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서 보수세력 미래 없다"
        2009년 04월 20일 10: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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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세력에 미래는 있는가? 답부터 질러 말하면 ‘당분간 없다’이다. 물론 미국의 상황이다. 그러나 설령 오바마 시대의 미국이라 할지라도 그냥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또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보수주의는 지난 30~40여 년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담론을 좌우하는 거대 패러다임으로 성장한 이데올로기이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과 보수주의 집단은 돈이면 돈, 정치권력이면 정치권력, 정책능력이면 정책능력, 대중조직이면 대중조직 등등의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헤게모니를 구축해왔다.

       
      

    부시 시절 그의 오른팔이었던 K. 로브는 공화당의 ‘영구적 다수당(permanent majority)’ 시대가 왔다고 이야기했고, 1기 부시 정부 때 공화당 원내총무를 지냈던 T. 딜레이는 미국 정치질서의 ‘영구적 재편성(permanent realignment)’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 붕괴되었다. 그리고 자신들뿐 아니라 나라까지, 나아가 전 세계를 경제 쓰나미, 전쟁 쓰나미의 역풍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이 역풍 속에서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은 공화당과 보수집단이 남부 지역의 백인 정당, 시대적 변화에 동떨어진 군소집단으로 추락한 모습뿐이다.

    또 말로는 균형예산, 낮은 세금, 국가안보, 자유시장 정책 등등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배신하고 기업과 부유층,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 약탈집단이라는 것, 나아가 미국의 민주주의와 국제적 신뢰를 훼손한 집단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극단으로의 길, 돈에 대한 욕망

    왜 그렇게 되었을까? 간단히 말하면 보수주의 세력이 왜곡된 논리로 포장된 극단화의 길, 즉 사이비로 변모하면서 본래의 뜻과 기조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보수주의를 극단화의 길로 이끈 것일까?

    보수주의 세력이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의-시장만능-신자유주의, 네오콘-미국 패권주의, 기독교 복음주의-근본주의-내용과 논리는 물론 그 이데올로기를 밀고 나아가는 기본 동력이 극단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각각의 이데올로기가 상충하면서 빚어내는 모순 또한 보수주의를 극단의 길로 내몬 원인 중 하나이다.

    이들 이데올로기의 논리는 널리 알려져 있으니 여기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문제는 이런 보수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일까하는 점이다. 우선 두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하나는 사회적 윤리와 공공적 도덕의 울타리에서 해방된 돈-자본에 대한 욕망이고 또 하나는 타자에 대한 적개심에 기초한 힘-권력에의 원초적 욕망이다.

    미국 보수주의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레이건이 국가를 이끌어갈 때 가장 강조한 메시지를 M. 대처의 표현을 빌려 요약하면 ‘사회라는 것은 없다’이다. 명분은 근면과 자조였다. 그러면서 각종의 사회안전망 장치나 제도를 대폭 축소하거나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세상은 각자가 홀로 사는 치열한 경쟁의 장소라는 것, 따라서 개인은 이기주의적 사고에 기초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성공의 가장 확실한 척도는 물질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보다 자신의 물질적 성취가 더 중요하고 확실하며 의미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준 것이다.

    한편 이와는 정반대로 (대)기업과 부유층에게는 각종 규제나 세금면제 등의 혜택을 부여해주었다. 명분은 투자와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이었다. 결과는 물론 명분과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경제적 불평등은 날로 심해졌고 개인들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사회는 모듬살이의 공간이라기보다 대립과 갈등과 억압의 장소가 돼갔다. 정부는 특권층을 위해 봉사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이 와중에 강화된 것은 금권정치였다. 돈이 말하는 정치가 이루어졌고 민주주의는 부패해갔다. 보수주의 세력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돈-자본에 대한 몰지각한 탐욕을 사업가 정신, 효율성, 경쟁력 등의 이름으로 높이 치켜세우며 공식적으로 정당화해주었다.

