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거민, 민주주의 그리고 계급전쟁
        2009년 04월 12일 07: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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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돌아보면 대학 3학년 이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한 번도 편안하게 글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의 여의치 못함, 내 자신의 학문적 깊이의 얕음, 그리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정 내 자신의 글에 ‘삶’을 그려 넣기가 쉽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글과 삶

       
      ▲책 표지. 

    그래서 시인을 더 좋아했고 지금도 5.18민중항쟁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많은 논문들보다 젊은 시절 읽었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와 「노동의 새벽」을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삼성과 같은 거대 건설자본과 국가권력의 공모에 의해 저질러진 ‘용산 학살’ 이후에는 글을 쓴다는 것이 더욱 쉽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이 점점 부끄러워집니다.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지금 내가 이 부당한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준거라고 위안을 하지만, 그래도 자괴감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한 권의 책이 힘을 줍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대한민국 개발잔혹사, 철거민의 삶』(삶이 보이는 창)이 그것입니다. 이 책은 철거민들의 삶의 애환과 그것을 위한 투쟁을 가감 없이 담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글로 옮긴 연정 등 15명의 필자들은 이 시대의 징표를 알리는 전령사들이며 그들이야말로 우리들의 일상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진정한 교사이자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철거민들은 이들의 펜을 통해 시종일관 피눈물로 외칩니다. “지금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하지만 자본과 권력은 조롱합니다. "사람이라고 모두 사람인가"라고요.

    70년대 동일방직 노동자들에게 구사대를 앞세워 똥바가지를 안기고 그것을 강제로 먹인 자본과 권력의 행태가 그나마 민주화되었다는 지금 이 시대 용역깡패를 앞세운 채 용산에서, 이 나라 곳곳의 철거지역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70년대 광주대단지와 80년대 상계동 철거민들의 삶의 아우성이 지금 용산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재생되고 있습니다.

    "내 꿈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이냐?"

    그 자들에게 철거민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 부당함에 저항하는 철거민들,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벌거벗은 주권자’일 뿐입니다. 그래도 철거민들은 그들에게 절규, 호소합니다. 왜 우리들의 소박하고 작은 삶의 희망마저 빼앗아 가느냐고. 망루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죽음과 삶을 넘나들었던 지석준은 “내 꿈과 희망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자본과 권력은 냉정하게 말합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런 것이니 원통하고 분하면 성공하라고요. 그들의 주구인 용역깡패들은 그렇지 않으면 쥐죽은 듯 살라며 온갖 협박을 합니다. 이렇기에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막대한 자금으로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철거지역을 무법천지로 만들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경찰은 그들을 비호하며 결국 특공대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인 후 무자비한 진압을 합니다.

    혹시 자본과 권력의 이런 발상과 행태들을 보면서 당혹스러움을 느끼셨나요. ‘피도 눈물도 없는’이 그들 삶의 기본 모토라면 어쩌시겠습니까. 단언하건데 이른바 공적 권력을 가지고 사적인 이익에 복무하는 그들이야말로 용역깡패보다 못한 양아치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그들의 발상과 행태의 이면에 중요한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냐고요. 현실의 모든 국가, 현실의 모든 민주주의는 그 누군가의 꿈과 희망을 빼앗을 때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자본과 권력은 철거민을, 비정규직을, 이주노동자를, 여성을, 소수자를 농락하고 그들을 숙주로 하여 살아갑니다. 이 책에서 인터뷰한 모든 철거민들이 이구동성으로 “꿈”, “희망”이라는 용어를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반증해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한 표를 구걸하던 자들

    현실의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주권을 위임받은 자가 자신의 존재 근거인 주권자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하면서 죽이는 그런 민주주의입니다. 대통령 이명박, 서울시장 오세훈, 지금의 용산구청장이 혹시 망자의 손을 잡으며 한 표를 구걸했던 그런 자들 아닌가요. 지금 그런 자들이 철거민들의 등에 비수를 꽂습니다.

