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가 되어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By mywank
        2009년 04월 10일 09:43 오전

    Print Friendly

       
      ▲ 영화 <그랜 토리노>의 포스터

    한국이 없었다면, 베트남이 없었다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현대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노년의 미국인이 대답한다.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넓디넓은 태평양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나라에서 벌였던 피와 총탄으로 얼룩진 전쟁들을 통해야 젊은 날이 기억되고, 영웅이 되든 무법자가 되든 성마른 이웃이 되든 오늘날의 미국인으로 늙어가게 된다고. 그래서 자신도, 가족도, 이웃도, 나라도, 심지어 신조차도 제대로 믿고 사랑할 수 없다고.

    이 황폐하기 그지없는 삶에서 그나마 보람으로 여길만한 것은 자신이 정성을 쏟아 만들어낸 것, 피가 아니라 땀을 흘려 세상에 굴러다니게 한 것, 가장 미국적인 자동차 포드 그랜 토리노. 1972년도에 포드가 내놓은 이 멋진 자동차는 멋스럽고, 커다랗지만 실용과 효율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에는 맞지 않아 단종된 ‘클래식 카’다.

    자신이 직접 조립했던 그랜 토리노를 애지중지하는 월터 코왈스키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고, 미국 경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일한 산업역군이고, 대부분의 백인 미국인처럼 이민자의 후예다. 폴란드 출신임을 드러내는 코왈스키라는 성을 가진 데서 알 수 있듯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사

    그리고 이 월터 코왈스키를 만들고, 연기하고, 찍어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무법천지 서부를 주름잡던 총잡이였고, 폭력을 처단하기 위한다는 명분을 위해 무자비한 복수를 마다하지 않던 냉혈한 형사였고, 가장 미국적인 번드르르한 장르 영화 배우에서 미국의 헝클어진 뒷모습을 들추어내는 감독으로 거듭난 미국영화의 역사 그 자체다.

    그래서 <그랜 토리노>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미국을 비추고, 미국영화사를 비추고, 미국 영화의 주역이었던 감독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런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 뿐 아니라 영화 전체에는 온통 자랑스러운 영광 대신 회한과 죄의식으로 펴지지 못하는 주름이 깊이 새겨져있다.

    미국의 가치를 만들고 지켜온 월터 코왈스키의 아내를 추모하는 장례식에서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이미 월터 코왈스키는 자신의 삶을 둘러싼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존재이며, 그 고립에 냉소로 맞서는 불퉁스런 존재다.

    이런 월터를 참회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아내는 세상을 떠나버렸고, 일본 자동차 딜러인 아들 부부는 월터의 삶이 깃든 집을 내놓고 양로원에 가서 남은 삶을 보내라며 성화를 부리고, 마지못해 장례식에 자리한 손녀는 멋들어진 그랜 토리노를 물려받을 궁리 뿐 할아버지에 대한 존중은 매니큐어로 칠갑한 손톱 끝만큼도 없다.

       
      ▲영화의 한 장면

    그러니, 함께 늙어가는 개를 벗 삼아 맥주나 마시며 자신의 고립된 세계를 지키려는 월터의 팍팍함이 공허하긴 해도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인의 안간힘이려니 싶은데, 자꾸만 참회하라며 불쑥불쑥 나타나는 애송이 사제며, 베트남 전쟁에서 밀려나 슬럼화된 동네를 에워싼 소수민족 흐몽족 이웃들의 낯설고 소란스런 생활방식 때문에 그마저도 편치 않다.

    그러더니 이웃집 소년 타오가 몰래 차고에 숨어들어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 하고, 월터는 총을 들어 그 소년을 쫓아버린다. 이렇게 해서 범죄와 총, 월터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세상과 만나는 고리가 만들어진다.

    히스패닉계 갱단은 흐몽족 소년을 괴롭히고, 흐몽족 갱단은 동족 소년을 보호한답시고 조직에 끌어들이려 안달이고, 흑인 불량배들은 흐몽족 소녀를 희롱하는 세상에서 이탈리아계며 아일랜드계 백인 친구들과 이룬 거친 남성적 세계에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맥주나 홀짝이기에는 월터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회한과 상처가 자꾸 덧나 벌어진다.

