 실천함으로써 구체화시키고 체득하는 대신, 손쉽게 그 안의 미세한 차이들을 뭉뚱그려서 외부의 누군가의 이름으로 재현해 버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쌓아 온 가치를 타인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대화의 장에 나서기 보다는, 표상된 이름과 또 다른 표상된 이름을 불러내어 둘 사이의 전선에서 한 쪽 편에 서는 편이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

       
      ▲ 사진=한예종 학생 비상대책 위원회

    2.

    ‘이론과 축소 및 폐지, 서사창작과 폐지, U-AT사업 전면 중단’을 골자로 하는 문화부의 감사결과 시정 요구가 있기 전에도 문화부의 한예종 감사는 “먼지 날 때까지 터는” 표적감사라는 의혹이 있었다. 이것은 현 정부 출범 초기부터 있었던 지난 정부의 코드인사 척결 과정, 다시 말해 황지우 총장을 비롯한 소위 좌빨 교수진들에 대한 압력으로 읽혔다.

    여기에 일부 사립 예술대 교수들이 득달같이 숟가락을 얹으면서 사태는 한예종에 그리 만만하게 돌아가고 있지는 않다. 마침내 ‘예술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담은’ 문화부의 감사결과가 나왔고, 황지우 총장은 총장직 사퇴로 응수했다. 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적실히 알려, 언론의 보도와 학생과 교수 및 교직원들의 대응이 이루어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황지우 교수의 총장 사퇴는 즉각 하나의 표상으로 구축되고 있다. 사태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각종 게시판과 개인 블로그에 시인 황지우의 시를 옮겨 싣기 시작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이 아름다운 시는 한편으로는 분명 황지우 총장의 사퇴와 맞물려 이 사태의 부당함을 알리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지금 이 시의 유포는 한 명의 개인이 총장직 사퇴를 통해 알리고자 했던 ‘현재’의 문제와 국가주의와 독재에 항거했던 ‘과거’의 시적 실천을 비판 없이 중첩시켜 버린다. 이 과정에서 한예종이라는 학교는 마침 총장이기도 했던 시인 “황지우”의 이름으로 치환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표상이 등장한다. 이번 사태에서 한예종을 옹호하는 주요 논리 중 하나인 한예종의 교육성과이다. 그 교육성과란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국제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이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상식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한 학교의 교육이념과 그에 따른 교육과정을 단순히 수상경력으로 귀착시킬 수 있을까. 그보다, 트로피의 개수로 수준 높은 한예종의 교육 시스템을 자랑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더욱이 내가 아닌 누군가의 ‘성과’로 이 학교의 성과를 운운하며 나는 우리 학교를 옹호해도 괜찮은 것일까.

    3.

    이 상황이 더없이 우려스러운 것은 현 정권이 1년 반 동안 개별 주체들의 목소리를 하나의 표상으로 뒤덮어버리려 했던 것을 목도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수십만 명, 심지어 백만 명이 한 달 내내 거리에 모여 치열하게 토론하며 함께 서로의 가치에 대해 토론했던 것을 ‘배후’라는 모호한 실체로 표상하고 순식간에 우리를 동원된 군중으로 간단하게 정리하려는 시도를 보았다.

    지난 겨울 용산에서 목숨을 잃었던 철거민들은 또 어떤가. 정부와 보수언론은 삶의 끄트머리에서 최소한을 요구했던 철거민의 목소리가 불에 타 들어간 자리에 전철연이라는 표상을 놓았다. 그들은 철거민 개개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표상을 세우고서 표상을 단죄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황지우’ 혹은 그 수많은 ‘트로피’가 대신해버린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여기서 정말로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옹호 논리로 너무나도 쉽게 말해지는 ‘교권(校權)’ 속에 있는 미세한 차이들은 과연 무엇인가.

    당신들이 좌파 빨갱이라 이름붙이고 단죄하고 처벌하고자 하는 인물들, 혹은 우리가 옹호하고 지켜가고자 하는 이름들, 바로 그 뒤에 은폐되어 있는 수백 수천의 개별적 가치들은 과연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타인의 이름, 상징과 표상으로써 지켜진 학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4.

    그래서 감히 이야기한다. 한예종은 황지우가 아니다. 한예종은 국제 콩쿨 수상 경력도 아니고, 심지어 석관동과 서초동에 교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예술학교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한예종은 오히려 다수의 한예종이다.

    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더 훌륭한 연주를 하기 위해, 아름다운 몸짓을 창조하기 위해, 그런 시각적 순간들을 포착하기 위해, 새로운 전통을 창출하기 위해,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배움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몰입하며 자기만의 가치를 체득해 가는 한 사람 한 사람 인간들을 가리킨다.

    바로 그 수천의 한예종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수백의 학교 정규직과 계약직 노동자들이, 그리고 수십의 교수와 강사진이 각자의 가치를 쌓아가며 서로 대화하는 ‘과정’, 그것이 한예종이고, 내가 그곳에서 2년 간 배웠던 자랑스러운 가르침이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일반’으로 뭉뚱그려지지 않는 개별적 존재로서 나 자신, 타인이 아니라 내가 나로서 체현하고자 하는 가치, 그리고 그 가치의 현현이자 소통의 무기로서 예술. 우리가 어떠한 이름에도 기대지 않고, 온전히 우리가 스스로를 표상하며 대화해 나아갈 때,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승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들은 더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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