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식 '고난의 행군 벗어나기'
    2009년 05월 11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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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쏘련연방 해체로 ‘좌-우 양극체제’는 무너지고 미 제국주의의 ‘독재시대’가 도래했다. 우파 진영은 사회주의를 ‘역사의 유물’로 조롱하며 노동계급을 거침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좌파 진영의 사상적 혼란과 정치적 침묵은 암울하게 깊어만 갔다.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경제개혁)를 카스트로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로 역행시키는 정책으로 인식했다. ‘맑스-레닌을 따르라’는 커다란 배너들이 쿠바를 공식 방문(1989년 4월)한 고르바쵸프를 차갑게 맞이했다. “쏘련 사회주의가 무너져도 쿠바 사회주의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카스트로의 예언적인 선언(1989년 7월 26일)이 뒤를 이었다.

평화시의 특별기간

혁명 이후 쿠바는 1989년까지 연평균 3.1%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중남미 어느 나라보다도 안정된 경제 성장이었다. 쏘련과의 특혜적인 무역거래 때문이었다. 쏘련은 쿠바의 사탕수수. 담배, 커피 등을 국제 가격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구입해 주었고 대신 원유, 기계류, 화학비료, 살충제, 생활용품, 식료품 등을 국제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판매했다.

쓰다남은 원유를 다른 나라들에 재판매해 벌어들인 외화가 쿠바 무역수입의 2번째가 될 정도였다. “필요한 물품들을 적어 보내면 정확히 도착했다”는 카스트로의 짧은 표현은 쿠바와 쏘련의 긴밀한 경제관계를 잘 증언한다.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권 몰락으로 쿠바 경제는 한순간에 치명타를 맞았다. 수출입의 80%를 잃어 버렸다. 그 결과 원유 수입은 1,400만 톤에서 4백만 톤, 화학비료는 130만 톤에서 30만 톤, 살충제는 21,000톤에서 1,000톤으로 줄어 들었다.

   
  ▲ 아바나 시내 뒷골목

식료품 수입도 거의 50%로 줄어들어 식량부족 현상이 심각해졌다. 기름, 원료, 부품등의 부족과 잦은 정전으로 수많은 공장과 농장들이 문을 닫아 실업율은 40%에 달했다. 실업자 수당은 60%만 지급되었다. 국내총생산(GDP)은 35%로 떨어졌다.

쿠바 사회주의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 시작되었다. ‘평화시의 특별기간’(Special Period in Time of Peace, 이하 특별기간)이라고 불리워진다. 온갖 먹거리를 지방 도시에 의존해온 수도 아바나 220만 시민의 ‘먹거리확보’가 시급해졌다. 골고루 나눠먹는 ‘식량 배급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쿠바인의 평균 하루 칼로리 섭취량은 1989년 3,300, 1993년에는 1,863으로 떨어졌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최저 칼로리 기준인 2,400보다도 훨씬 낮았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쿠바인들은 곡괭이를 움켜잡았다. 쿠바 정부는 공휴지를 거저 내주었다. 친환경 농업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석유와 부속품 부족으로 다수의 차량들의 운행이 중지되었다. 사람들은 계속 걸었다. 자동차와 버스 대신 무상으로 나눠준 2백만 대의 자전거가 거리를 누볐다. 트럭을 개조한 버스들이 등장했다. 지방도시에는 마차가 대중교통수단으로 한몫을 했다. 농산물의 장거리 수송이 어렵게 되자 지역단위에서 먹거리를 해결해야만 했다.

목조이는 경제봉쇄

미 보수 정객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쿠바혁명 초기부터 시작된 비인간적인 ‘경제봉쇄’를 더욱 바짝 조이는 3개의 악법들을 통과시켰다. 먼저 해외 미국회사들의 쿠바 무역을 금하는 멕크 수정안(Mack Amendment, 1990년 10월). 멕크법 이전에 쿠바는 식료품과 의약품 70%를 해외 미국회사로부터 수입할 수 있었다. 지금도 쿠바가 의약품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악법 때문이다.

