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性엔 관용, 愛는 용서 못하는 사회
        2009년 05월 18일 06: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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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름 돋는 연기를 보여주지만 늘 어두워 보였던 설경구와, 예쁘고 어쩐지 신뢰 가는 송윤아가 결혼 발표를 했단다. 그 결혼 발표 기자회견에서 송이 눈물을 보였다길래, 그들이 곡절 많은 사랑을 해왔던 것 같아 공연히 가슴이 따끔해졌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들은 듯하다. 아니 스포츠 신문 같은데 굵은 활자로 찍혀 있는 글을 지나가면서 본 듯하다. 설경구가 별거, 이혼을 했다고.

       
      ▲ 지난 9일 배우 설경구와 송윤아의 결혼발표 기자회견

    사랑으로 만난 하나의 커플이 와해될 무렵, 또 다른 사랑이 주변에 다가오는 일은 흔하고도 자연스런 일이다. 종종 우린 그 시간 차이의 미묘함으로 예민해지곤 하지만, 그래봐야 그 인과 관계를 자로 재듯 측정하기란 힘들며, 따라서 전후관계를 규명하려는 혹은 그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가슴이 약간 따끔했지만 농익은 배우들끼리의 결혼 발표. 덤덤하게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충격은 그 다음에 찾아왔다.

    여러 모로 존중할 만하다고 여겨왔던, 82쿡(http://www.82cook.com/) 사이트가 설-송 결혼 발표로 폭탄 맞은 집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거다. 이유는, 설경구가 ‘조강지처’를 버리고 송윤아한테 가기 때문이었다. 송윤아는 ‘남의 가정을 깬 년’이고, 설경구는 바람나서 ‘가정을 버린 놈’이었다.

    그러면서 박정희도 조강지처를 버리고 육영수와 결혼하는 바람에 둘 다 비명에 가는 운명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더불어 따라다녔다. 박근혜는 장녀가 아니라 차녀라는 이야기도. 그래서 이참에 박근혜도 싸잡아서 공격하자는 듯이.

    다음 아고라엔 설경구 전처의 가족들이 올린 글들이 사람들의 의협심을 부추기고, 급기야 다음날엔 설경구 송윤아 결혼 반대 서명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전처가 “가정만은 지키고 싶어” 이혼 안 하려고 발버둥 쳤다는 이야기는 순교자의 거룩한 마지막 말 같은 아우라를 풍기며 네티즌의 공분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었다. 모두들 합심해서 전처의 입장에서 감정이입해가며, 친정식구라도 된 것 처럼 공분하는 이 광경을 어찌 이해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유교가 쳐놓은 그물은 이다지도 단단하고, 한국 사람들의 틀에 대한 강박은 이다지도 질긴 것이었단 말인가. 촛불정국의 중요한 주체 중 하나였던 82쿡이 일상 전반에서 드러내 주는 정치적인 진보를 늘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터라, 이번 일에 대한 반응은 제대로 충격이었다.

    관계와 틀

    이 사건, 즉 설경구-송윤아의 결혼에 대한 ‘대중의 격렬한 알레르기 반응’은 관계가 만신창이가 될지언정 죽어라 틀에 집착하는 한국사회의 고통스런 현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에겐, 남편 혹은 아내라는 공식적 타이틀을 가진 누군가보다 서로를 보듬어 주고, 사랑의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그리하여 더 창조적이고 유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상대가 필요하다. 틀을 유지하는 동안 남들에겐 정상적인 가정으로 ‘보여질 수’ 있을 지언정, 우리의 영혼은 포근한 은신처를 잃고, 삶은 어느새 공허한 위선으로 가득 찬다.

    ‘틀보다 관계가 더 소중한 것 아닌가’ 하는 투로 82cook에 말을 던져 보았다. “결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남는 건 섹스와 싫증뿐이다” 라는 답변이 즉각 돌아왔다. 이는 바로 한국사회의 중심지배계층인 중산층 남성들의 삶의 패턴을 반영하는 말이다.

