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삶이 이룬 것과 그의 죽음이 남긴 것
    2009년 05월 27일 02: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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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에 온 국민이 커다란 충격을 받고 깊은 슬픔에 잠긴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참극을 보고 듣고 겪은 것이 우리 국민들이지만, 1년 3개월 전까지 국가원수의 자리에 있던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고는 차마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유린당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그가 다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던 데에 아픈 공감이 간다. 투박하고 격정적인 평소의 말투와 달리 간결하고 정제된 문어로 씌어진 그의 유서는 결심에 이르는 과정이 거의 종교적인 고뇌의 시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스스로 선택한 가시밭길

다들 알다시피 노무현의 삶은 역경 속에서 시작되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상고를 마친 것이 학력의 전부라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가 고향 가까운 도시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편안하게 사는 길을 택했다면 그의 인생행로는 진부한 성공담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고, 빈약한 학벌은 도리어 성공을 빛내는 후광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1년 9월 소위 ‘부림(釜林)’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그는 인권·정의·민주주의 같은 보편적 가치들과 연관된 활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것이 결정적인 전기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그는 우리시대의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의에 도전하는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후일 노무현은 대선출마를 앞두고 간행한 <여보, 나 좀 도와줘>라는 자서전적인 책에서, 자신이 부림사건 때 법정에서 학생들의 고문사실을 폭로하고 그로 인해 검사의 협박을 받지만 더욱 열렬하게 변론투쟁을 벌여나가게 된 일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 된 이후 어떻게 권력을 유지해나가는지 알기나 하시오? 지금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이 죽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검사의 그 협박은 오히려 나의 투지에 불을 붙여놓았다. 그 일 이후 나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격앙된 상태에서 일을 진행했다. 대단히 정열적으로 사건에 매달렸다. 법정에서도 사사건건 싸웠다.

‘바보’의 노선을 걸은 투지의 정치인

아마 여기에는 노무현의 생애를 관통하는 정신과 태도가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검찰권력의 협박에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투지를 불태웠고, 출세의 유혹 앞에서도 소신을 버리지 않았다.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물불 안 가리고 돌진하는 외곬의 열정은 그를 국회에서 ‘청문회 스타’로 만들기도 했지만, 거꾸로 그를 정치판의 주류에서 밀어내고 여러 차례 선거에서 패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인권운동을 거쳐 정계 투신을 계기로 이제 그의 모든 개인적 조건들은 그가 처절하게 싸워서 극복해야 할 멍에로 되었다. 그의 고졸 학력은 학벌사회의 강고한 장벽에 번번이 부딪쳤고, 그가 속한 지역적 기반은 지역 맹주의 불의한 선택과 충돌했으며, 그의 언행에 일관하여 표출된 정의감은 기득권세력이 증오하는 표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거나 굴복하는 대신 고집스럽게 ‘바보’의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이 바보스러움은 사람들 가슴에 하나둘 전해져 점점 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눈에 보이지 않게 이어진 이 진실의 연대가 노무현의 정치적 자산이자 유일한 무기였다. 이 무기를 가지고 그가 극적인 과정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에 선출된 것은 그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살아 있는 신화였다.

현실과 이상의 불일치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상을 추구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거기에는 당연히 막중한 책임이 따르며, 수많은 사회집단들의 상반된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앞으로 끌고나가는 통합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노무현의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이 칼럼의 한계를 넘는 역사의 몫이다.

물론 사람마다 그를 기억하는 방식에 큰 편차가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되어 발견한 냉엄한 현실이 재야운동가 시절의 소박한 인식과 일치하지 않는 수가 많았다는 점일 것이다. 자신의 정책방향을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형용모순적 개념으로 표현한 것은 어쩌면 현실정치인 노무현의 이러한 딜레마를 나타낸 것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는 충분히 ‘준비된 대통령’이라 하기에는 어설픈 구석이 많았다. 임기를 마칠 무렵 그는 "부동산 빼고는 꿀릴 게 없는데…"라고 자평했지만, 제때를 놓친 규제의 연발 때문에 오히려 집값 땅값이 뛰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경제 살리기’란 구호의 사술(詐術)에 속아 넘어가게 만든 것은 앞으로 따져볼 일이다.

그러나 이런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고위 자리에 있을 때조차 권위주의의 타파에 앞장섰고, 보수신문의 표독한 공격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도 언론자유를 존중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가식 없는 인간, 그 자신 소탈한 서민의 한 사람으로서 서민들의 자발적 사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덮은 끝없는 애도행렬이 이를 말해주지 않는가.

애도 뒤에 남은 일들

고통과 무력감 속에서 극단적 최후를 선택하도록 강제한 근원이 이명박정부의 정치보복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권의 도덕적 기반이 취약할수록 전임자에 대한 단순한 예의조차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죽음이 남긴 교훈이 보복의 악순환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유서의 한마디가 깊은 울림을 갖는 것은 그것이 현실적 차원과 현실초월적 차원을 동시에 함축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수호에 자신의 죽음이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바쳐질 것을 그의 무의식은 소망했을 것이라 믿어도 좋다.

따라서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이명박정부에 대한 민주적 제어장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망가진 부분을 손질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나라의 거버넌스 체계를 다시 짜는 일"(백낙청)이 될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는 편중된 부(富)의 합리적 재분배에 사회 각 주체들이 원만하게 합의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정권이 취하는 태도로 보아서는 어느 것이나 당장 현실화되기 어렵다. 가령,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120일이 지났음에도 정부는 한마디 사과는커녕 고인의 가족을 잡아가고 경찰병력으로 현장을 봉쇄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중장기적인 과제를 위해서라도 우선 당장은 심폐소생술 같은 충격요법의 도움으로 이 정권의 의식마비를 깨우는 일이 긴급하지 않은가 싶어진다.

이 글을 마치려는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은 누적 추모객이 300만을 넘어섰다고 보도한다. 시청앞 광장을 차벽으로 둘러싸는 것 같은 무지한 만행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인파가 전국 각지의 분향소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잠재된 희망의 증거이다. 정부도 시민사회도 그 희망을 현실화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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