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금은 정치다”
        2009년 04월 15일 02: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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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부의 증세는 정당한 것이었을까? 모든 사회현상에는 양면이 있고 이를 재단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특히 정당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민주적 정당성은 그 후기로 갈수록 극도로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예컨대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게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진압한 사건은 결코 ‘민주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극복하는 것인데 세금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박정희 정권 하의 조세정책은 경제성장이라는 목적에 비추어 보면 합목적적이었다. 일시적으로는 자본가 계급의 분파의 이익을 희생시켜가면서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세제에 관련돼 다음과 같은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

    첫째, 조세는 정치 문제가 아니고, 정치 문제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이 매우 강해졌다. 법인세를 두 배 더 거두고 세율을 10%씩 더 올리는데, 이에 대한 갈등은 국회에서 해결되지 않고, 박정희 앞에서 재무부 관료와 공화당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브리핑으로 해결되었다는 사건이 상징하듯이 이는 정치 문제가 아니라 합리적 정책가의 결단의 산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세금은 ‘합리적 관료’가 정하는 것?

    공무원, 기업인, 대학교수, 언론인, 국회의원 등 264명을 상대로 한 1986년의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재정정책 결정에 끼치는 영향력에서 대통령은 ‘최고 수준’이라고 답한 사람이 190명으로 1위를 차지하였고, 경제기획원, 재무부는 132명으로 2위를 차지하였고, 정당은 27명, 경제단체와 사회단체는 각 2명에 불과하였다.

    ‘최고 수준’ 다음의 ‘상당 수준’까지 합할 경우 대통령은 245명, 경제기획원, 재무부는 237명이었다. 이 여론조사가 상징하는 바는 조세는 대통령과 재무부가 결정한다는 것으로 정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현재에도 경제부처 측에서는 매우 강력하며, 이들은 국회에서 조세 문제가 정치 쟁점화되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다. 실제로 조세가 정치 쟁점화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대선 경부터이다. 노무현 후보는 상속세, 증여세 완전포괄주의 도입을 주요한 공약으로 이야기했으며, 권영길 후보는 부유세를 주요공약으로 주창한 바 있다.

    둘째, 그러다 보니 국회는 입법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조세 문제에 대해서는 부차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지금도 대부분 국회의원이 발의하는 세법 개정안은 민원성 감세법안이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에도 정부의 네 차례 대규모 세법 개정시에 국회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여당은 청와대와 재무부안을 반대하지 못했고, 야당은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안에 대한 심각한 반대를 하지 못했다. 3~4 공화국 시기에 유일하게 커다란 정치 쟁점이 되어 야당이 조직적으로 반대투표를 한 법안 중 유일한 것은 부가가치세법안 정도였다.

    이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쟁점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그러다 보니 세법개정안에 대해서 야당의 주요 요구안은 면세점 인상이었다. 서민 생활안정을 위해 면세점을 인상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유일하게 국회에서 논의되는 것이 면세점 인상이다 보니 면세점이 과도하게 인상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세법은 부가가치세와 같은 소비세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고 면세점이 높아 근로소득세, 종합소득세를 내는 사람의 수가 1,000만 명 정도에 불과한 기형적 세제가 되었다.

    법을 초월하는 기발한 과세

    다음으로는 경제개발을 목적으로 증세를 하다 보니 조세를 매우 도구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징수과정에서의 적법절차는 경시되기가 일쑤였다. 납세자를 보호한다는 국세기본법이 1974년 중반에 제정되기는 했지만 상당기간 세무서는 원성의 온상이었다.

    1966년 국세청이 개청하고 나서 그해 내국세를 705억이나 걷었는데, 이는 전년도 413억에 비해서 68%나 늘어난 액수였다. 당시 이낙선 국세청장은 700억 목표 달성을 위해 자동차 번호판까지 700번으로 하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는데, 일선 세무서에는 그 목표치를 맞추기 위하여 ‘조상징수’라는 편법을 동원하였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방법인데 당시에는 가능하였다. 쉽게 말하면 700억 목표 달성을 위해 다음해에 낼 세금을 미리 내도록 하는 것인데, 이 때 이에 응하는 납세자에 대해서 다음 해에 징수할 때 세금을 감해주기도 했던 모양이다. 조삼모사가 생각나는 일화인데 어찌되었든 목표달성을 위해서 내년치 세금을 미리 걷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시절이다.

    당시에 소득세 납세시기만 되면 동대문시장에서는 세무서에 항의하기 위해서 철시가 종종 발생했던 모양이다. 신문기사도 이러한 내용을 심심치 않게 다루었는데, 상인이나 사업자들의 경우에 소득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정부가 1966년 하버드대 머스그레이브 교수에 자문한 바에 의하면 당시 사업소득 파악률은 33%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국세청에서 소득을 추계해서 조사해서 인정하는 이른바 ‘인정과세’가 일반적이었는데 이에 대한 불만은 대단했다.

    지금이야 세금계산서, 신용카드, 현금영수증 제도로 인하여 소득파악률이 제고되었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세무서의 자의가 개입할 여지 또한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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