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쇄된 도시, 화염 속에서
        2009년 04월 06일 10: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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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3~4일 60주년을 맞이하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인 나토(NATO) 회담이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열렸다.

    1966년 독립적 외교노선을 표방한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의 이른바 드골주의에 의해 나토 통합군을 탈퇴한 지 43년 만에 사르코지 대통령이 다시 나토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한 후 프랑스 내 좌파들의 반대가 이어졌지만, 사르코지 대통령은 “보다 강한 프랑스를 위하여 미국과 대서양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독립노선 포기한 사르코지

    이에 사회당의 마틴 오브리 당수는 “친미주의의 또 다른 표현인 ‘범대서양주의’에 합류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하지도 옳지도 않은 일"이라고 표명을 하였고 반자본주의신당 NPA를 비롯한 좌파당과 공산당은 반나토 시위를 조직할 것이라고 맞섰다.

    1949년 구소련에 대항하기 위하여 창설된 나토는 냉전 체제 이후 정체성을 잃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아프간 파병을 둘러싸고 미국과의 관계 질서 속에서 편입되어 있다. 이번 회담에서도 유럽 측은 파병에 관해서 적극 찬성을 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대 아프간 정책에는 동의를 표했으며 5천 명의 추가 파병안도 통과시켰다.

       
      ▲ 지난 4일 스트라스부르그 (사진=박지연 파리통신원)

    지난 2월 반자본주의신당 NPA 창당대회 과정에서 국제 시위를 조직하기로 결의가 된 상태에서 사르코지 정부는 스트라스부르그에 대한 통제를 일찌감치 시작하며 모든 시위 금지령을 내렸을 뿐 아니라 군부대까지 동원된 경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반나토 시위에 참가하기로 한 NPA, 공산당, 좌파당은 “이것은 계엄령이다”며 비난을 시작하였고 어떤 경우에도 시위는 감행할 것임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포함한 28개국 국가 정상들이 모이는 이 작은 도시는 극도의 긴장감이 넘쳤다.

    4월 2일 런던에서 G20정상회담에 참석했던 정상들만 그대로 프랑스로 옮아오는 것이 아니라, 시위대까지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같이 넘어옴으로써 국제 시위의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더군다나 이미 2일 런던 시위 도중 경찰 진압과정 중에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은 직후라 사르코지 정부와 시위조직위원회는 둘 다 초긴장 상태였다.

    파리에서 출발하는 시위대는 두 편으로 나누어졌다. 스트라스부르그가 봉쇄되기 전에 들어가는 팀과 4일 토요일 시위를 위해 그 전날 밤에 무박3일 코스로 움직이는 팀으로 분리되어, NPA의 올리비에 브장스노를 비롯한 시위 조직위는 일찌감치 스트라스브르그에 도착하였고, 3일 밤부터 적은 수나마 시가지 곳곳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3일 밤 11시 30분 파리에서 출발하는 팀은 여러 대의 버스에 나눠 출발하였다. 버스 안에서 책임자는 시위 경로에 대한 설명과 행동 요령에 대해 설명했다. 시위가 강제해산될 경우를 대비한 10군데 경로가 적힌 지도가 배포되었으며, 이는 절대적으로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되기에 이를 위해 비밀경찰 인식요령에 대한 설명도 첨가되었다. 

       
      ▲ 사진=박지연 파리통신원

    연행될 경우를 대비해 모두들 팔목에 볼펜으로 변호사의 전화번호를 적었으며, 참가자들의 연락처 또한 각 버스의 책임자에게 남기는 등 분위기가 여타의 시위와 다름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보통 5시간이면 도착하는 스트라스부르그를 그 다음날 아침 10시까지도 당도하지 못했다. 모든 도로는 막혔으며 통제당했다. 같이 움직였던 버스들도 각개로 길을 뚫기로 하고 이제 버스 기사의 재량에 맡겨졌다.