    그들은 집안에 있는 마누라를 돌같이 볼지언정, 어지간하면 이혼하지 않고 살고, 대신 다각도로 심오하게 발달한 이 나라의 매춘시스템을 활용하면서 허전함을 달랜다. 그들에겐 가정을 함께 유지하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소비하는 여자가 있을 뿐, 그들이 혼신을 다해 사랑하고 마음을 교류하는 여자가 결핍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술집 여자’를 소비하는 것은 사회적 관례이고, 아내 아닌 여자와 마음을 나누며 본격적으로 사랑을 시작하는 일은 불륜이다. 성(性)은 관용하되 애(愛)는 결코 용서 못한다.

    10년 넘게 모래알같이 부서져 버린 허울만 남은 가정을 지켜오면서, 자신은 줄곧 술집여자를 소비하던 박철이 다른 남자를 사랑한 아내를 간통죄로 고소하고, 위자료를 챙기려했던 모습은 설송의 결혼, 혹은 사랑을 무섭게 비난하는 대중의 사고와 매끄럽게 연결된다.

    마르크스가 말한 “지배계급의 사고가 사회 전체의 사고를 지배한다”는 가부장제의 희생자인 여성들이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덫으로서의 결혼, 가족제도를 열렬히 옹호하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결혼제도는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출현한 것이다. 노동집약적인 농업사회로 넘어 오면서, 자손들에 대한 소유권을 확실히 해야 할 필요에 의해, 여성들의 성적인 자유를 박탈하고 한 남자에 영원히 복속되는 강박적인 정조를 요구하는 사회질서가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던 것이다.

    여자가 한 남자를 위해 수절하는 것을 독립투사 떠받들듯 대단한 덕망으로 칭송하는 모순된 풍습을 조장하고, 칠거지악(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사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음, 아들이 없음, 음탕함, 질투함, 나쁜 병이 있음,말이 많음, 도둑질을 함)같은 족쇄를 만들어 여성을 유용한 가축 정도로 취급해오던 유교가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흔적을 강렬하게 지니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누려야 할 삶에서의 감정적 만족과 성적인 즐거움등을 작위적으로 틀어막았던 사회에서 매춘이 최대의 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회에서 그 최대의 피해자인 여성들이 열녀문을 세워주던 사대부들과 똑같은 어조로 결혼의 금 밖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두 남녀를 엄중하게 꾸짖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다.

    "남의 가정을 깬 년"

    가정. 가족. 한국사회에서 이처럼 무지막지한 권력을 가진 단어도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도 감히 공격할 수 없다는 면에서 천하무적이다. 아무도 가족은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하고, 가정은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위와 현실이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 가정은 또한 권위와 권력이 학습되는,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기반으로 한, 권위주의적 사회를 형성하는 최초의 단위이도 하다. 남자에게 가정은 그들이 잘 다스려야할 최초의 조직이고, 그것을 잘 하고 난 다음에 더 큰 조직을 다스리고 군림하도록 훈련되어져 왔다.

       
      ▲ 설경구와 송윤아가 함께 공연한 영화 <사랑을 놓치다>의 한 장면

    이런 구조는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과 위선은 가족 내에서의 질서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방조했고, 거기서 많은 불행이 재생산되었으며, 그 불행은 침묵으로 감춰지도록 강요되어 왔다. 모든 가족 구성원은 가부장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다스려지는 가정의 이미지를 위해 크고 작은 희생을 언제나 감수해 왔다.

    최근들어, <가족의 탄생>이란 영화, <달려라 아비> 같은 소설들은 붕괴되어 가는 전통적인 개념의 가족을 부수고, 가정이 가지고 있던 위선의 허울들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송윤아를 향해 쏟아지는, 남의 가정을 깬 년 이란 비난은 결혼을 기반으로 하여 아버지와 어머니,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라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틀의 가정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입되어 온 이 하나의 틀만이 우리가 그토록 벌벌 떨며 유지하고자 하는 ‘정상’의 틀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엄마와 아이들 만으로도, 혹은 결혼이라는 법적인 제도를 거치지 않은 커플만로도, 혈연관계가 아닌 자매들, 형제들끼리도 가정은 얼마든지 형성되며 유지된다. 중요한 것은 그 구성원들이 나누는 소통과 애정의 밀도이지, 정상이라 일컬어지는 틀 자체가 아닌 것이다.

