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좌파도 ‘진보의 재구성’
        2009년 05월 07일 05: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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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한 마디로 이탈리아판 이명박이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신자유주의가 퇴조하고 있지만, 유독 이탈리아에서만은 미디어 재벌 출신 총리가 대자본과 부유층 위주의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 양 끝의 두 반도 국가가 모두 시대의 방향과 반대쪽으로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국제 무대에서 잇달아 인종주의, 여성 비하 발언들을 쏟아내서 세계인들의 빈축을 사고 있기도 하다. 그의 망발과 망동은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의 여성 편력만큼이나 전 세계 신문 외신면의 단골 메뉴다.

       
      ▲ 2008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구 공산당 출신 발터 벨트로니를 베를루스코니의 대항마로 내세웠다

    그런데도 그의 지지율은 줄곧 2/3선(70% 대)을 달린다고 한다. 도대체 200만 당원을 자랑하던 이탈리아 공산당의 역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사회당, 공산당, 신좌파를 합쳐 유럽에서 제일 강력한 좌파 문화를 자랑하던 그 이탈리아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많던 이탈리아 좌파는 어디에?

    불과 한 세대 전 전성기를 달리던 이탈리아 좌파 정치가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것은 아니다. 아직도 상하원이나 지방의회의 정치인 중 다수는 과거 공산당이나 사회당 출신이거나 그도 아니면 신좌파 투사의 이력을 갖고 있다.

    대중운동의 힘이 소진한 것도 아니다. 이탈리아 노동운동은 여전히 유럽 여러 나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편에 속한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운동들도 줄기차게 등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어떤 중심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좌파의 유산과 새로운 대안지구화 운동을 서로 연결하여 단순한 反베를루스코니 연합을 넘어선 사회 변혁 방향을 제시할 정치 프로그램이 없고, 이런 프로그램을 추진할 세력이 눈에 잘 안 보인다. 그리고 그 인격적 상징인 새 세대 지도자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좌파 정치 공간에 새로운 중심을 부여하고 재편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1991년에 이탈리아 공산당이 좌파민주당으로 변신한 이후, 지난 20여 년간 이탈리아 좌파 정당사가 곧 이러한 시도들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베를루스코니의 우파 재편 과정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수권 가능한 정당을 만들자 – 올리브 동맹과 민주당

    범좌파의 가장 중심에 있던 프로젝트는 범-비공산당 세력의 비토 때문에 만년 야당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공산당을 버리고 이른바 수권 가능한 좌파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시도는 처음에는 공산당을 ‘좌파민주당’이라는 이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바꾼 뒤 ‘올리브 동맹’이라는 선거 연합을 건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선거 연합은 과거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중심축이었던 기독교민주당의 중도적인 부분까지 포괄했다. 그래서 올리브 동맹의 얼굴 역할을 한 것이 기독교민주당 출신의 로마노 프로디 전 총리였다.

    올리브 동맹은 절반은 성공한 프로젝트였다. 프로디를 내세워서 여러 차례 집권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좌파민주당의 맛시모 달레마가 구 공산당 출신으로는 최초로 이탈리아 총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올리브 동맹은 번번이 베를루스코니의 우파 연합에 선거에서 패하거나 집권 뒤 곧바로 권력을 내주곤 했다. 패배가 거듭될수록 올리브 동맹은 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에 보다 효과적으로 맞설 통합 정당의 건설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올리브 동맹을 아예 하나의 당으로 합친 민주당이다. 이 당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인데, 그것은 어떻게든 베를루스코니를 이기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당은 도무지 좌파인지 우파인지 알 수 없는 선거 기계의 숙명을 타고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판 노무현? – 디 피에트로

       
      ▲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올리브 동맹에서 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시도와 경합한 또 다른 시도들도 있다. 그 중 하나는 노무현식 정치의 이탈리아판이라 할 수 있는 디 피에트로의 정당 ‘가치의 이탈리아’다.

    디 피에트로는 조직 범죄 세력과 연루된 정치 부패를 파헤친 ‘깨끗한 손’ 운동을 주도한 스타 검사다. 그는 정계 입문 뒤 대체로 올리브 동맹과 행보를 같이 했으나 1998년에 ‘가치의 이탈리아’라는 독자 정당을 만들었다.

    이 당 역시 좌우 어느 쪽인지 색깔이 모호하다. 이 당의 생명력은 오직 디 피에트로의 개인적 인기에 바탕을 둔 포퓰리즘에 있다.

    놀랍게도 공산당을 좌파민주당으로 바꾸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구 공산당 서기장 아킬레 오케토가 이 당의 창당에 함께 했다. ‘가치의 이탈리아’는 민주당과 때로 동맹하고 때로 경쟁하면서, 원내에서 작지만 만만히 볼 수는 없는 변수 역할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판 ‘진보의 재구성’ – 베르티놋티의 ‘대안좌파’ 프로젝트

    또 다른 시도는 노동운동가 출신인 파우스토 베르티놋티가 공산주의재건당을 통해 추진한 프로젝트다. 공산주의재건당은 공산당이 좌파민주당으로 바뀔 때 여기에 합류를 거부한 세력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다. 그래서 ‘꼴통’ 구좌파식 이미지가 강했다.