    걸어서 스트라스부르그로

    결국은 독일 국경까지 가서도 스트라스부르그로 들어가는 길은 찾지 못했고, 기사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시위대를 내려놓으며 이곳이 제일 가까우니 걸어가라 하였다. 도심에서 꽤 떨어진 곳임에도 스트라스부르그를 중심으로 도시 전체가 철조망에 둘러싸여 있었다.

    걷는 도중 속속 다른 시위대와 합류가 되었고, 평온한 벌판이 펼쳐진 시골 마을 주민들은 놀라서 뛰어나와 사진 찍기가 바빴다. 1인 1깃발의 마르크스레닌혁명주의자 그룹, 크루드족해방단, 영국에서 온 반전단체 그룹 등이 열을 지어 걷는 도중에 특이한 단체가 나타났다.

    모두 검은 청바지에 검은 후드티를 들러 입고 얼굴도 검은 두건으로 가렸으며 검은 장갑에 수영안경이나 스키고글을 쓴 이들은 깃발도 하나 없이 조용히 걷기만 했다. 이들이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복장이었다.

       
      ▲ 사진=박지연 파리통신원

    오전 11시경 도시가 보이자 무장경찰들도 함께 보였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걷던 팀이 뒤로 빠지자 맑스레닌혁명주의자들이 깃발을 분리해서 깃발은 목에 두르고 각목을 들고 뛰었다. 왜 1인 1깃발인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검은 복장의 청년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다.

    두 시간동안 쉬지 않고 쏘아대는 최루탄과 지랄탄으로 방독면을 쓴 기자들도 나가떨어지는데, 이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검은 복장의 청년들에게 정체가 누구냐는 질문에 자신들은 조직이 없는 그냥 블랙블럭이라고 말했지만, 이들은 매우 잘 조직되었고 나름의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엄호할 수 있는 방패와 바르케이트를 만들고, 지랄탄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발로 차거나 다시 되던지고 있었다. 어차피 눈도 뜰 수도 없었지만 자욱한 최루탄 연기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폭음탄은 소리만 위력적인 것이 아니라 터지면서 파편이 다리에 박혔다.

    부상자들이 속출했고 보도블록도 모자라는 판이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 뛰어온 또 다른 독일의 블랙블럭이 합류하였고 경찰의 봉쇄선이 뚫렸다. 이들은 영어, 불어, 독어를 쓰는 국제 무정부주의자 그룹인 듯했다.

       
      ▲ 사진=박지연 파리통신원

    오후 1시경 거의 모든 시위대가 도시 외곽에서 합류하였다. 도심으로 미리 들어간 시위대의 소식은 알 길이 없으나, 이곳에서는 평화롭게 약 3만 명이 모여 반전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정당들이 주로 주도하고 반전 평화단체들이 눈에 띄었다.

    영국, 스페인, 이태리, 독일뿐만 아니라 멀리 남미와 일본에서 온 반전단체들도 플래카드를 들고 전단지를 나누며 함께하였다. "60살을 맞이하는 나토는 이제 은퇴해야 한다, 나토는 살인마, 나토는 전쟁이다"라는 구호 속에서 콘서트는 진행되었다.

    최루탄, 헬리콥터, 화염

    2시경 동시 다발적인 폭발음이 들렸고, 잠시 후 콘서트장 너머에서 화염이 올라왔다. 콘서트 도중에 없어진 블랙블럭이 이쪽으로 밀려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야외 콘서트장 위로는 헬리콥터가 수없이 떴고, 최루탄이 다시 뒤덮였다. 경찰이 참가자들을 에워싸며 한쪽으로 몰았고, 다시 과격단체들과 대치가 일어났을 때, 콘서트는 중단되었고 정당들이 선두를 형성하면서 시위대를 이동시켰다.