    대체로 유일신을 가지지 않은 사회는 다원적이고 유연한 사고와 삶의 틀이 존재한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민간신앙과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던 한국사회에서 유교적인 지배계급의 사고가 이토록 좁은 정상의 틀을 제시해 놓고, 시대가 진화하여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 좁은 틀에 사람을 가두고 있다는 사실은, 독재로 점철되어 온 현대사가 유교의 권위주의를 제대로 활용해 온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성정치, 성해방이 대한민국 진보진영에서 가장 부실한 논의의 토대를 가지고 있는 영역인 것도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도덕을 들어 신랄하게 공격받기 너무도 쉽기 때문이며, 이 문제를 정치적인 해방의 문제로 이해시키는 데는 너무 많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덕인가?

    분명 누군가는 도덕 따위는 그럼 필요없단 말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도덕의 시금석은 그것이 인간들의 생활을 더 풍부하고 더 조화롭게 만드는 데 적합한가에 따라야 할 것이다. 모두에게 동등하고 평화로운 공동생활의 조건을 규정하는 것이 도덕이어야 한다.

    지배계급에 의해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탄생한 가치가 오늘날의 도덕적 요구로 지속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도덕은 우리의 숨통을 조이는 데, 그 누구의 행복을 위해서도 기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만 쓰이는 것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지배계급들이 만들어 놓은 그 도덕의 틀을 수호하자는 목소리를 드높이는 순간, 우린 현상을 관통하는 본질을 놓치고 만다. 예를 들어, 촛불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 답답한 품위와 예의를 통쾌하게 깨 부숴준데 있었다.

    대통령한테 쥐박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쓰레기 같은 기사를 써오면서 수십년 동안 우리의 사고를 조종해온 언론사 앞에 쓰레기 더미를 과감하게 던져주는 이 품의와 예의를 상실한 태도가 비로소 우리의 삶을 옭아매던 자들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직시하게 해주었다.

    아프면 치유하자

    남겨진 사람의 입장에선 물론 떠나간 사람이 원망스럽다. 저주스럽기까지 하다. 더구나 아이와 함께 남겨진 엄마의 입장에서, 삶은 더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겪은 일은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가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삶의 한 과정이다.

    우린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때론 떠나고 때론 남겨진다. 마음이 떠난 사람과 허울뿐인 관계를 부여잡고 있어봤자, 상처만 더 커질 뿐이다. 이혼하지 않고 원수처럼 지내는 부모 밑에서 큰 아이들이 받는 상처는 더 크다.

    공연히 더 큰 원망을 키우기 보다는 인간사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임을 인정하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추스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떠나간 남자에겐 적어도 아이 아빠로서 절반의 양육을 위한 책임은 확실하게 묻는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다른 사랑을 만나든, 다른 삶의 터전을 가꾸든, 다른 세상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적극적으로 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싶다.

    설경구와 송윤아가 결혼을 하든 말든 앞으로 광고는 다 끊겼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자본주의적 저주를 퍼붓는 네티즌들도 그들에게 광고가 끊긴다고 누가 더 행복해지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설경구-송윤아 결혼반대 서명운동에 참여한 분들을 위해서는 모두 정신치료를 권하고 싶다. 그들이 결혼하지 않아도 그 누구도 행복해 지지 않는다. 간통한 자들의 행복이 당신들의 불행이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장자연 리스트에 올라간 그 모든 남자들을 간통죄로 고발하자는 서명운동부터 하시라. 간통은 되지만 사랑은 안 된다? 그렇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아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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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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