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계형 범죄? 노무현이 장발장인가?
        2009년 04월 24일 05: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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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고도를 기다리며 中 / 사무엘 베케트>

    노무현은 유죄다

    전후(戰後)엔 무엇이 남을까. 아마도 탈진한 ‘허무’와 쓰디쓴 ‘절망’이리라. 그들(‘노사모’를 비롯한 일명 ‘노무현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노빠들’)은 아직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가보다. 그렇다. 그들은 자주 이렇게 성토해 왔다, 소위 ‘악어의 눈물’에 대해서, 그 ‘치졸함’과 ‘비열함’에 대해서..

    안다. 적어도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최악의 정부’인지를… 이 한국 땅에서 아무리 촌무지렁이라 할지라도 이제 그것을 모르는 이는 오로지 그들 눈밑에 기생하고 있는 ‘다크서클들’뿐이다.

    그러니 손석춘식으로 여기서 명토박고 가자. 도덕적이든 사회적이든 (그 스스로 인정했듯이) ‘노무현은 유죄다!’라는 엄연한 사실 말이다. 법리적으로 그것을 증명해낼 절차적 의무가 오늘 저 정치검찰들에게 있다는 사실은 이 시점에서 ‘정치논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받아 들이자.

    즉 설령 항간의 주장대로 이것이 ‘표적수사’라 할지라도 그것이 곧 노무현의 무죄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조기숙의 ‘먼지털이론’은 그가 참여정부의 수혜자란 점에선 한편 이해는 가지만 장차 한국사회의 미래를 일정부분 책임진 ‘교수’란 신분으로 보면 매우 부끄러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입’이 있으니 ‘말’을 한 것이라 할런지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볼땐 달을 보고 짖는 개의 구차함 이상으로 안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생계형 범죄’, ‘먼지’ 같은 말 속에는 이미 노무현의 행위를 자신도 범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함인데 그럼에도 그것이 생계형 범죄임으로 용서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걸까?

    아니면 드러난 것만 무려 수십억이고 장차 얼마나 더 커질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는 사실을 두고서도 이제 그의 양심의 저울은 한때 ‘최고 권력자’의 눈물과 빵 한쪼가리를 훔친 ‘쟝발쟝의 눈물’을 애써 ‘등가일치’시킬 정도로 추하게 병들고 망가졌단 것인가

    그렇다. 김민웅이 말하는 "그를 앞세워 자기들의 죄악을 은폐하려는 자들"은 비단 시퍼런 칼자루를 쥔 이명박정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이 사건에서 우리사회가 얻을 수 있는 첫번째 교훈이다.

    죽음이란..

    맞다. 이미 곤경에 처한 사람을 더불어 공격한다는 것은 차마 인간적으로 도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항상 ‘자제’가 곧 ‘미덕’인 것은 아니다. ‘김종배의 it’에서도, ‘김민웅의 칼럼’에서도 무언가 중요한 핵심을 놓지고 있는 이 ‘뜨뜨미지근함’을 그냥 그들 입장에서의 ‘체면’쯤으로 이해하기로 하자. 하지만 이래선 이 한국사회가 ‘교훈’은 커녕 앞으로도 온통 이유있는 무덤들의 ‘공동묘지’ 이상을 기대할 게 없다.