    한데, 90년대 후반 들어 베르티놋티와 그 지지자들이 당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베르티놋티 그룹은 대안지구화 운동의 큰 방향 속에서 기존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들을 개혁해야 하며, 좌파 정당은 이러한 사회운동 재구성 과정에 복무하고 새로운 운동들의 정치적 대변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탈리아판 ‘진보의 재구성’).

    올리브 동맹-민주당 프로젝트와는 달리 베르티놋티 그룹의 이 ‘대안 좌파’ 프로젝트는 선거 정치상의 당장의 성과보다는 좌파 정치를 밑뿌리부터 새롭게 재건하는 데 중심을 두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러한 작업이 제도 정치와 무관하게 진행될 수는 없다는 것을 간과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공산주의재건당 외에도 민주당에 합류하지 않은 다양한 좌파 세력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집을 지으려는 시도를 계속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해 반베를루스코니 연합에도 참여했다.

    2008년 총선에서 이 노선은 공산주의재건당,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당(구 공산당의 또 다른 계승 세력), 민주좌파(좌파민주당에서 민주당 합류를 거부한 세력), 녹색당 등을 포괄하는 ‘좌파-무지개’라는 선거연합의 구성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좌파-무지개’는 원내 의석 확보의 마지노선인 4% 득표율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총선 참패, 공산주의재건당 분당 그리고 ‘좌파와 자유’의 등장

       
      ▲ 공산주의재건당에서 탈당한 베르티놋티 그룹의 지도자이자 아풀리아 주 주지사 니키 벤돌라

    ‘좌파-무지개’의 총선 참패로 베르티놋티 노선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사실 총선 이전부터도 시끄러웠다. 베르티놋티의 주도로 공산주의재건당이 반베를루스코니 연립 정부에 참여한 데 대해 당 내 트로츠키주의 정파들이 격렬히 반발해 탈당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총선 이후 열린 당대회에서는 공산주의재건당의 유일한 광역단체장인 니키 벤돌라가 이끄는 베르티놋티 그룹이 당권을 잃었다. 파울로 페레로의 새 당 지도부는 기존의 베르티놋티 노선을 폐기했다.

    공산주의재건당의 새 방향은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건설한 새로운 선거연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공산주의재건당은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당 등과 함께 ‘반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선거연합을 구성했다. 이것은 구 공산당 문화의 좁은 틀을 넘어서 새로운 좌파 정치 문화를 건설하려던 베르티놋티 그룹의 야심찬 시도와는 반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르티놋티 그룹의 좌파 재구성 프로젝트가 사멸한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재건당은 이를 폐기했지만, 이 프로젝트 자체는 죽지 않았다.

    당대회에서 석패한 베르티놋티 그룹이 올해 1월 결국 공산주의재건당에서 탈당했다. 이들은 ‘대안좌파’ 프로젝트의 계승, 발전을 내세우며 ‘좌파를 위한 운동’이라는 새 정치조직을 출범시켰다.

       
      ▲ 시위하는 니키 벤돌라와 ‘좌파를 위한 운동’ 당원들

    이들은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지난 총선의 ‘좌파-무지개’ 식 선거연합을 다시 추진하려 한다. 새 선거연합의 이름은 ‘좌파와 자유’. 여기에는 현재 녹색당, 민주좌파,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당 탈당파 그리고 구 사회당에서 비롯된 소규모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재통합한 사회당 등이 함께 하고 있다.

    게이이면서 맑스주의자이자 좌파 가톨릭 교도로서 이탈리아 남부 아풀리아 주의 주지사인 니키 벤돌라라는 걸출한 대중 정치인이 이 새로운 정당연합에 활력을 부여하고 있다.

    이탈리아 좌파의 혼란과 재편,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과연 어느 쪽이 살아남을 것인가? ‘반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좌파와 자유’인가?

       
      ▲ ‘좌파와 자유’ 결성대회에서 연설하는 니키 벤돌라

    만약 ‘좌파와 자유’가 현실 정치 세력으로 살아남는다면, 공산주의재건당 탈당파와 민주좌파, 사회당, 녹색당 등을 포괄하며 베르티놋티 노선을 잇는 새로운 좌파 정당이 등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새 좌파 정당은 민주당이 버린 좌파 정치 공간을 복원하고 그 주역이 될 수 있을까?

    아무튼 이탈리아 좌파의 현 상황을 단지 혼란스럽다고만 평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아직 갈 길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처럼 보이긴 해도, 이것은 좌파 정치 문화를 재건하고 부활시키려는 부단하고 진지한 시도들의 중간 결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이탈리아만의 상황이 아니다. 지금 우리 상황과도 묘하게 대칭을 이루는, 전 지구적인 것이다. 결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 <주간 진보신당>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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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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