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좌파와 욕망의 억압
        2009년 05월 18일 06: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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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회는 욕망을 억압하는가?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억압’이라는 말의 부정적인 맥락 제거하고 가치중립적 언어로 만들 필요가 있겠다. 억압이라는 말은 이미 서구사회는 물론 한국에서도 매우 부정적인 말로 쓰이고 있다. 특히 60년대를 통과하면서 억압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와 자유에 반대하고 지배계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뉘앙스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억압이란 것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일까? 억압하는 대상이 부정적이고 위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어떠할까. 모든 억압이 나쁜 것이라면, 간단히 말해 친구의 간식을 뺏어먹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욕망도 억압하지 말아야 할까?

    상식을 가진 성인이라면 그 어린아이에게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절해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도덕 혹은 윤리라고 불리지만 분명 욕망을 제어한다는 면에서 억압이다. 이런 경우 억압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기 힘들다.

    욕망 억압은 부정적이지 않아

    모든 개인이 자신의 모든 욕구를 남김없이 실행하려고 한다면 그 사회는 존속하기 힘들다. 물론 사회적 억압 기제가 그 본래 목적을 넘어 악용되는 것까지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을 전혀 억압하지 않는 공동체는 존속은커녕 잠시도 유지되기 힘들다. 한 문명사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욕망의 억압이 필수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덕이나 윤리라는 말을 쓰지 않고 굳이 억압이라는 단어를 동원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도덕과 윤리가 억압적 요소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는 이 글에서 논하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두 가지 본능을 가지고 있다. 죽음 본능과 생명 본능이며, 이 두 가지는 죽을 때까지 지치지 않는 심리적 에너지를 생산한다. 이 본능으로부터 욕망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바로 리비도이다. 리비도는 욕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끊임없이 자아에 욕망의 충족을 강요한다. 자아는 리비도의 욕망을 적절히 충족시키는 한편 도덕과 윤리를 대변하는 초자아의 명령에 부응해야 하는 이중적 질곡에 놓여 있다. 인간의 삶이란 바로 리비도와 초자아라는 까다롭고 집요한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각 개인의 리비도가 무한정 충족되는 사회는 단 한 순간도 유지될 수 없고, 초자아의 명령만이 통용되는 사회에는 프로이트가 겪었듯이 온갖 신경증이 창궐할 수 밖에 없다.

    <문명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이 만들어낸 무의식 구조가 집단심리와 문명사회심리 분석에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험한 바 있다. 원래 젊은 시절 프로이트의 관심사는 의학이 아니라 문명연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약 프로이트에게 더 긴 삶이 허락되었다면 문명사회의 무의식에 대해 흥미로운 저작물들이 남겨졌을 것이다.

    욕망의 조절, 강한 억압이 필요

    개개인은 물론 한 사회가 성립하려면 리비도로부터 끊임없이 생산되는 욕망을 조절하고 때로는 강하게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덕과 훈육이 아니라 굳이 억압인 이유가 있다. 인간의 죽음 본능과 생명 본능은 일상에서 느끼는 통상적인 수준의 욕망이 아니라 매우 심원하고 강한 수준의 것이다. 죽음 본능은 파괴 행위로, 생명 본능은 성행위로 각각 표출된다.

    만약 본능이 있는 그대로 실현된다면 사회적으로 용인된 수준의 충족을 가볍게 넘어선다. 미국 연쇄살인범이 흔히 저지르는 범죄, 즉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닥치는대로 죽이고 강간한 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전부 집어 가지고 나오는 수준으로 사악하고 파괴적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은 이러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일생 중 가장 자유롭게 표출되는 시기를 바로 유아기로 보았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유아들의 이기성과 탐욕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다만 유아기의 욕망과 이기성은 부모나 양육자, 즉 초자아의 힘으로 조절되고 억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의 욕망은 무엇으로 억압되는가? 프로이트가 가정했듯이, 개인이 성인에 이르는 도정을 걷듯이 인류 사회도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능과 욕망을 통제하고 성숙하며 발전하는 길 위에 놓여 있다면 한국 사회는 대체 어디에 서 있다고 봐야 할까?

    최근에 한국 사회, 특히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파괴 본능과 성본능을 정확히 반영하는 두 가지 ‘사고’를 쳤다. 용산과 장자연씨 리스트가 바로 그것이다. 농성 하루만에 진압경찰을 동원해 화재를 내고 여섯 명의 목숨을 빼앗고, 힘없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

    용산 개발업자가 설마 그 땅이 없으면 가족을 먹여살리기 힘든 상황이었겠는가? 999마리의 양을 가진 자가 1마리 양을 위해 살인을 한다는 비유만큼 용산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없다. 장자연씨를 옆에 앉히고 술을 마시던 ‘지도층’ 인사들이 설마 장자연씨에게 홀딱 반해서 그녀 없이 잠도 못 잘 정도였겠는가? 장자연씨뿐만 아니라 수많은 연예계 지망생들이 그들의 성대상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타인의 재산과 생명을 거침없이 맞바꾸고, 누구든지 마음에 들기만 하면 얼마든지 성대상으로 삼는 한국 지배계층의 사악함은 프로이트가 직시했던 인간의 죽음 본능과 생명 본능의 무절제함과 파괴성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괜히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에 임하면서 ‘인간의 가슴에 존재하는 거의 길들여지지 못한 악마들 중에서, 가장 사악한 악마’라고 불렀던 게 아니다.