    극단으로의 길, 힘에 대한 욕망

    보수주의 집단의 또 하나의 특징은 힘-권력에 대해 매우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주의 집단, 특히 보수주의 운동의 상층부 지도자들은-운동 조직이 크든 작든, 젊은 세대의 운동이든 나이 든 세대의 것이든, 남성 중심의 운동이든 여성 중심의 것이든, 또 정치, 사회, 종교, 대학 등 어떤 분야의 운동이든-힘과 권력에 대한 집요한 욕망을 품고 있고, 그것을 격렬히 추구한다.

    말할 나위 없이 정치집단이 가진 권력 욕망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에 기초한 원초적 욕망이 증오와 파탄을 낳는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적개심을 제어하는 것은 관용과 절제이라는 덕목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교조적 이데올로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관용과 절제라는 덕목이고 여기에 보수주의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바로 걸리게 된다.

    관용과 절제를 습득치 못한 이들의 욕망은 거의 종교적 신념 수준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거나, 훼손한다거나, 다른 주체가 더 정당하다고 할 경우 이들은 상대방을 이단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상대방은 배제의 대상으로 설정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은 불온한 존재, 위험한 존재, 혐오스러운 존재 등으로 선전된다.

    ‘폭력적 배제의 정치학(politics of violent exclusion)’을 구축하는 것이다. 50년대의 맥카시즘부터 오늘날의 이슬람 혐오증까지, 유색인종과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이 보수주의 미국 정치의 기본행태로 오래 전부터 자리 잡은 것은 이런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극단으로의 길-보수의 자기모순

    미국의 보수주의 세력이 극단화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자기모순 때문이다. 작은 정부론과 군사대국 추구 사이에 벌어지는 모순, 세금감면과 균형예산 사이의 모순, 국가채무와 무역적자와 경제성장 간의 모순,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부자유 사이의 모순, 개인의 자유와 종교적 전체주의 사이의 모순, 엘리트주의와 대중영합주의의 모순, 민주주의와 제국 아메리카의 모순, 그리고 자신들의 위선과 이중잣대와 거짓 등등의 문제에 대해 보수주의 세력은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기업과 부유층에 이득이 되는 것이라면 이데올로기 간의 모순, 정책 간의 모순을 이들은 문제 삼지 않는다. 왜? 정치는 기본적으로 가치의 분배작업이기 때문에 함께 나누어 먹을 가치와 자원이 있는 한 이념적 모순을 문제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떤 이들은 미국 보수주의 세력이 가지는 폭넓은 대응 역량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보수주의 체제가 오래가면 갈수록, 또 강하면 강할수록 사회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질 뿐이다. 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모순이 심화되지만 보수주의 세력은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없고 또 해결할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 정치가 이러한 모순의 집단적 폭발을 제어하기 위해 점점 더 강한 ‘사회통제적 경찰국가(social-control police state)’의 성격을 띠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노동조합을 철저히 외면했던 레이건이나, 헌법을 무시하면서 시민권을 제한코자 했던 부시 정권의 시도는 그 좋은 사례이다.

    보수의 미래, 당분간 없다

    2008년의 선거 이후 지금 미국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사회적 도덕을 풀어 헤치고 인간의 타락을 합리화해주는 메시지를 전파하거나, 특정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균열과 갈등, 모순을 사실상 방치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가 종래에는 자신뿐 아니라 사회전체를 파탄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30~40여 년간 집약적인 노력을 통해 헤게모니를 구축했지만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극단의 유전자를 제어하지 못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도그마로의 무한질주를 감행했다. 결국 이 때문에 보수주의 세력은 퇴보했지만 이들이 남기고 간 폐해가 너무 크고 이는 앞으로 미국을 길게 괴롭힐 요소이다.

