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는 겨울 사나이
        2009년 03월 27일 01: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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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우시인은 1975년 ‘겨울공화국’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2009년 오늘 <피디수첩>은 광우병 방송으로 체포, 압수수색 당하고 있다. 양성우의 ‘겨울공화국’이 되살아나고 있다.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가라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
    불끈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러쳐서 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러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체 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 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줄 것은 부끄러움 뿐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우리는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두고
    언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 섣달 모진 바람아
    네 쓸쓸한 칼끝으로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락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바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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