    억압과 승화

    이러한 욕망과 파괴성은 훈육이나 달래는 따위의 방법이 아니라 그야말로 억압기제가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서구 사회는 대개 두 가지 방법을 써 왔는데, 억압과 승화가 그것이다. 억압을 담당하는 기제는 바로 종교이며, 승화는 예술이 떠맡아 왔다.

    물론 종교에도 승화적 요소가 있으며, 예술도 억압 기제로 활용되어 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기독교는 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역할을 해 왔으며, 예술은 욕망의 탈출구를 열어 주었던 게 사실이다. 이 두 가지 기제를 유지하기 위해 서구사회가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를 써댔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서구사회가 종교인과 예술인에 특별 대우를 아끼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도 설명된다. 인간의 끊없는 이기성과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며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이 두 가지 기제를 가지고 있는가? 물론 사회마다 본능을 억압하고 사회에 해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를 것이다. 가령 원시 부족 중에는 근친상간과 그 가능성을 과도할 정도로 억압하는 부족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성본능 억압 기제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사악한 욕망, 즉 살자고 올라간 망루가 무너지도록 물을 뿌려 내쫓고, 일하는 사무실 위에 모텔방을 만드는 엽기적인 욕망은 사회적으로 조절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는 이 두 가지 기제를 가지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이것은 핍박받는 백성이 아니라 지배계층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계층이 빨아먹고 사는 사회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가끔 나오는 말 중에 한국 지배계층은 통치를 잘 못한다는 말이 있다. 피지배계층의 욕망을 억압하는 한편 적당한 탈출구를 열어주는 것이 서구사회가 전통적으로 취해온 방법이었다. 그러나 한국 지배계층은 욕망을 억압하거나 승화시키는커녕, 더욱 부추기기 바쁘다.

    ‘너희들도 나처럼 되고 싶지? 그러면 내 말을 잘 들으면 돼!’. 한국 지배계층은 일차원적인 수준의 욕망을 끊임없이 충족시키는 한편, 피지배계층의 욕망을 부채질하면서 노예로 삼는다. 한편 경제적 구조를 활용하여 예술이나 기타 여가활용 등 승화가 가능한 통로를 차단한다.

    그런데 문제는 죽음 본능과 생명 본능은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한 인간의 욕망을 남김없이 충족시키려면 전 우주를 동원해도 모자란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한국인들은 물론 한국의 지배계층의 욕망을 모두 채우기에 한반도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지배계층이 종교나 교육을 통해 스스로를 억압할 리도 없고, 그렇다고 예술로 욕망을 승화하는 교양도 부족하며, 하다못해 외부 식민지 개척을 통해 파이를 늘리는 능력도 없다. 한국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유아적인 욕망을 채우는 유일한 방식은 피지배계층의 욕망을 부추기면서 그들도 자신들처럼 될 수 있다고 세뇌하는 것뿐이다. 어디서 도는 말마따나 ‘나올 데는 세금밖에’ 없다.

    집단 속의 개인은 최면상태의 개인과 비슷하며, 무의식적 충동을 절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프로이트가 인용한 르 봉의 주장이다. 르 봉은 18세기 말의 심리학자로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종교를 동원한 억압도, 예술의 힘을 사용한 승화도 아닌 욕망의 부추김에 불과한 지배계층의 기제를 한국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한국 좌파를 좋아하겠는가

    앞서 말한 친구의 간식을 뺏어먹고 싶어하는 꼬맹이를 불러와보자. 한국 좌파들이란 이 꼬맹이에게 그러면 못 쓴다고 타이르는 어른같은 입장에 놓여 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오더니 그 꼬맹이에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힘을 써서 친구의 간식을 마음껏 취하라고 말한다고 쳐보자. 그 철없는 아이가 누굴 더 좋아하겠는가?

    한국 좌파가 선거에서 백전백패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데 놓여 있다. 먹을 것을 손에 쥔 아이에게 그 먹을 것을 빼앗아보라. 그 아이의 원망스럽고 짜증이 난 얼굴은 바로 한국 대중이 좌파와 지식인을 바라보는 바로 그 얼굴이다.

