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고양이 또는 무연고변사자
    By mywank
        2009년 04월 17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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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겨울, 어린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고양이가 죽어있어. 길 위에 누워 있길래 어떻게 저런 차가운 길바닥에서 잘까하고 다가갔더니 웃는 표정으로 죽어 있었어. 아무 데도 다친 것도 아닌데. 얼어 죽었나봐. ㅠㅠ.” 무섭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뭐가 무서워? 불쌍하지. 지나가는 차에 깔릴까봐 일단 옆에 옮겨줬는데 어쩌지?” 아, 이럴 때는 정말 어떻게 하라고 대답해야하지?

    고단하게 살다 쓸쓸하게 죽었을 이 고양이를 어디 언 땅이라도 파고 묻어준다면? 불법이다. 쓰레기봉투에 넣어 폐기물 처리함에 버린다면? 합법이다. 그냥 길 위에 둔다면? 우리가 수태 길에서 마주치는 떠돌이 생명들이 그렇듯, 제대로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에 무심한 자동차 바퀴에 이리저리 치어 처참한 모습으로 잠시 고개 돌리게 만들었다가 어느 결에 사라질 것이다.

       
      ▲ 영화 <우리집에 왜왔니>포스터

    집고양이가 십여 년을 너끈히 사는데 비해 길고양이의 수명은 고작 이삼 년이란다. 그 이삼 년 내내 쫓기고, 내몰리고, 잡혀가는 고양이에게서 황수아 감독은 수강(<우리집에 왜왔니>의 여주인공-편집자 주)의 모습을 보았나 보다. 한 번 사람에게 험한 일을 당하고 나면 고양이는 사람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이 가끔씩 먹을 것이라도 챙겨주기라도 하면, 고양이는 작은 동물을 잡아다 살포시 선물로 내밀 줄 아는 다정한 존재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껏해야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가끔 짝을 찾아 애절하게 애웅거리는 정도로 사람들 언저리에 있는 것뿐인데도 길에 사는 고양이를 멋대로 내쫓고, 포획하고, 죽이고 있다.

    무연고 변사자가 웃는 얼굴로 죽었다면

    <우리집에 왜왔니>는 바로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어느 시골 마을 비닐하우스 안에서 한겨울 밤 웬 가냘픈 아가씨가 죽어 있다. 살포시 웃는 얼굴로. 다친 데도 없고, 자살한 것 같지도 않고, 죽임당한 것 같지도 않으니 얼어 죽었나보다.

    이 무연고 변사자의 보잘 것 없는 소지품 꾸러미에서 나온 우편물 꾸러미의 주인을 경찰이 찾아가보니 그 인간도 참 해괴하다.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집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자초지종을 듣기도 전에 들입다 달아나기 시작한다. 겨우겨우 잡아다가 죽은 아가씨와의 관계가 어떤지나 좀 알아보려는데 이 남자, 도통 사진을 쳐다보려하질 않는다. 그 까닭이 사진 속 아가씨 표정이 웃고 있어서란다.

    젊디젊은 아가씨인데 웃는 게 낯선 모습이라는 무연고 변사자 수강. 허우대로는 사지육신 멀쩡해 보이는데 자기는 병이 있어서 모르겠다며 수강과의 사연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 병희. 이 둘은 어쩌다 서로 얽히게 되었던 걸까?

    젊은 남자와 여자의 사연을 다루는 영화지만 <우리집에 왜왔니>는 청춘남녀의 알콩달콩한 연애담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도 아니고, 구구절절한 사연이 사무치게 서러운 멜로 드라마도 아니다. 각각 깊은 상처를 지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 두 지점 사이를 오가며 빚어내는 치유의 기적에 대한 판타지다.

    스무 살 늦된 여고시절, 일곱 살이나 어린 앳된 중학생과 맺은 인연에 죽일 기세로 집착해서 전과 이력을 늘려가며 노숙자 스토커가 된 수강이나, 승승장구하는 이력으로 안정된 가정을 꾸리다 석연치 않은 탈영병의 난동으로 한 순간 임신 중인 아내를 잃고 자살 중독자가 된 병희의 독특한 캐릭터가 만난 상황은 우스꽝스럽다.

    아내의 죽음 이후 슬픔과 회한보다 더 큰 의혹과 배신감으로 폐인이 된 병희. 사회생활도, 가족관계도, 자신의 정신줄도 잡지 못하고 삼 년째 자살 모임을 가지면서 시도했던 이런저런 방법의 자살 기도가 다 실패하고 마침내 제 집 천장에 목을 매고 한참 숨이 넘어가려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수강.

