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 증세했던 박정희 정권
        2009년 04월 06일 09: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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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권에서 모든 것이 현대 한국의 거의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18년간의 통치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우리의 모든 제도 또한 그에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제도적으로 본다면 일제시대가 현재에 미친 영향보다 3~4 공화국 시기가 현재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 현행 세법의 장점과 단점 모두 이 시기에 유래한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고 김대중 정부가 부동산으로 경기부양하기 위해서 없애버린 토지초과이득세의 경우 1967년 제정된 ‘부동산투기 억제에 관한 특별조치세’ 중 공지에 대해서 2년마다 공지차익을 과세하는 제도가 시발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네 차례에 걸친 세법 전면개정을 하였는데 이 때 한국세제의 골간이 형성되었고, 현재의 거의 모든 제도가 생겨났다.

    그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정권은 재벌에게 온갖 특혜를 주어 특권적 재벌을 육성하여 정경유착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의 산업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었고 손호철 교수의 입론대로 전체 지배 계급의 장기적 경제적, 정치적 이해를 위해 부르조아의 단기적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희생시킨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세제의 측면에서 본다면 당시 지배계급의 장기적 경제적 이해는 경제개발자금 조달을 위한 저축증가였다. 개인저축 증가를 위해 은행을 국유화하는 한편 이자소득세를 폐지하고 금융에 대한 비실명거래를 금지하지 않았다.

    정부저축 증가를 위해서 박정희 정부는 지속적 증세를 추진하였고, 실제로 네 번의 세법 전면개정도 증세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 과정에서 단기적으로 증세가 일부 지배계급 분파의 불이익이 되더라도 이를 추진하는 것이 전체 지배계급 입장에서는 선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당시 경제기획원은 매년 조세부담률을 1%씩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5개년도에는 16.3%를 목표로 하였다. 이는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엄청난 증세 목표였다. 조세부담률이 28%일 때 1%씩 올리는 것과 11% 때일 때 1% 씩 올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박정희 정권은 매년 세금액수를 10%씩 올리려고 계획했었고, 실제로 조세는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GDP 성장률이 조세증가율을 상쇄할만큼 가파랐기 때문에 조세부담률이 그만큼 증가하지는 않았다.

    당시 한국은 증세를 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1961년 정부의 세입예산 중 조세로 충당하는 비중은 30.4%에 불과했고, 미국의 원조인 대충자금이 43.2%에 달한 상태였다. 즉, 한국 정부는 미국 원조가 없으면 예산의 절반 가까이를 마련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예산의 측면에서 본다면 미국의 식민지가 분명했다. 대충자금이 10% 미만으로 줄어든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총자본의 입장에서

    초기 박정희 정권은 아주 전통적 방법으로 세수를 늘리려고 하였다. 1961년 세법 개정시에는 탁주(막걸리) 1석에 400환씩 과세하던 것을 3,000환으로, 맥주 1석에 32,500환씩 과세하던 것을 97,500환으로 인상하였다.

    당시 가장 대중적으로 소비하던 것이 탁주였는데 무려 세율을 7.5배나 올린 것이었고, 고급술이었던 맥주 또한 3배나 올린 것이었다. 주세 인상은 매우 손쉬운 방법이었고, 당시 한국경제는 산업이 전반적으로 발달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세가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술은 어느 나라나 세율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술도 술 나름이라 당시 탁주나 지금 소주, 맥주와 같은 대중적 소비재에 대해서 높은 세율의 과세를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반민중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정당화되기는 어렵다. 게다가 1961년 당시에 주세를 올린 것은 건강상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 크게 문제가 안 되는 주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노무현 정부가 실제로 2005년도 주세를 인상하여 복지를 확충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반발에 밀려 그 계획을 철회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노무현 정부의 무소신을 보면서 “죽은 박정희가 산 노무현을 이긴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의 조세에 대한 무소신은 이명박의 무지막지한 감세를 불러오게 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주세와 같은 간접세만 증세한 것이 아니었다. 소득세나 법인세와 같은 세금도 상당한 폭으로 증세를 하였다. 오바마의 사례에서도 보여지듯 소득세나 법인세의 인상 없이 1년에 조세부담률을 GDP 대비 1%씩 증가시킬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득세나 법인세를 포함한 국세의 증세는 1965년 설립된 국세청이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65년의 내국세수가 413억 원이었는데 1966년에는 705억 원을 징수하여 내국세수가 68.6%가 증가하였다. 특히 법인세는 1965년에 비해 1966년은 무려 91.1%가 증가하였다.

    1년새 법인세 두 배

    법인세를 전 해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걷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현재 우리가 법인세를 작년보다 두 배 가까이 올해 걷는다면 30조 이상을 더 걷어야 하는 일이다.

    1967년 세법 개정 시에는 비공개법인의 법인세율을 10% 인상하기도 했었다. 1967년 당시만 해도 주식시장에 상장된 법인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법인의 세율을 인상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대해서 막 형성되던 산업가 계층은 반발하였다.

    당시에는 대놓고 반발할 수 없으니 이들은 자신들이 정치자금을 제공하던 여당인 공화당을 동원하였고, 이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재무부 관료들은 경제개발 제원 마련을 위해서는 애초의 세법개정안인 원안을 고수하고자 하였으나 공화당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박정희는 전 국무위원과 전 공화당 간부들이 참석한 하루 반 동안의 브리핑에서 공화당 인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원안대로 국회에 제출하기로 함으로써 논란을 종식시켰다고 한다.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이 관료적 합리성을 가지고 세금 문제에 대처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좌파적 시각에서 보면 국가가 지배계급의 장기적 경제적 이해를 중시하여 지배계급 분파의 단기적 이해를 희생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었던 시대였지만, 박정희 정권 내내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지게 된다. 18년간 이 정권은 별 다른 도전 없이 철권을 휘두른 것처럼 보였지만 이 정부가 확보한 정당성은 절대 안정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가가치세 파동에서 드러나듯이 세금의 측면에서도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은 절대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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