   
  ▲ 트럭을 개조한 버스

톨리체리법(Toricelli Act, 1992년 10월). 이 법은 쿠바에 기항한 선박은 6개월동안 미국 기항 금지, 미국시민의 쿠바 여행과 송금을 금지했다. 이 법안으로 750만 달러치의 식료품과 의료품의 쿠바 운송이 정지되었다. 쿠바와 무역을 하는 외국 회사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헬름-버톤법(Helms-Burton, 1996년 3월). 이 3개의 법들로 쿠바의 정치 경제적 고립이 가속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고르바쵸프 이후 옐친의 등장은 카스트로의 신경을 곧두서게 했다. 옐친은 미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극우 단체인 ‘반 피델 쿠바인 미국인 전국 협회’(Anti-Fidel Cuban American National Foundation)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재정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쿠바의 사탕수수를 수입하지 않겠다고 미국에게 약속했다. 어제의 우방국이 오늘의 적국으로 변한 꼬락서니다.

경제 위기에도 사회복지 확대

경제 위기시 자본주의 국가들은 사회복지 공공예산을 줄여 나가는 긴축 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쿠바 정부는 정반대로 공공예산을 확대했다. 재정마련을 위해 과감하게 군비축소를 단행했다. 미국과의 ‘준 전시 상황’ 속에서 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무료교육, 무료의료 등 사회복지안전망 확대를 위해 13억 페소(1989년)였던 국방비 예산을 6억 페소(1995)로 줄였다. 그대신 의료 복지비를 9억 페소(1989년), 11억(1994), 12억 페소(1996)로 증액했다.

또한 35개의 대학(아바나 6개대학)이 50개(아바나 7개대학)로 늘어났다. 신설된 15개의 대학 중 14개 대학이 지방도시에 위치했다.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먹거리처럼 대학 교육 역시 지역단위에서 해결하려는 현명한 정책이었다.

외화획득을 위해 앞서가는 생명공학(Biotechnology) 상품수출, 광산물 니켈(세계 2위 매장량) 수출, 관광산업 확대, 해외투자 유치에 집중했다. 빠르게 확산되는 친 환경 농업은 수십만 명의 고용 창출 효과를 가져왔다.

과거에 아무 조건없이 도움을 받았었던 국가(주로 제 3세계국가)들이 자발적으로 쿠바를 돕기 시작했다. ‘쿠바를 지켜내자’는 국제 연대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띠끌이 모여 태산’을 이루는 심정으로 세계 곳곳에서 의약품을 비롯한 구호 물품과 모금한 돈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고립무원의 쿠바인들에게 ‘가뭄의 단비’였다.

경제 위기 극복

   
  ▲ 로베르트 페레스

쿠바 경제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1995년에 ‘특별기간’의 경제위기는 바닥을 쳤고 ‘우고 차베스’ 정부가 들어선 1998년부터는 안정적인 국면으로 들어갔다.

쿠바에 있는 ‘자연과 인류를 위한 협회’(The Foundation for Nature and Humanity)의 로베르토 페레스(Roberto Perez)는 ‘특별기간’의 성공적인 극복은 “개인의 필요보다 지역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3 ‘C’s – 지역(Community), 환경보존(Conservation), 협동(Cooperation)”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조만간에 붕괴될 것이라는 전세계 우파들의 신앙에 가까운 예상을 뒤엎고 ‘카스트로의 선언’처럼 쿠바가 올곧게 살아나자 중남미의 좌파운동이 살아났다. 쿠바가 있기 때문에 카스트로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우고 차베스’(Hugo Chavez)가 있는 것이다. 쿠바가 있기 때문에 자신도 카스트로처럼 “맑스주의자, 레닌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라며 미국에 맞서는 볼리비아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 정부가 있는 것이다.

쿠바 사회주의

한때 쏘련의 위성 국가정도로 취급받았던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쿠바가 중남미 좌파운동의 중심축이자 전 세계 좌파 운동의 견인차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하는 바가 많다.

미국의 생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리챠드 하인버그(Richard Hienberg, 1950)는 쿠바 사회주의 존재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쿠바는 인류가 다가올 에너지 위기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쿠바인들은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생태 사회주의’(Eco Socialism) 주창자들이 쿠바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특별기간’에도 쿠바는 ‘도움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부상자 22,000명(어린이 18,000명, 1990~2005년)을 쿠바에 데려와 무료 치료을 해주었다. 쿠바는 참 착한 사회주의 국가다. 비바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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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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