    무공훈장, 소년 병사…

    상처 위에 두껍게 굳어있던 딱지 아래에는 한국전쟁에서 남겨진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여전히 아물지 않고 욱신거리고 있었다. 월터의 무공훈장은 항복하려던 어린 소년 병사들에게 총질을 해대고 받았던 죄많은 과거의 피로 얼룩져 있었고, 소심하기 그지없어 폭력배들에게 매양 볶이는 타오는 그 과거를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월터는 폭력배들로부터 타오를 구하고 그 상처를 치유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뚝뚝한 월터를 부드럽게 세상으로 끌어내는 타오의 누나 수가 내미는 손을 잡고 과거를 벗어나 현실과 화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애송이 사제 앞에 무릎 꿇고 고해성사를 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참회의 방법을 찾아 편한 노년을 보낼 희망을 품어도 좋았으리라.

       
      ▲ 영화의 한 장면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월터에게 더 큰 짐을 자꾸만 부려놓는다. 불량한 청년들이 문제가 아니라 이들을 불량하게 만드는 미국사회가 문제다. 이런 미국사회를 만들어온 것은 월터가 살아온 과거다.

    폭력을 더 센 폭력으로 이기려는 순간, 고래싸움에 터지는 건 항상 새우등이다. 타오를 몰아붙이는 폭력배들에게 월터가 휘두른 주먹이 되돌아와 월터가 지키고자 했던 작은 울타리를 부수고 타오의 누이를 짓밟아버린다. 이 처절한 폭력의 악순환에서 월터는 시험에 든다. 피를 피로, 총을 총으로 되갚을 것인가, 폭력의 근원을 바로 잡을 것인가.

    월터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 전체, 영화 이력 전체를 걸어야 하는 지독한 과거의 업보를 끊어내기 위해서 홀로 나서는 노인의 한 걸음 한 걸음, 손놀림 하나하나, 실룩이는 주름살 마디마디에서 세상 전체를 겪어낸 자만이 뿜을 수 있는 거대한 울림이 배어 나온다. 그렇게 월터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

    <체인질링>에서 불의에 맞서는 주인공 크리스틴의 ‘이 싸움을 시작한 건 내가 아니지만 끝은 내가 내겠어’라는 다짐은 <그랜 토리노>에서 ‘나는 손에 이미 피를 묻혔으니까, 나는 이미 더럽혀졌으니까, 그래서 나 혼자 가야 하는 거야’라는 월터의 선택과 같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태어났던 시기의 미국을 톺아보는 <체인질링>과 자신이 살아낸 미국의 모습을 들추는 <그랜 토리노>를 같은 해에 만들어낸 팔순 어르신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존재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랜 토리노는 포드 자동차의 이름이지만 영화 <그랜 토리노>는 포드 자동차를 넘어선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정형화한 포드는 자동차뿐 아니라 포디즘이라는 용어도 만들어냈다. 포디즘은 일관조립 생산방식을 통해 생산성을 증대시켜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보장해 주면서도 높은 이윤을 확보한다는 전략을 내걸고 미국의 포드 자동차회사에서 1910년대부터 시작된 생산방식이다.

       
      ▲ 영화의 한 장면

    자동차처럼 표준화된 한 가지 상품을 생산하면서, 전체 생산과정을 수많은 세부조립작업으로 나누고, 각 작업을 개별 노동자들에게 전담시킨 다음, 노동자들이 작업대상을 찾아다니며 부품을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위치에서 작업하는 노동자들에게 작업대상들이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옮겨지도록 하는 대량생산체계를 일컫는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수 조립한

    각각의 노동자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기계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의 작업을 통제한다. 이런 작업 체계에서는 일을 하기 위해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노동은 자본에 철저히 예속되고 노동자는 기계와 자기가 만든 생산물에 대해 철저하게 소외된다.

    그런데 월터 코왈스키는 그랜 토리노를 직접 조립하고, 단종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처음의 아름다움과 기능을 잃지 않도록 관리하며, 그 자동차를 재산이 아니라 삶에서 가꾸고 지켜야할 소중한 가치로 만든다.

       
      ▲ 영화에 등장하는 ‘그랜 토리노’

    차고 가득한 수많은 공구들은 자신의 자동차만이 아니라 이웃의 망가진 가구나 지붕을 고치기 위해서도 쓰이고, 자신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이웃집 소년에게 할 일을 가르치고 찾아주기 위해서도 쓰인다. 포디즘은 사람을 소외시키지만, <그랜 토리노>는 사람을 이어준다.

    영화 말미에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몰고 떠나는 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면서 영화 내내 음악을 아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거칠지만 나직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실어 ‘그랜 토리노’를 노래한다. 타오가 가는 길을 배웅이라도 하듯.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렇게 영화 전체에 스며들어 오래오래 마음속에 울림을 만들어 내면서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역사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

    필자소개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