    화염에 싸인 곳을 사진 찍기 위해서 시위대와 반대 방향인 경찰 쪽을 향해서 뛰는데, 경찰들이 직격탄을 쏘기 시작했다. 나무 뒤에 숨었다가 카메라를 보이며 두 손을 다 들어 보인 뒤에야 멈췄지만, 움직이는 내내 계속 사람을 겨냥하고 있는 경찰들은 몹시 흥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화염은 조금 떨어진 국경 부근의 검문소, 길 한 곳을 마주하며 서 있는 은행이 들어서 있는 상가 건물과 프랑스 거대 초국적 기업의 호텔인 Ibis호텔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 불타는 국경검문소(맨 위), 상가와 은행(가운데), 이비스 호텔 (사진=박지연 통신원)

    다행히 낮 시간이어서 화재로 인한 사상자는 없었지만, 멀리서 날아오는 검은 연기와 바로 앞 마주 보고 있는 두 건물에서 일어선 화염은 사진을 찍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시위대의 반격이 있었고 경찰들은 우왕좌왕했고, 전세가 밀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시위대를 쫒아서 길을 가는 도중 문 닫힌 가게 하나가 털렸음이 보였다. 도심으로 들어가지 못한데다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서 그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생긴 허기는 참을 수 있어도, 엄청난 최루탄 속에서도 물 한 모금 없는 상황이 얼마나 극한적인지 몸소 이해하고 있어도 이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프레드 스피츠씨는 언론에서 방금 일어난 방화와 지금의 약탈은 분리해서 다뤄줘야 하는데, 그냥 다 폭도로 몰아갈 것이 오히려 걱정된다고 대답하였다.

    특히 검문소가 불탄 것은 폭력적 국가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일 뿐 아니라 최근 몇 일간 스트라스부르그 주민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생각한다면 자업자득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NPA 당원 일부는 프랑스 기자들에게 오늘 시위는 두 그룹이 존재하고 자신들처럼 주류들이 내는 목소리와 시위 방식은 외면한 채 언론은 오로지 과격단체의 방화, 폭도에만 관심을 가지고 신문에 사진만을 내보낼 것 아니냐며 항의했다. 이 목소리에는 과격단체에 대한 불만들이 내포돼 있었다.

    서로의 꿈이 이루어지길

       
      ▲ 시위대에게 물을 나눠주는 어린 소녀와 엄마 (사진=박지연 파리통신원)

    전열을 가다듬은 경찰은 다시 모든 다리를 중심으로 철판과 쇠사슬로 막았다. 살수차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오히려 “물이다!”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토끼몰이식으로 길에 갇힌 시위대는 강으로 뛰어들지 않는 한 다른 출구가 없었고, 시위대는 철도위의 화물기차 두 량을 움직여서 바리케이트로 만들고 해가 질 때까지 지루한 싸움을 이어나갔다.

    머리가 깨진 이들, 다리에 파편이 박힌 이들,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은 이들은 길가에 누워 치료를 받았고 노약자들은 시위대 뒤편에서 구호를 외치며 지원하고 반전 평화단체들은 평화 깃발을 흔들었지만 경찰의 폭력 앞에선 무지갯빛 깃발도 별 다른 효력이 없었다. 많은 이들이 연행되었으며 다쳤다.

    밤 10시경 파리로 돌아오는 버스로 모였을 때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의 무사함이 너무 반가웠다. 모이기로 한 지점은 버스가 들어올 수 없어서 불빛 하나 없는 외곽도로를 걷고 걸어서 지치고 초췌함에 찌든 이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조용해진 스트라스부르그를 뒤로 남기고 버스는 출발하였고 도착한 파리의 아침은 벌써 신문들이 가판대에 꽂혀 있었다. 제목들은 한결같이 ‘초특급 폭력 속의 스트라스부르그’, ‘스트라스부르그 화염에 휩싸이다’ 로 장식되었다.

       
      ▲ 사진=박지연 파리통신원

    누가 그 예쁜 얼굴에 검은 복면을 씌웠는지, 화사한 봄날 꽃나무 아래서 즐거워야 할 청춘을 화염병을 들게 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옥 같은 하루였대도 머리에 꽃을 꽂고 맨발로 춤을 추던 반전 평화주의자들도, 들어야 할 깃발조차도 변변찮았던 크루드족들에게도, 들어본지 너무 오래되어 그 이름만으로도 반가웠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 모두들에게 원하는 세상을 향해 내딛는 한걸음이 되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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