    ‘죽음’의 이유를 ‘생을 다함’ 이상의 의미로 해석하는 건 단지 산자들의 감상적 호들갑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대의’의 이름을 빌려 ‘통치’란 행위로 구체화 되는 ‘정치’의 영역에 있어 지나친 감상적 포퓰리즘은 곧 ‘미개함’ 내지는 ‘정치후진국’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오직 인정하고 갈 건 이것이다. 아무리 산자의 슬픔이나 아쉬움이 커도 그것이 결코 죽은 자를 무덤에서 꺼내 되살릴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노무현 그는, 정치적으로 이미 사망했다. 더불어 그의 시대가 가졌던 어설픈 신자유주의적 개혁 열망들 또한 죽어야 마땅하다. ‘노혜경’이 말하는 ‘노무현은 버려도 꿈은 버리지 말자’는 말은 아직도 국민을 ‘뇌사자’쯤으로 인식하는 가진 자의 오만으로 밖엔 안들린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2005~2008, 불과 3년간 약 7.6%의 중산층이 몰락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계량화된 수치보다도 실제 일반 서민들이 격었던 체감지수와 실질적 몰락은 이 수치를 훌쩍 뛰어넘어 숨돌릴 틈 없이 진행되어 왔다는 것은 이제 별 새삼스런 기억조차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런 사람들에게 그는 어떤 꿈을 꾸라는 것일까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

    ‘후회’라는 말은 가끔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연상시킨다. ‘배신’이라는 말은 때로 ‘기대치 않은 실망’을 연상시킨다. 냉정히 말하자면, 나는 노무현이 배신한 바도 실수한 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단지 그의 이념과 의지가 시키는대로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애초에 일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에게 ‘역사의 진보’를 바라고 게다가 ‘사회개혁’까지 기대한 것은 사실, 눈뜨고도 제대로 보지못한 눈먼 당신들의 책임이 더 크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그를 선택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정치에선 본래 ‘선인’과 ‘악인’이란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각자의 처지에서 ‘더 나은 자’와 ‘더 못한 자’가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정의-진보’… 이것은 결코 입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노무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두번째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계급과 이익에 부합하는 자를 우리사회의 ‘리더’로써 골라낼 것인가에 대한 ‘냉철한 안목’을 가지는 일 말이다.

    그것은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수구꼴통’이란 딱지를 붙이기 전에, 그들의 선택이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최소한 그들은 적어도 자기 계급과 이익에 충실한 자를 항상 리더로서 선택해 왔다는, 가히 본능적 정치의식의 영악함 앞에 이제 그렇지 못했던 자신들의 조잡한 정치의식을 되돌아보는 것으로써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고도는 없다

    한바탕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위에서 사무엘 베케트가 기다리던 ‘고도’는 무엇이었을까. 희망? 꿈? 자유? 미래? 평화? 안락한 삶?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나 설령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정확히 집어낼 수 없다고 할지언정 적어도 지금 우리가 그가 그토록 몸서리치며 겪었던 전쟁터와 조금도 다름없는 곳에 서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저 이름만 바꿔서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 찬 신자유주의자들이 벌려놓은 이 전쟁터에서 농민이, 노동자가, 서민이, 젊은이들이 그들을 대신해 하나하나 죽어나가도 그들은 그것을 ‘통치’라고 말한다. ‘정치’라고 얼버무린다. ‘법치’라고 바락바락 대든다. 이런 세상에서 민중들 도탄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가는데 늘어나는 것은 온통 공짜로 줄 것같은 ‘대부업’ 광고에 만병통치약같은 ‘보험’ 광고들 뿐이다.

    나는 차마 이런 시대에 누구처럼 꿈을 꾸라 입바른 소린 죽어도 못하겠다. 단지 이젠 좀 똑바로 찍자는 것이다. 그러고도 여력이 있다면 저 하늘같은 정치꾼 나리들만 쳐다보며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 낮은 이웃들을 향해 손이라도 좀 잡아주잔 말이다.

    만약 당신이 지금 참사 94일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안돼 오늘도 시신을 부둥켜안고 절규하고 있는 유족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보다, 당장 봉화마을로 달려가 노짱 구하는게 더 중요하다고 외치는 정도의 ‘정치의식’이라면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러고도 정치가 어떠니, 정의가 어떠니, 역사가 어쩌니 여전히 떠벌리는 당신이라면 결단코 우민(愚民. 배우고도 어리석은자/김규항 주장) 중에 우민이 분명하단 사실일 것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왜 항상 ‘이 모냥 이 꼴’이냐고 개탄할 자격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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