    태연히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던지며 병희 집 현관에 들어서더니 죽겠다고 목을 맨 사람을 악착같이 끌어내려 다짜고짜 두들겨 패더니 꽁꽁 묶어 인질로 만들어 버린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자기 할 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좀 나중에 죽으라면서.

    죽음보다 더 절박한 사랑? 집착?

    수강의 할 일이라는 건 사랑에 대한 집착을 밀어붙이는 일이다. 자기로부터 자꾸만 도망치는 옛사랑 지민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없다면 말 그대로 산 채로 묻어버리겠다면서, 그러기에는 상대를 감시하기에 전망도 좋고 마당까지 있는 병희 집이 딱 좋단다.

       
      ▲ 영화의 한 장면. 수강은 병희의 집을 성공적으로 ‘점거’했고, 집주인 병희는 묶인 채 식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 일 마치기 전까지 병희는 가만히 있어줘야 할 판이다. ‘미친년’ 소리에 이골이 난 수강이 아저씨뻘인 병희를 다루는 품새를 보면 이제 애송이 지민은 독 안에 든 쥐다. 그러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사랑도 주고, 믿음도 주고, 목숨까지 구해준 수강의 마음을 몰라주고 여전히 ‘미친년’이라고 밀어내는 지민이 좀 못났기는 해도 생매장 당해야 할 정도로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때 길바닥에서 날아든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화내기는커녕 울기조차 못하던 수강은 자기 사랑을 한사코 피한다는 이유 하나로 지민을 묻어버리려 한다.

    그러나 병희의 말처럼 사랑은 일방적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 게 아니듯, 수강의 지민에 대한 일방적인 집착과 응징도 마음대로 되질 않아 어설픈 인질극이 어영부영 끝나버리면서 병희와의 인연도 끝난 듯했다. 함께 지내던 내내 소리 지르고, 화내고, 울던 수강을 끊어낸 병희는 다시 은둔 상태의 폐인으로 돌아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데, 이번에는 수강이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죽은 상태로 다시 찾아온 것이다.

    지민에게는 끔찍했던 수강의 집착이 병희에게는 구원이 된다. 지민을 감시하듯 몰래 카메라로 병희의 일상을 낱낱이 지켜보고, 병희의 우편물을 몰래몰래 챙기다가 죽은 수강은 ‘나는 이제 누굴 사랑하기 글렀고, 너는 이제 누구한테 사랑받기 글렀어’라며 모든 것을 포기한 병희에게 말을 건넨다.

    ‘아저씬 누군가를 사랑하기 글렀고, 난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글렀다는 게 맞는 거 같아. 하지만 그 반대는 어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저씬 누군가에게 사랑받고’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기적이야’라는 병희의 절망에 수강은 답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우리에게만 기적이 아니야. 그건 진짜 기적이야.’

       
      ▲ 영화의 한 장면. 지민을 납치해 이것저것 따지고 있는 수강.

    그건 진짜 기적이야!

    <우리집에 왜왔니>는 기적을 말하고, 기적을 믿는다. 사회에서 밀쳐지고, 버림받고, 나가떨어진 존재들이 그대로 바깥에서 쓸쓸히 죽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믿음은 슬프고 처량하다. 왜냐하면 그 치유와 구원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 그들끼리만 이루는 것이지 사회와의 화해나 사회 자체의 변화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한 장면, 담장 위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작은 길고양이의 모습은 수강의 애처로운 처지를 소소하지만 인상적으로 담아낸다. 누군가의 반려동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길고양이의 삶은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집집마다 광이 있고 찬장이 있던 시절, 곡식이며 찬거리를 축내는 쥐를 잡아주는 고양이는 그렇게 천대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서양 기독교 문화의 마녀 이미지에 딸려온 요물이라는 편견과 견고한 식품 저장 시설이 일상화된 도시 문명 속에서 애완의 대상이 되지 못한 길고양이의 처지는 너무도 고단해졌다.

    늘상 사람으로부터 위협받는 길고양이가 잔뜩 사람을 경계하게 되듯, 고아에 전과자에 노숙자 신세로 ‘미친년’이라는 조롱을 받으며 살아야했던 수강이 미움과 분노를 품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소중한 존재가 되지 못한 수강이 죽어가면서도 웃음을 띠며 누군가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것은 기적이 된다.

    그러나 기적은 일회적이다. 모든 고양이, 모든 외로운 이들에게는 기적이 아니라 배려가 필요하다. 이 세상은 사람, 그것도 가진 자만의 것이 아니다. 부디 손을 내밀지는 못하더라도 돌은 던지지 말자. 이 세상은 고양이가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 영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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