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자의 필요조건
    2009년 05월 12일 09: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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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제 고향 레닌그라드(상트 페테르부르그)에 갔을 때에 제가 학생 시절에 아주 사모했던 한 중국학 노(老)교수를 방문했습니다. 저도 학생 시절부터 그 분의 『염철론』(소금 철 등의 재정정책에 대한 토론을 묶은 전한 시대 책-편집자) 러시아어 번역을 고전 번역의 백미라고 생각하고 늘 모범으로 삼았지만, 그 분은 동양학연구소에서 근무했던 제 아버님의 사촌 형과도 친분이 있으셨기에 일종의 ‘가족적 연고’이기도 했습니다.

   
  ▲ 필자

이미 80을 바라보는 연세의 그 분은 거동이 어려우셔 직장 다니는 일마저도 힘들 정도이고, 시력도 매우 감퇴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댁에 들어갔을 때 그 분은 역시나 책상에 앉아 한나라 시절의 텍스트를 계속해서 번역하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책상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라는 이야기이었지요.

돈도 명성도 더 이상 그리 필요하지 않는 나이에 한나라 시절의 식화지(왕조사의 재정편-편집자)와 계속 씨름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중국 고전을 다루는 일은, 그 분으로서 인생의, 이제 거의 유일한 즐거움입니다. 한자 하나 하나 한어대자전에서 찾아내고,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문장 구조를 이해하고, 그걸 아름다운 러시아어로 옮기고….

돈도 명성도 아니다

이게 ‘노동’이자 즐거움, ‘나’를 위한 지적 오락, ‘나’의 지적 욕망의 분출의 계기이기도 한 것이지요. 사실 이 분의 삶에서는 ‘노동’과 ‘삶’, ‘노동’과 ‘오락’의 경계선은 없습니다. 중국 고전을 빼면 ‘삶’ 자체가 무너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걸 보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실, 그 분은 구 소련의 공산당과 담을 쌓고 살았지요. 공산당이 제국주의 국가 소련의 지배기관으로 변질됐다고 많이 싫어하셨고, 공산당원이었던 제 아버지의 사촌 형을 그 측면에서 별로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학자로서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1968년 체코를 방문했을 때에 소련의 체코 침략이 바로 이루어졌는데, “당신이 러시아인이냐”고 묻고 그 침략의 책임을 추궁하는 체코인들의 목소리를 떠올리기만 하면 차후에도 계속 수치심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정치 지향이 어땠든 간에 그 분과 같은 생활적 태도야말로 공산주의자 되기의 필요조건이 아닌가 싶어요. 공산주의의 목적은 결국 소외, 즉 노동 상품화의 극복, 노동이 바로 즐거움이자 자기실현, 자기 계발이 되는 ‘활기 넘치고 스트레스 없는 사회’의 건설이 아닌가요?

즐거운 노동,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한 생활 태도

그러한 면에서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도 가능만 하다면 ‘즐거운 노동’을 실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일반 사회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수유연구실의 고미숙 선생이야 자신의 노동(원고 작성과 대중 강의 등)과 자신의 즐거움을 거의 일치시킨 고무적 사례지만, 학원화된 학교에서 ‘미친 교육’의 멍에를 지고 있는 교사로서는 본인에게도 아이에게도 ‘즐거움’이 되는 수업을 하기가 아주 힘들 것입니다.

그래도 악조건 하에서도 ‘즐거운 노동’, ‘노동 그 자체를 위한 노동’, ‘돈이 아닌, 나와 남을 위한 노동’을 지향하는 게 인간의 지상 과제라고 봅니다. 이 과제의 완벽한 해결이야 자본주의의 완전한 극복 이후에만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지향하도록 노력하는 게 본인의 정신 건강에도 좋을 듯합니다.

100년이 지나면 그 노교수의 『염철론』 번역보다 더 나은 번역이 나와 그 번역은 폐기 처분될는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그 분의 중국고전 사랑을 본 저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굳혔고, 제가 그 신념을 살려 살 수만 있다면 누군가가 이를 보고 더 감명받아 이 세상의 어떤 좋은 책을 사랑하게 될 것이겠지요.

그렇게 해서 생명의 줄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요? 죽음을 면할 수 없지만 죽는 순간까지 책과 서로 사랑하는 짝을 이룸으로써 삶의 수레바퀴를 계속 굴리는 것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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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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