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마항쟁에서 나온 부가세 폐지 요구
        2009년 05월 19일 01: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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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마항쟁의 구호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정권도 몇 발의 총성으로 끝이 났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일해재단이나 국가원로자문회의를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였지만 임기 내내 ‘단임’을 천명했던 것도 박정희 암살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단지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 박정희 정권을 몰락시킨 것이 아니다. 다수 시민이 참여한 부마항쟁 때 공수특전단을 투입시킨 것은 이미 정권 말기적인 증상이었다. 만약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광주민중항쟁과 같은 사건은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조명을 덜 받기는 하였지만 부마항쟁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주대환 민주노동당 전 정책위의장도 부마항쟁 당시의 경험을 술회하면서 일반 대중들의 폭발적 에너지를 체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구두닦이, 불량배 등 사회 기층대중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 유신의 종말을 앞당긴 부마항쟁이 벌어지자 위령이 발동되고 무장한 공수특전단 병사들이 마산 시내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이 부마항쟁에서 “부가가치세 철폐하라”라는 구호가 외쳐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부마항쟁을 회고하면서 이러한 구호가 외쳐졌다고 기술하였다.

    5공, 부가가치세 폐지 검토

    부가가치세라니? 부마항쟁과 부가가치세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분명한 것은, 1976년 도입된 부가가치세가 당시 억압적인 정치 상황과 맞물려 광범위한 불만을 야기시켰다는 여러 가지 징후가 있었다.

    한국 역사에서 종합부동산세를 제외하고 단일 세제로써 이만큼 논란을 불러일으킨 세제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사후에 5공의 권력층 또한 부가가치세가 박정희 사망의 일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부가가치세 폐지 여부를 심각하게 검토하였다는 자료까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상인들의 반응은 “힘들게 적응하였는데 또 바꾸느냐”는 것이 대세여서 부가가치세 폐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가가치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먼저 하여보자. 한국과 일본 중 부가가치세가 먼저 도입된 나라는? 한국이다. 일본은 1990년대 중반에서야 도입되었다. 한국과 영국 중 부가가치세가 먼저 도입된 나라는? 영국이다. 그러나, 영국이 1973년이므로 한국과 3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도입 시기를 살펴보는 이유는 부가가치세가 세계적으로 도입된 지 얼마 안 되는 세제라는 것이다. 강력한 소득세를 가지고 있는 미국은 아직도 연방 단위의 부가가치세가 없다.

    부가가치세의 합리성

    부가가치세는 이념적으로 보면 매우 합리적이다. 원래 소비세는 걷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걷기 쉬운 곳에서 걷어 왔다. 극단적인 예는 다리를 막아 마차에다가 통행세를 매기는 것이고, 가장 전통적이고 광범위한 수입원인 관세는 국경을 막아 세관에서만 세금을 걷는 것이다. 주세처럼 아예 술도가에다가 과세하는 방법도 있다. 조금 더 발전하면 큰 제조업체나 판매업체에다가 과세하기도 한다.

    이렇게 과세할 경우 감시대상의 수가 적기 때문에 국가 입장에서는 탈세 여부를 감독하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실제로 부가가치세 도입 이전의 물품세 같은 세금이 이런 식으로 과세한 것이었다.

    그런데, 부가가치세는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상품과 용역을 제공하는 사업자가 납세의무자가 된다. 이 많은 사업자가 내는 세금이 정확한 것인지는 국가가 양 사업자가 서로 수수하는 세금계산서를 제출받아 체크하면 되는 문제였다.

    세금액수는 거래 가격의 일정 비율(예컨대 5~10%)인데, 실제 거래 가격보다 낮게 작성할 경우에는 물품을 사는 자가 세금을 더 부담하게 되고, 실제 거래 가격보다 높게 작성할 경우에는 물품을 파는 자가 세금을 더 부담하게 되어 결국 그 진실성이 담보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게다가 부가가치세는 필연적으로 사업자의 매출을 노출시켜 소득파악을 용이하게 한다. 지금도 세무서에는 종합소득세 납부 시기가 되면 부가가치세 신고액수 그대로를 수입금액으로 하여 개별사업자에게 종합소득세를 신고하도록 통보하고 있다.

    부가가치세는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이다. 소비세를 전체 유통과정에서 몇 군데만 걷으면 그 영역에서의 세부담만 높아져 자원분배가 왜곡되게 된다. 예컨대 제조단계에서만 세금을 부과하고 판매단계에서는 부과하지 않을 경우 제조업종의 세부담만 높아지고 그에 따라 세금을 줄이기 위해 불필요한 수직적 결합이 일어나게 되어 제조업체와 판매업체가 하나의 기업이 될 유인이 커진다. 특정물품의 제조와 판매를 하나의 기업이 수행하면 그 기업은 세금을 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부가가치세로 수출 촉진을 노리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던 것은 수출경쟁력 문제였다. 부가가치세는 실질적인 납세의무자가 재화를 공급받는 자이고 대개의 국가에서 수출 시에는 과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출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는 수출을 촉진하면서 수입대체를 목표로 하는 박정희 정권에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이미 10월 유신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으니 여론은 그다지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고, 유럽에서 부가가치세가 도입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해서 남덕우 전 총리는 이전 연재에서 보았다시피 세제의 방향이 간접세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한 것처럼 당시 경제관료들은 부가가치세를 도입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는 박정희 정권이 단행한 다른 세법 개정과는 한 마디로 그 질이 다른 것이었고, 억압적인 10월 유신 상황에서도 부가가치세는 정국의 핵으로 떠오른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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