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H·K에 어서오세요 & 88만원 세대
        2009년 05월 14일 03:26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N·H·K에 어서오세요!’는 소설이 먼저 출판되고 그 뒤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도 각각 제작되었다. 참고로 만화판은 스토리가 기묘하게-흔히 안드로메다로 날아간다고 한다- 전개되어 완결편까지 다 보고 나면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황당해진 자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소설과 애니메이션만 보시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거라고 당부드린다(이것조차 보실 분들이 계실지는 모르겠다). 이 애니메이션은 히키코모리(방구석 폐인, 또는 은둔형 외톨이-여기서는 원작의 의미를 살려 ‘히키코모리’라고 쓰겠다)인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의 내용을 확장했다.

    그 내용 자체로는 한겨레의 언급처럼 ‘오타쿠 애니메이션’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인들의 취향을 과장해서 드러내는 단편일 뿐 작품 전체적인 주제와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이 작품 전체적인 주제는 히키코모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판 88만원 세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또는 요즘 유행하는 ‘워킹푸어(일하는 빈곤층)’로 전락한 젊은 세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품 전체적으로는 개그성이 상당히 강하다. 실제 장르도 코믹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것을 만약 내가 속한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면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주인공의 황당 개그에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24화 완결을 다 보면서도 웃어야 하는데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속한 어느 인터넷 동호회 카페에 가서 의견을 올렸더니 마찬가지로 다들 웃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먼저 주인공의 이름은 사토 타츠히로. 나이는 22살(한국식 나이로는 약 24살 정도)이며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듯한 망상에 시달린다. 그 즉시 방구석에 처박혀 무려 4년 동안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며 어떻게든 그 삶에서 빠져나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이것이 누군가의 음모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 끝에 그 음모를 꾸미는 조직을 알아낸다. 바로 ‘NHK’, 즉 일본(Nihon), 히키코모리(Hikikomori), 협회(Kyoukai)의 약칭이다.

    그런 주인공 앞에 어떤 소녀가 나타난다. ‘방구석 폐인을 구제하는 친절한 소녀랍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 소녀의 이름은 ‘나카하라 미사키’ 그녀는 자신이 정확히 누구인지, 왜 주인공에게 찾아왔는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에게 다가와 ‘당신은 저의 프로젝트에 발탁되었습니다’라고 하며 한 장의 계약서를 내민다. 그리고 주인공은 수없이 갈등하다 마침내 그녀의 프로젝트에 동참한다. 이렇게 그는 조금씩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버거운 인생을 살아가는 청춘들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히키코모리인 타츠히로와 그 소녀를 중심으로 주인공과 연관된 다른 등장인물들이 매회 등장하면서 스토리의 외연이 점점 확장되어가는 방식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세대의 아픔을 예상했던 것보다 매우 현실적으로 비춰준다.

    먼저 주인공의 고등학교 선배(히토미)는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취직을 한다. 그러나 직장생활의 스트레스와 대인관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늘 항우울제와 수면유도제에 의존해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인터넷 자살사이트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동반자살을 택하기로 하고 여행을 떠난다. 주인공은 멋도 모르고 여기에 말려들어 따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살아있을 가치가 없음을 깨닫고 죽으려 한다. 그러나 미사키와 그의 후배가 찾아와 그를 저지한다.

       
      

    이후에 그는 고등학교 시절 반장(메구미)의 연락을 받고 그녀를 만난다. 그리고 한참 그녀를 따라가 어떤 장소에 도착하고서야 그곳이 어딘지 깨닫게 된다. 그곳은 TV에서만 보던 불법다단계 사업설명회장이었다.

    주인공은 몰래 그곳을 뛰쳐나오고 그를 뒤따라온 반장은 자신이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대학에 진학할 당시 아버지가 쓰러지고 오빠는 게임중독에 히키코모리가 되어있었다. 결국 생활비와 학비를 혼자서 모두 벌어야 했다. 그러나 가게 사장은 돈을 들고 튀었고 어딜 가서든 제대로 된 임금을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마침내 불법다단계 업체의 꾐에 넘어가 수많은 물품들을 구입한 그녀는 이미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는 말한다. ‘나에게 더 이상 미래는 없다’라고.

       
      

    마지막까지 베일에 가려있던 미사키의 사연도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요정처럼 귀여운 모습으로 주인공 앞에 나타난 미사키는 아직 십대라는 어린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가정폭력으로 인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그 뒤로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못한 채 친척집에 얹혀 살아왔다. 그리고 죽은 양부(새아버지)에게 당한 폭행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여름철에도 늘 긴팔 옷을 입고 다닌다.

    그녀는 이 모든 불행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먼저 세상을 떠난 친부모의 죽음도 자신의 탓이며 자신은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녀는 히키코모리인 주인공을 구원함으로써 자신의 삶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미약하지만 소중한 연대

    긴 내용전개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일일이 다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방에 처박히는 히키코모리 주제에 자신보다 나이 어린 미사키 앞에서 되지도 않는 거짓말과 허세를 부리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다단계에 넘어간 친구, 우울증에 시달리다 죽으려고 하는 선배의 모습을 보면 결국은 이것이 누구의 모습인지 알게 된다.

    최근에 직장을 그만두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며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 보자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나. 아니면 삶의 고단함에 못 이겨 죽음을 택하는 다른 사람들. 그리고 불안한 미래와 적은 임금에 청춘을 저당잡히거나 불법다단계에 말려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숱한 젊은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등장인물들의 삶을 보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NHK라는 악의 조직이며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혁명폭탄’을 들고 뛰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녹록한 일인가.

    주인공은 미사키 앞에서 ‘혁명폭탄’을 들고 절벽으로 뛰어가 자신의 몸을 투척하는 마지막 생쑈를 벌이지만 결국 마주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참담한 현실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간에 싹트는 미약한 연대정신이다.

    미사키는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늘 환하게 웃으며 주인공에게 다가가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 히키코모리 인생으로 끝날 것 같은 주인공의 삶도 느리지만 조금씩 변화한다. 한없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죽지 말자고 서로를 붙잡고 끌어올리려 한다. 딱 그 정도, 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딛고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그들의 희망이다.

    K·B·S에 어서오세요

    문득 되지도 않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스갯거리로 생각을 해봤다. 일본에 NHK가 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번 짜맞춰보니 그럴 듯한 이름이 나온다. K(Korea : 한국), B(Bin-gon : 빈곤), S(Society : 협회) 즉 KBS다. 여기서 B는 ‘빈곤’이 될 수도 있고 ‘백수’라든가 또는 ‘비정규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조금은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다. 예컨대 이런 이름을 통해 일본처럼 ‘빈곤철폐연대’라든가 ‘한국프리터노동조합’이라든가 하는 단체들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라는 식으로.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결론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얼마나 버틸지는 모르지만 되는 데까지는 해볼 생각이다.’ 그리고 미사키는 주인공에게 계약서를 내민다. 그녀만의 NHK(일본인질교환협회)계약서이다. 주인공이 사인을 하자 미사키는 미소를 띤 얼굴로 말한다. ‘NHK에 어서오세요!’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