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는 소득세를 좋아한다?
        2009년 04월 24일 0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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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4 공화국 시기의 세제는 공평한 것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조세의 공평성은 수평적 공평, 수직적 공평으로 나뉘는데 수평적 공평은 같은 담세력을 가진 사람이 같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의미이고, 수직적 공평은 높은 담세력을 가진 사람이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의미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공평성이라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다. 일반적으로 좌파들은 수직적 공평을 강조하면 높은 소득과 재산이 있는 자에 대해서 누진적으로 높은 비율의 세금을 매기자고 하고 이것이 공평하다고 한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고된 노동의 결과인 저축에 대해서 높은 비율의 세금을 매기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역대 어떤 정부도 공평과세라는 것이 세정의 근본 목적이며 세제개편의 원칙이라는 것을 부정한 적은 없다. 참고로, 현 이명박 정부는 참으로 우리 역사에서도 드문 사례다. 2008년도 역사적(?)인 감세법안에 대해서 기획재정부 보도자료를 보면 ‘공평’이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데 이는 정부 수립 이래 없던 일이다.

    공평이라는 말이 빠진 이유가 이 정부가 너무 솔직해서 그런 것이지 아니면 무지막지한 감세법안에 대해서 공평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양심에 꺼려서인지는 알 수 없다.

    MB 조세 정책에서 ‘공평’이 빠지다

    초기 박정희 정부 관료들은 어딘지 모르게 계획경제 지향이었던 제3세계 비동맹국가들의 관료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1967년 세법 개정 당시 재무부 장관인 서봉균은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경제의 기본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이러한 인식은 아마 현재의 경제관료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우리 경제의 기본적인 방향은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겠지만 그러나 그 자체가 궁극의 목적은 아니라 그러한 수단방법을 통해 가지고 결과적으로는 국민 전체가 빈부의 격차 없이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그러한 사회를 건설해야 되겠다. 이것이 궁극의 목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는 우리가 여러 가지의 자본주의의 강점을 이용해 가지고 그러한 수단을 통해 가지고 그러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봉균의 발언을 보면 마치 자본주의는 수단이고 목적은 국민 전체가 빈부의 격차 없이 잘 사는 사회(=사회주의?)인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는 별 다른 관심이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후기, 특히 유신정권으로 갈수록 이른바 수직적 공평성은 계속 약화되었다. 공평성의 추이를 볼 수 있는 자료로 OECD 분류상 소득세(분류코드 1,000)와 소비세(분류코드 5,000)의 비율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소득세의 비중이 클 경우 공평한 세제이나 소비세가 늘어날 경우 상대적으로 불공평한 세제이기 때문이다.

       
      

    위 표는 소비세를 소득세로 나눈 비율이다. 양쪽 액수가 같으면 100%이고 소비세가 많다면 100% 이상으로, 소득세가 많다면 100%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다. OECD 국가의 경우 소득세와 소비세 액수가 비슷하고 소득세가 약간 많음을 알 수 있다.

    소득세와 소비세 비율의 시대적 변천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소비세 비중이 월등히 많고 1960년만 해도 소득세 비중이 증가하였으나 1970년대 초부터 소비세가 월등히 늘어남을 알 수 있으며, 민주화 이후인 1987년 이후에야 소득세가 다시 늘어나나 여전히 OECD 국가에 비하면 소득세의 비중이 상당히 작음을 알 수 있다.

    즉, 1970년대 유신 이후 민주주의가 정지된 상태에서는 조세정책상 소득세의 비중은 계속 줄어들었고 공평과세라는 목표는 계속 약화되어가는 시기였다. 이는 여론과 무관한 군사적 효율성과 공포정치를 우선한 유신체제의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1971년 세법 개정 당시 재무부 장관인 남덕우의 발언이다. 이는 1967년의 서봉균의 발언과는 사뭇 기조가 다르다.

    “직접세보다는 간접세에 중점을 둘 때에 좀 더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서 세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 또 현재 선진국의 세제상의 일반적인 경향을 보더라도 종전에는 직접세를 강조했읍니다마는 현재는 부가세 등등의 간접세에 치중하는 방향을 옮겨져 가고 있습니다.”

    즉,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박정희 정권은 조세정책에 있어서도 상당 부분 공평성이라는 관점에서 후퇴하고 있었다. 1960년대 고도성장이 이루어지면서 누진세 체계를 취하고 있는 세제의 특성상 당연히 소득세의 세수는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1971년이면 소비세 대 소득세 비중이 1.66배로 소득세 비중이 피크에 달한 해였다. 고도성장의 결과 성장의 과실은 불균등하게 분배되고 있었다.

    게다가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조달이라는 차원에서 증세를 한다는 박정희 정권의 정책은 여러 가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금융의 실명거래를 요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자소득세를 면세하였다는 것이다.

    저축에는 비과세? 노동에는 과세?

    이는 저축증대라는 차원에서 5.16 직후부터 시행되었는데, 성장의 과실이 불균등하게 분배되면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에 대한 과세가 어려워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자소득세 비과세 문제는 부동산투기로 인한 과세 미비와 더불어 당시 세제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시중금리가 고율인 상황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자에 대해서 세금을 면세하면서도 근로자와 사업자에 대해서는 세금을 징수한다는 것은 무한히 정당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결국 1987년 이후 경실련의 주도 하에 금융실명제 도입 여론으로 비화하게 된다) 세제가 성장의 과실이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것을 시정하지 못한다면 그 세제는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당연하게도 정치도 변화하고 있었다. 친일지주계급이 뿌리인 한민당의 후신인 야당들은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를 가지고 있는 농민의 아들인 박정희를 이기기 어려웠다.

    그러나, 야당은 계층, 계급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사회적 균열 속에 ‘40대 기수론’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후보선출 과정을 통해 김대중이라는 제3세계에서 보기 드문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여 박정희와 맞서게 된다. 이 김대중은 조세정책 공약으로 부유세를 내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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