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왜 무대 위를 점거했나
    By mywank
        2009년 05월 08일 07: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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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 1주년’을 맞은 지난 2일 서울 도심은 ‘계엄 상황’을 방불케 했다. 이날 경찰은 병력 1만 2,000여명을 집중 배치시키며 모든 집회를 원천봉쇄 했다. 또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주변을 지나는 시민들까지 ‘현행범’으로 체포하며, ‘촛불 공포증’을 여지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이날 저녁 ‘촛불시민’들은 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하이서울 페스티벌’ 개막식 행사장을 검거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를 두고 한승수 국무총리는 “또 다시 폭력시위가 경기 회복이나 국가이익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며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는 사태”라고 말했다. 

       
      ▲지난 2일 저녁 ‘2009 하이서울페스티벌’이 행사장 무대를 점거해 시위를 벌이고 있는 ‘촛불시민’들 (사진=손기영 기자) 

       
      ▲미처 행사장 무대 위로 올라가지 못한 ‘촛불시민’들도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사진=손기영 기자) 

    하지만 이날 무대를 점거해 시위를 벌였던 ‘촛불시민’ 안 아무개 씨(38, 방문학습 교사)는 “그때 무대를 점거했으니까 언론에 보도됐지, 안 그랬으면 ‘촛불 1주년’의 의미와 우리들의 목소리가 아예 묻혔을 것”이라며 무대 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혔다.

    안 올라갔으면, 아무도 몰랐을 것

    그와 함께 무대에 올랐던 김 아무개 씨(50, 애견샵 운영) 역시 “서울역 광장, 청계광장 등이 모두 봉쇄돼 ‘촛불’들이 목소리를 낼 곳은 없었다”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사람들이 몰린 페스티벌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2일 무차별적인 강제연행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날 밤 명동에서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진 뒤, 귀가하던 중 연행된 강 아무개 씨(41, 회사원)는 “전경 6~7명이 제 팔과 다리 들었고 목까지 꺾어서 저항하거나 항의할 수도 없었다”며 “(집회에 참가한 것도 아닌데)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강 씨는 지난해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바쁜 직장일 때문에 최근 2~3달 동안은 집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는 지난 4일 밤 금천경찰서에서 풀려난 상태지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상태다.

       
      ▲<레디앙>은 지난 7일 ‘촛불시민’ 3인과 함께, ‘촛불 1주년’ 집회 경험담 및 경찰의 폭력진압 문제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봤다 (사진=손기영 기자) 

    한편, 이들은 한 목소리로 “경찰이 전보다 더 강경하게 진압하고 무차별적인 연행을 단행하기에, 촛불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졌다”며 “이제는 ‘비폭력만 외치다가 무기력하게 연행되지 말고, 공권력에 저항하면서 더 싸우자’는 생각에 공감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강도 높은 ‘촛불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공포의 사회

    이들은 또 “‘광장’에서 벌어지는 촛불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며, ‘제도권 안에서 촛불을 구현하자’는 이야기도 있지만, ‘촛불’은 제도권이 갖고 있는 문제를 고쳐보고자 출발했다”며 “촛불이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순수성을 잃게 되기에, 촛불의 진화 역시 어디까지나 ‘광장’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디앙>은 지난 7일 저녁 사당역 부근의 한 음식점에서 ‘촛불시민’ 3인과 함께 ‘촛불 1주년’ 집회 경험담, 경찰 폭력진압의 문제점, 향후 ‘촛불운동’의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이날 좌담회는 열띤 분위기 속에 2시 반 가량 진행되었으며, 취재원들의 요청에 따라 기사에 익명 및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공포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는 중이다.

    다음은 ‘촛불시민’ 3인과 나눈 대화 전문.

    #1 – 5월 2일의 ‘악몽’, 그리고 저항 

    강 씨 = “주말을 맞아서 명동성당 부근에 있는 ‘맛뜨리아’란 주점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10시가 조금 넘어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가기 위해서 명동 역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경들이 명동 밀리오레 쪽에서 을지로 입구 쪽으로 진압작전을 벌였다. 순간 너무 놀라 주변에 있던 분들과 인근 상점 쪽에 몸을 피했다.

