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항의 중심은 중간 계층들이었다
        2009년 04월 01일 09:31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세계 체제가 대공황을 당할 때에 그 체제의 본래 법칙들은 가시적으로 노골화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대공황만큼 사회과학 공부에 도움되는 계기는 없을 것입니다. 대공황 때에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지켜보기만 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심층적 원리가 무엇인지 당장에 알아차리게 되지요. 가장 중요한 법칙 2개를 열거해봅시다:

    1. 약육강식

       
      ▲ 필자

    그건 이 체제의 원래부터의 특성이지만 대공황 때만큼 실감될 때도 없어요. 이 법칙의 작동은 여러 측면에서 고찰해볼 수 있습니다:

    1) 지리적 측면 : 세계 체제의 핵심부에서는 ‘부양책’이라도 쓸만한 여윳돈이 있지만, 주변부는 물론 준주변부의 상당수 약체들은 운신의 폭이 훨씬 좁습니다.

    예컨대 여름쯤 되면 디폴트에 빠질 위험성이 상당히 있는 라트비아나 우크라이나와 같은 유럽 연합 주위 준주변부의 약체들 같으면 자체적 ‘부양책’이 아니고 IMF과 유럽 연합의 ‘지원금’으로 지금 그 경제적 생명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금년에 8% 쯤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듯한 앙골라의 경우에는 ‘부양책’이 문제가 아니고 아사 사태 대비가 문제지만, 그 앙골라에서 떼돈을 버는 노르웨이 석유 등 재벌들에게는 그게 별로 관심사도 아닌듯합니다.

    대공황 때에는 약체들이 강자들의 먹이가 됨으로써 강자들은 보다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컨대 중국이 계획대로 5~6% 이상의 성장할 경우 일부 중국 대기업들에게는 이번 위기는 실로 기회가 될지도 모르지요.

    2) 계층적 측면 : 고통을 당하는 순서는 ‘밑으로부터’입니다. 직장에서 내쫓기고 단속반 사냥감이 되는 외국인 노동자부터, 일감이 없어지는 일용직 노동자부터, 부도나는 영세상인부터가 순서입니다. 고국의 빚을 갚을 길이 없는데 직장을 잃은 외국인 노동자, 부도 나서 처자를 먹여줄 방도가 없는 영세 상인, 일감이 없어진 ‘노가다’ 노동자는 얼마든지 자살로 몰릴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숙련도가 있는 비정규직도 위험하지만 위험도가 덜 되는 것이고, 대기업 정규직은 – 한국 경제가 아예 파산으로 치닫지 않는 한 – 소득 절감 정도의 고통으로만 국한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는 위기를 기회 삼아 현금 쌓아두기에 들어간 일부 기업에서는 기업잉여를 불려 ‘득’을 볼 수도 있고, 이번 정부의 망상적 토건 프로젝트로 득을 볼 기업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사회의 먹이사슬이란 뭔지 다 보입니다.

    3) 연령적 측면 : ’20대 백수’와 50대 이후의 퇴직자/실업자들은 가장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노동 시장이 철저하게 젠더화돼 있기에 ‘여성이라는 불리한 점’을 태생적으로 가진 이들도 비교적 큰 고통을 당하게 돼 있습니다.

    2. ‘저항 중심으로서의 중간 계층들’

    일반적 통념과 달리 저항을 주도하는 이들은 꼭 ‘가장 어렵게 사는’ 이들은 아닙니다. 1960년 4월, 1987년 6월의 데모 학생들도 상당수 중산층이었지만, 1917년 2월에 러시아 제정 정권의 타도에 앞장선 페트로그라드의 브보르그스카야 스토로나의 고숙련 금속공들도 그들의 적대자인 경찰들보다 월급을 더 많이 (한달에 60~70루블 내지 그 이상) 받았습니다.

    1987년, 1996-1997년 한국 파업 운동도 고숙련 정규직 중심이었습니다. ‘맨 밑’의 고통은 아주 커도 조직화될 만한 여력은 많이 부족하고, 외국인 노동자나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파업’이라는 무기를 빼앗기고 만 상태입니다.

       
      ▲ 2009년 2월 여의도에서 열린 이명박 정권 심판 전국노동자대회 (사진=노동과 세계)

    즉 최처 계층들이란 원자화된 상태에서 ‘생존 전투’에 몰두해 있는 만큼 지배자들에게 집단적으로 대들기가 아주 힘들어요.

    반대로 임금근로자 그룹의 중위, 상위 부분을 이루는 광범위한 의미의 중간 계층들(중간/고소득 정규직 노동자, 공무원 노동자, 전문직 노동자 등)은 정치의식의 발달 기회가 많은데다가 조직화의 기회가 보다 많이 주어져 있고 집단 행동을 취할 만한 여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은 선두에 나선다면 최저 계층들을 포함한 광범위한 ‘민중’ 복합 그룹의 저항적 동원은 가능할 듯합니다.

    한국의 체제 안에서 이와 같은 ‘저항적 동원’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원칙상 저항에 앞장서야 할 20대 노동시장 신규 진입자 및 신규 전문직 채용자 – 대학생부터 젊은 도심 사무실 월급쟁이까지 – 의 ‘생존 전투’에의 포획 상태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등록금 마련하느라고, 없는 직장을 찾느라고, 결혼해서 살 집을 마련하느라고, 직장에서 안잘리려고 버티느라고, 저항이고 뭐고 신경쓸 틈은 없지요. 그게 바로 한국적 체제의 최강의 무기 중의 하나입니다.

    여름 휴가 5주의 나라와 기껏해봐야 4~5일 쉬는 나라에서 ‘저항’에 나설 만한 근로자의 여력은 다를 수밖에 없는 법이지요. 한국적 체제란 일단 ‘딴 생각’을 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절망적 정서가 어느 정도 고착되어 대중화, 보편화되면 대한민국도 어쩌면 그리스처럼 ‘젊은이들의 만성적인 불만 폭발의 나라’가 될 수도 있지요. 결국 현금 상황의 절망성을 어느 정도 깊이 인식하는가 라는 문제는 핵심적일 듯합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