    시장만능-신자유주의의 사생아인 물신주의와 자본의 전체주의, 네오콘-미국 패권주의와 우익 기독교 근본주의의 사생아인 공포와 피해망상의 전체주의로는 더 이상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를 지탱해 나갈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면서 미국의 보수세력은 후퇴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오바마 시대의 변화, 나아가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변화, 또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는 것은 잠시의 일회적 현상이 아니라 다른 패러다임의 정치경제 체제가 시작되는 전환의 한 부분이며, 또 그렇게 되도록 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이 고통스러운 경제와 전쟁의 쓰나미는 또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변화를 맞아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과거의 극단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지 않는 한 스스로의 미래는 상당 기간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소수자로 전락한 이후 지금까지 미국의 공화당과 보수집단들은 강경 일변도, 반대 일변도의 외골수만을 고집하고 있다. 아직 진로와 비전, 지도력 부재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세력?

    그럼 한국은? 한국의 보수주의 집단은 거의 예외 없이 미국의 짝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한 이데올로기들에 포획되어 있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의 극단적 보수주의자들보다 대체로 한 단위 높은 비상식과 광기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들에게 논리적 사고라든가 반성적 성찰 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더구나 지금 권세를 쥐고 있는 MB와 그 일행들에게는 목표수행을 위한 시간이 정해져 있다. 주어진 5년 시간 내에 그들의 최대 목표인 (대)기업과 부유층에 줄 수 있는 것을-자신들의 정치적 몫도 물론 포함하여-최대한 주려면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 실종된다.

    그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이유는 정치가 조성해내는 균열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들은 비판집단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온갖 모순과 문제와 갈등에 대해서는 관료기구와 사법기구를 동원, 최대한 억압한다. 사회통제적 경찰국가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촛불진압이나 용산 철거민의 죽음부터 최근의 MBC 사태는 이런 연장선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한편 그런 일에 시달리느라 관료기구와 사법기구의 구성원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정작 자신들이 본래 해야 할 일에 등한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없거나, 일손이 딸리거나, 자칫 권세집단에 누를 끼치는 것인지 판단해야 하거나, 더 높은 상층부에서 아무런 지시가 없거나 하기 때문에 대충 처리하거나 관행대로만 한다.

    물론 이 와중에 자신의 성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MB와 그 일행에 헌신하는 개인과 집단도 적지 않다. 국회와 법원을 포함해 한국의 정부는 따라서 기형적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자연히 정보의 왜곡과 은폐, 축소와 과장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조중동 같은 수구언론을 더하면 MB와 그 일행 스스로도 자신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또 어디로 가야할지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게 된다.

    MB 이후?

    지금 한국은 경제성장도, 사회적 평등도, 인간적 품위도 점점 더 열악해져가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무엇보다 MB와 그 일행이 민주주의 사회의 리더십이 ‘다스리는 경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나아가는 설득’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권력체제는 오래 갈 수 없고, 실패할 것이며, 또 그것을 심지어 MB와 그 일행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다급해지고, 따라서 좌충우돌의 실수가 잦고 더 과격해질 것이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럼 그 이후 어떻게 되느냐이다.

    여기에서 한국사회는 거의 막혀있다. 일부 (대)기업이나 특권층은 매우 행복해 하겠지만 이들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분노와 자포자기, 사분오열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점 대단히 두려운 일이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전환은 그저 일어나지 않는다. 앞에 한 미국 이야기는 보수주의자들이 자멸했으니 기다리면 된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절반의 이야기일 뿐이다. 질문을 반복해보자. 보수주의에 미래는 있는가? 답부터 질러 말하면 ‘당분간 없다’이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모두가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또 모두가 정말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정치인들은 물론 이제 대중들도 다시, 새롭게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미국은 그 일을 이루어냈다.

    그런 새로운 현실과 미래를 만들어내지 않는 한 한국사회에서 극단의 보수주의는 더욱 더 기승을 부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길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낼 가능성이 높다. 이번 울산 선거에서 나타나고 있는 지리멸렬한 단일화의 양상은 그 긴 고통의 또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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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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