       
      ▲강 아무개 씨 (사진=손기영 기자) 

    그런데 아무 이유 없이 경찰들이 다가와 연행했다. 전경 6~7명이 팔과 다리 들었고 목까지 재껴서 저항하거나 항의할 수도 없었다.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경찰서에 도착하니까 그때서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조사과정에서 이날 밤 주점에서 받은 현금영수증까지 제시했지만 믿지 않았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았다.”

    김 씨 = “2일 행진대열 선두에 서서 ‘하이서울 페스티벌’이 열리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저는 이날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서울역 광장에서 ‘촛불행동의 날’ 행사를 개최하려고 했지만 원천봉쇄 되었다.

    청계광장, 태평로 역시 모두 막혀버려 ‘촛불’들이 목소리를 외칠 수 있는 공간은 행사가 열리는 시청 앞 광장을 빼고는 아무 곳도 없었다.

    그 때 시청 앞 광장과 주변에서는 개막식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났다. ‘용산 참사’ 해결과 촛불 1주년의 의미를 기리는 목소리는 공권력으로 짓밟는데 노래나 틀고 공연이나 하는, 그런 한가롭게 느껴지는 행사는 허락하고…. 그런 현실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촛불들, 목소리 외칠 공간 없었다"

    ‘촛불’들이 광장으로 진입을 시도하면서 구호를 외치니까 행사 주최 측에서 지나치게 음악소리를 키웠다. 구호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우리의 절박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몰린 페스티벌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안 씨 = “무대를 점거했으니까 언론에 보도됐지, 안 그랬으면 ‘촛불 1년’의 의미와 우리의 목소리는 묻혔을 것이다. 촛불들이 광장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자, 페스티벌 행사에 참가한 한 풍물패 단원이 ‘이명박 물러가라’라는 구호에 맞춰 꽹가리를 쳤고, ‘코스프레’에 참가한 한 여성도 구호를 같이 외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힘이 났다.”

    강 씨 = “저는 연행된 뒤 금천경찰서 유치장에서 여러 시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울산에서 서울로 여행 온 대학생도 있었다. 그 친구는 지금까지 촛불집회에 나온 경험이 한번도 없었다. 또 쇼핑을 하다가 연행된 분도 있다. 그 분 역시 한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2일 경찰은 명동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범죄인’으로 생각한 것 같다.”

    명동에 있으면, 모두 ‘범죄인’? 

    김 씨 = “당시 경찰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 손에는 장봉이 들려있었고 시민들을 바라보는 눈빛도 살벌했다. 겨울이 지나면서 촛불의 숫자가 다시 많아지기 시작했고, ‘용산 참사’ 100일을 기점으로 노동절, ‘촛불 1주년’이 이어지면서 촛불의 불씨가 다시 붙을까봐 상당히 걱정했던 것 같다. 그들은 분명히 ‘촛불’ 앞에 떨고 있었다.”

    #2 – 더 이상 ‘비폭력’을 외치지 않는 이유

    강 씨 = “지난해에 비해 ‘촛불’이 강경해졌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경찰이 강경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한 것이다. 지난 1년을 겪으면서 촛불들도 많은 것들을 깨우쳤다. 경찰이 전보다 더 강경하게 진압하고 무차별적인 연행을 단행하기 때문에, 촛불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안 아무개 씨 (사진=손기영 기자) 

    안 씨 = “지난해 ‘촛불’은 이명박 정부를 제대로 겪지 않았던 촛불이었다. 단지 자신들의 생각을 촛불이란 방법을 통해서, 요구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로부터 많은 것을 당했고, 정부는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들을 단 하나도 실천하지 않았다. 그런 분노들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공권력에 대한 불신 극에 달해"

    특히 지난해 말과 올해 초 ‘MB악법’ 처리를 강행했던 이명박 정부에 대해, 촛불들이 많이 실망했다. 또 올해 초 발생된 ‘용산 참사’에서 경찰이 살인진압을 벌이고,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아무런 사과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정권과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게 된 것이다.”

    김 씨 = “이제는 ‘비폭력만 외치다가 무기력하게 연행되지 말고, 공권력에 저항하면서 더 싸우자’는 생각에 공감하는 분들이 늘어날 것 같다. 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공포도 넘어선 것 같다. 이명박 정부 1년이 지나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공권력의 폭력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이대로 계속 가면 촛불들도 강경한 투쟁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강 씨 = “최근 일부 시민들이 도심에서 ‘투석전’을 벌이기도 하는데, 경찰에게 돌을 던지겠다고 작정하고 나오신 분들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합법적인 문화제를 원천 봉쇄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길 가던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연행하는 공권력에 만행에 맞서, 어쩔 수 나타나는 ‘반발’ 같다.”