    그렇다면 이 썩어문드러질 주권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 알량한 투표용지가 전부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고 양도 할 수 없는 삶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위임받은 주권이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 ‘국가’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용산참사 추모대회 모습.(사진=손기영 기자) 

    정치가 삶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정치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 정권, 의회와 사법부는 이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67세에 철거민이 된 최순경 할머니는 장애의 아픈 몸을 이끌며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합니다.

    “나도 권리가 있는데, 인권이 있는데, 내 생존권은 내가 찾아야겠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찾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찾아주겠느냐”고 반문합니다.

    할머니 자신의 인식 정도 여부와 무관하게 이 부당한 현실과 그것을 옹호하는 권력들에 반대하여 자신의 삶과 목소리를 찾아야겠다는 이러한 소박한 다짐과 실천이야말로 현실의 민주주의를 ‘더 많은 민주주의’로 밀고나가고자 하는 진정한 힘 아닌가요. 이것이 진정 민주주의의 교과서 아닌가요. 너무 과도한 의미 부여입니까.

    "지독한 계급전쟁"

    이 지점에 이르면 왜 이들이 불에 탄 형제자매의 주검을 차가운 영안실 냉동고에 보관한 채 끝을 알 수 없는 투쟁을 하고 있는지, 그들과 함께하는 양식 있는 분들이 이 사태를 “지독한 계급전쟁이며 끝을 보아야 하는 투쟁”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단순한 주거권, 영업권 투쟁이 아니라 주권의 소재를, 주권의 핵심 내용이 무엇인지를 둘러싼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를 포함하여 그 어떠한 권력도 그것이 누구이든 주권자의 삶을, 그것도 죄 없는 선량한 사람들의 그것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부정되어야 할 것은 그러한 부당한 권력이며 삶을 이윤으로 치환하는 자본일 뿐입니다.

    그런데 용산에서 울리는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은 진정 누구를 향한 것인가요. 그 분들이 붙들고 통곡하고 싶은 것은 주체할 수 없는 권력과 부에 어찌하지 못하는 자들, 한 세기에 올까 말까한 경제위기를 틈타 오히려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하면 더 착취하고 수탈하여 배를 불릴까를 고민하는 그런 자들, 지금 이 순간에도 공적인 권력을 가지고 치부하는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억울한 한마디 말이라도 들어주고, 조금 아파해주고 눈물 흘려줄 수 있는 그저 자신들과 같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에게 던지는 마지막 절규입니다. 그들이 진정 듣고 싶은 것은 “그들이 무슨 죄가 있냐?”는 평범한 우리들의 말 한마디입니다.

    그러한 절규가 너무 익숙한가요. 저 남쪽 현대미포조선의 해고된 비정규직노동자들, 그들과 함께 하는 정규직현장 노동자들 또한 말합니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다국적 기업의 횡포와 국가의 외면으로 약값이 너무 비싸 치료를 받지 못하는 에이즈환자들 또한 말합니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여기에 사람이 있다"

    살인적인 작업환경 속에서 일하다 죽어간 ‘2l세기 원진레이온’인 한국타이어의 노동자들 또한 말합니다.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이주노동자들 또한 호소합니다. “나도 사람이다. 더 이상 때리지 말라”고. 너무 비싼 등록금을 내려달라고 외치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학생들 또한 말합니다. “나도 배울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고.

    이제 너무도 익숙해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아무리 외쳐도 느낌이 없나요. 혹시 저 삶에 대한 외침들이 부담스러우신가요. 『여기 사람이 있다-대한민국 개발잔혹사, 철거민의 삶』을 읽으며 젊은 시절 내 마음을 아프고 저리게 했던 시를 다시 한 번 읊조립니다.

    “그 여자는 반 발자욱도 내디딜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문익환)

    이처럼 되풀이 되는 부당한 현실 속에서 숨 쉬는 우리는 진정 ‘사람’입니까.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서로 기대고 보듬으며 이 야만을 넘어서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는 그런 최소한의 소양을 지닌 사람(人)은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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