    반지성주의나 좌파 혐오증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바로 그 표정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국 좌파는 마치 리비도와 초자아 틈바구니에 낀 자아처럼, 유아적 정신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지배계층과 대중 사이에서 곤란해 하는 어른의 입장에 놓여 있다.

    여기까지의 논리가 진실이라면 한국사회는 억압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다면, 여기서 말하는 억압의 대상인 욕망은 예술적 성취나 사회봉사, 오지탐험 등의 고차원적인 욕망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끝없는 자기애의 실현이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고 성대상으로 삼는 욕망이다. 한국사회가 품은 욕망은 김구가 꿈꾸던 높은 수준의 문화적 성취는커녕 하다못해 세계정복에도 못미치는 지극히 유치하고 일차원적인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좌파는 자유와 해방을 주창하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욕망들을 억압해야 할 입장에 놓인다. 실제로 한국 좌파들은 개개인이 미시적 욕망들을 억압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외국에는 극우파 예술가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지만 한국에서 괜히 글 쓰고 예술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좌파인 게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프로이트는 본질적으로 예술가는 성본능에서 근본적인 힘을 퍼올린다고 보고, 그 구조를 해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본능을 억압하고 승화하는 능력과 천부적인 재능이 결합되어 예술 작품이 창조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가설대로라면 예술작품 창조에 억압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요소가 된다.

    다시 한국의 좌파들이 처한 상황으로 돌아오자. 그런데 이 상황을 뒤집으면, 한국 좌파 또한 욕망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승화의 묘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절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욕망의 모습조차 거부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80년대야 말할 것도 없고, 요즘 집회판에 화장을 하고 갔더니 아저씨들이 안 좋게 보더라는 이야기도 동일한 맥락이다.

    화장 하고 집회 나가면

    억압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듯이 죄의식은 문명사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죄의식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수치심은 이기적 욕망과 본능을 효과적으로 억압하는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죄의식은 개인이 그 인생과 사욕 전체를 포기할 수 있는 독특한 초월적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80년대 대학생들이 안정된 미래를 포기하고 집회판과 공장으로 들어갔던 이유가 바로 광주에 대한 죄의식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 민주화 운동에 몸바친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분위기또한 죄의식이 가진 힘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좌파들의 심리적 딜레마는 그렇다고 적당히 승화하는 기제도 발견하지 못한 바로 그 상태이다. 죄의식은 대단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세대와 사회를 뛰어넘어 작동할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세대가 공유하는 죄의식은 그 다음 세대에게 반감을 유발하는 일이 적지 않다. 왜 윗대의 죄를 나까지 짊어져야 한단 말인가? 대중들이 소위 운동권에게 느끼는 피로감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죄의식으로부터 사회 발전의 동력을 퍼내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시대착오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아무런 죄의식도 수치심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한국 지배계층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이다. 몰염치, 파렴치, 뻔뻔스러움 등의 수식어가 가끔 동원되지만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한국 지배계층의 욕망은 모든 종류의 통제를 거부하려는 유아적 욕망에 가깝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성숙한 남자란 유아적 욕망과 환상에 대해 타협을 마친 개인이라고 보았다. 욕망은 결코 근절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되도 곤란하다. 만약 욕망이 없어진다면 긍정적 의미의 생성과 발전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협’이 필요하다. 성장을 다 마친 성인이 유아적 욕망과 환상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개인을 유치하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만약 그 성인이 자신의 유아적 욕망을 위해 타인의 생존과 성을 뜻대로 휘두르려 한다면, 그 사람을 가리킬 때 가장 적당한 말이 바로 악마일 것이다.

    정신분석학 발전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가진 일종의 성악설을 부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융과 아들러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의 후계 그룹이라 볼 수 있는 학자들은 다양한 저작을 통해 정신분석을 발전시켜 왔지만,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유아성욕설과 죽음본능과 생명본능 이론을 외면함으로써 인간의 악함으로부터 애써 시선을 돌려왔다. 죽음본능과 생명본능 이론은 바타이유 등의 학자에 의해 에로스와 타나토스 이론으로 ‘수위를 낮추어’ 재평가 받았지만, 프로이트가 밝히고자 했던 인간의 멈출 줄 모르는 욕망과 이기성은 교묘하게 외면받았다.

    그런데 인간의 기성과 자기애적 욕망이야말로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될 진실이 아닐까? 그래도 도덕과 윤리는 존재하며, 성선설에 대한 막연한 믿음만으로는 우리 앞의 현실은 너무나 참혹하다. 더구나 집단의 도덕성은 개인의 도덕성에 비해 부족하다는 것은 이미 현대사회의 상식이다. ‘그래도 괜찮은 나라’라고 자기위로를 하기 전에 더욱 문명사회, 특히 한국사회의 욕망과 억압이 품고 있는 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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