    안 씨 = “이명박 정부 때문에 당장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 ‘비폭력’을 외치면서 한가롭게 집회 현장에 나올 ‘촛불시민’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의 요구를 더 강하게 요구하거나, 이명박 정부를 빨리 끌어내리고 싶은 생각 밖에 없을 것이다.”

    ‘강성’이 되어가는 촛불

    김 씨 = “지난해처럼 촛불소녀, ‘유모차부대’ 주부들도 집회에 많이 참여하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 이미 이명박 정부는 지난 1년 동안 이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사전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집회에 나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이 많다. 이런 탄압을 극복하려면, 촛불도 점점 ‘강성’이 될 수 밖에 없다.”

    강 씨 = “솔직히 이제 합법적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집회는 모두 원천봉쇄 되고, 촛불만 들어도 아니 촛불 근처에만 있어도 모두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미네르바 사태’처럼 인터넷에서 글 쓰는 것조차도 자유롭게 보장되지 않는다. 오프라인이건 온라인이건 촛불들이 목소리를 낼 공간은 거의 없다.”

       
      ▲지난 2일 ‘촛불 1주년’ 집회에 참가한 한 시민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사진=손기영 기자) 

    안 씨 = “솔직히 지난해까지는 ‘비폭력’이라는 외침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이 집회장에서 잘 통하지 않는다. 더 이상 무기력한 집회를 하지 말자, 그리고 폭력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더욱 강고한 저항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강 씨 = “경찰도 인정하는 사실이겠지만, 지난 1년 간 촛불들은 ‘비폭력’을 외치면서 평화시위를 하려고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경찰은 폭력진압의 강도만 높여왔다. 결국 경찰과 이명박 정부는 지난 1년간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시위문화가 조성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기자회견이건 문화제건 행진이건 모두 불법으로 매도했다.”

    #3 – "촛불은 ‘광장’에서 진화한다"

    안 씨 = “2009년 촛불의 메인 이슈는 ‘이명박 정권 퇴진’이 될 것이다. 운동방식 역시 아스팔트 위에서 이미 촛불들에게 정당성을 잃은 공권력과 강하게 맞서는 형태가 될 것 같다. 저는 좀 더 강경해지는 촛불들의 저항을 ‘운동의 퇴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 아무개 씨 (사진=손기영 기자) 

    강 씨 = “이제 ‘인내의 한계점’이 온 것 같다. 지난 1년간 명동에서 ‘무한도전 X2’라는 플래시 몹도 해봤고, 덕수궁 주변에서 ‘촛불 산책’도 해봤다. 그러면서 촛불의 투쟁방식이 다양하게 진화해 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방법 역시 공권력에 의해 철저히 탄압 받았다. 그러다보니 무의식적으로 좀 더 강한 저항의 방법을 찾을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광장’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도권 안에서 촛불운동을 구현하자’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촛불운동은 제도권이 갖고 있는 문제를 고쳐보고자 출발했다. 결국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순수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2009년 촛불의 진화 역시 어디까지나 ‘광장(거리)’에서 이뤄져야 한다.”

    "제도권으로 들어가면 순수성 잃어"

    김 씨 = “정당이나 시민단체 등 제도권 안에 있는 분들과 ‘촛불’이 느끼는 정서가 사뭇 다른 경우도 종종 있다. 얼마 전 허세욱 열사 2주기 추모제를 열기로 했는데, 정당 및 시민단체 쪽에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촛불시민’들이 모든 행사를 직접 준비해가며 추모제를 치르기도 했다.”

    안 씨 = “맞다. ‘촛불’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지난해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때도 그랬지만, 제도권에 있는 단체들이 투쟁의 의제를 독점하기도 했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별로 귀 담아 듣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용산 참사’ 투쟁에서도 정당이나 시민단체들이 처음에만 나와서 ‘하는 척’만 하다가, 이제 대부분 발을 뺀 상태다.

    이들은 보수 세력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지난 10년 동안, 편하고 쉬운 투쟁만 해온 것 같다. 결국 대중 운동이 아니라 ‘정치활동’을 하고 싶은 것이다. 80~90년대처럼 대중들의 요구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것 같다. 촛불들은 그들이 있는 제도권으로 가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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