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예인의 몸은 '국민의 몸'
        2009년 03월 25일 10: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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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진실, 장자연 등 여러 연예인 자살 ‘사건’을 생각하면서, 그 근원적 이유를 한 번 파헤쳐볼까 합니다. 근인(近因)이야 특히 장자연씨의 경우에는 아주 분명합니다. 연예인은 ‘판촉’돼야 하는 상품이 될 때에는, 그 상품의 일차적인 구매자가 사실상 독점 기업(방송사 등등)일 때에 판매자에게 구매자가 얼마든지 무서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품’이 성애화된 이미지의 여성의 몸이라면, 독점적 구매자의 폭력은 또 얼마든지 성추행/성희롱/성상납 요구로 나타나게 돼 있다는 것이지요. 이 형태 자체는 예컨대 대기업들이 중소 하청기업들에게 행사하는 단가 인하 압력과 구조적으로 흡사한 것이고, 시장이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십분 보여줄 뿐입니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故 최진실, 정다빈, 유니, 이은주, 장자연(가운데)

    우리는 보통 ‘국가 폭력’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사실 국가보다는 시장은 어쩌면 더 끔찍한 폭력을 더 쉽게 행사하지요. 국가를 비판할 자유라도 우리가 지금으로서 갖고 있는데 (물론 이명박 시대에 접어들어 그 자유가 많이 축소돼갑니다) ‘나’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시장 행위자를 ‘나’는 나서서 비판한다는 것은 거래 중지와 시장으로부터의 퇴출을 전제로 하는 일입니다.

    ‘명문대’ 시간 강사 분들 같으면 ‘고용주’를 비판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경우를 이전에도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대학교는 방송사보다 이미지가 다소 ‘고상’하지만, 이 시장바닥에서의 ‘독점적 구매자’라는 점에서 흡사합니다.

    사장, 교수, 장관

    국가를 합리화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여론이 무서워서 대통령이나 장관이 자신의 부하에게 차마 할 수 없는 행위를, 교수가 되고 싶어하는 여성 대학원생에게 그 지도교수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주 용감한 극소수의 피해자들이 출세를 포기하면서 이 문제를 공론화시킨 덕에 우리가 이만큼 ‘공개적으로’ 아는 것이고, 우리가 ‘공개적으로’ 아는 부분은 현실의 빙산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피라미드적 시장 구조 (극소수의 구매자, 무수한 판매 희망자)가 근인이라면 원인은 ‘연예인의 신체’에 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시각에서 찾아야 할 듯합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미의 층위가 중첩됩니다. 일면으로는 크게 성공한 연예인은 ‘국민의 몸’이 됩니다.

    옛날에 신채호가 "영웅을 흠모하는 선진적 국민"을 찬양하곤 했는데, 자본주의 사회의 ‘영웅’은 스포츠영웅과 인기 연예인입니다. ‘욘사마’ 정도라면 현실 세계에서도 한일 관계의 하나의 변수가 된 것이지만, 특히 각종 ‘한류 스타’에 대한 ‘국민’의 시선에서 이와 같은 시각은 현저하게 발견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머나먼 태국이나 라오스에 가서 ‘우리 국민의 대표자’로서 그곳을 대중문화 차원에서 ‘정복’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들에 대한 현지인의 열광을 ‘대한민국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보통 성형수술을 거쳐 백인화된 듯한) ‘미모’는 미의 표준으로 취급되는 것이고, 그들을 안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속한다는 것과 동의어가 됩니다.

    제가 한 번 한 대중 강연에서 어떤 질문자가 김태희인가를 거론했을 때에 "그게 누구에요?"라고 물어봤을 때에 "그걸 어떻게 모르느냐"는 다수의 반응이었습니다. 김태희를 모르면 ‘간첩’, 즉 비국민입니다.

    불쌍한 이북 사람들에게 별로 잘 생기지도 않은 김정일 아저씨나 역시 별로 외모가 준수하지 못한 그 부모 친척밖에 아주 가시적인 ‘네이션 심볼’은 없다시피 하지만, 이 쿨하고 다이내믹한 위대한 대한민국은 자랑스럽게도 김태희나 장동건, 욘사마의 신체들을 그 상징으로 소유하고 있으니 유유자적하게 자애자중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이션 심볼’ 이야기는 최종 소비자 쪽 이야기지요. 판매 희망자 (연예인 지망생)와 판매 중계자 (기획사), 일차적 구입자 (방송사 등등)의 차원에서는 특히 성애화된 여성 연예인의 몸은 일차적으로 ‘돈을 벌어주는 기계’입니다.

    이 날씬한 다리, 이 ‘짜릿하고 파격적인’ 드레스 차림, 이 ‘귀여운 미소’, 이 모든 것이 ‘매력 만점’이어서 시청률을 높여야 하고, 광고를 찍어서 물건을 팔아야 하고, 영화들의 흥행 성공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지요. 시장에서의 돈벌이라면 당연히 경쟁이 붙기 마련인데, 연예인 사이에서도 ‘외모 경쟁’ 등등은 치열할 수밖에 없지요.

    누가 보다 많은 ‘매력’을 발산하는지, 누가 매체에서 보다 자주 나오는지, 누구의 몸값이 더 높은지, 누가 스타 반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점하는지. 자본주의 시스템은 다 그런 것이고 ‘몸값’이라는 아주 끔찍한 표현은 교수에게도 일선 회사원에게도 그대로 쓰이지만 아주 큰 돈이 왔다갔다하는 연예계에서는 ‘나 자신의 상품화하기’가 훨씬 더 철저합니다.

    살아 걸어다니는 광고판이자 은행 통장

    인생 자체가 이제 ‘판매’된 것이니까 어디에서 뭘 해도 늘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고, 개인 생활도 거의 다 공개돼 ‘매력’의 한 요소가 되니 연애하고 가정 꾸리고 하는 일 하나 하나 다 자기 자신의 ‘판촉’과 연결됩니다.

    마르크스나 프롬이 다시 깨어나도 ‘인간 상품’의 보다 완전한 형태를 못찾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도 거의 없어지는 듯하고 남은 것은 광고소득과 신문 연예계 뉴스 등등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비관자살을 안하겠습니까?

    저만 해도 이와 같은 코스를 가게 됐다면 조만간에 인생에 뜻을 잃어 죽음을 택했을 것입니다. 완전히 탈인간화돼 ‘살아 걸어다니는 광고판이자 은행 통장’이 되는 압력을 계속 받으면 도대체 더 이상은 왜 삽니까?

    근인이야 어떻든간에 연예계 종사자들을 자살하기 쉬운 환경에 집어넣는 것은 ‘자기 상품화’ 규범과 보편적 ‘인간성’의 충돌입니다. 인간으로 남으려는 사람은 이 규범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결국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다 얼마 지나면 그 죽음도 망각되고 줄거운 대한민국 대중들은 더 새로운 연예계 검투사들의 ‘짜릿한 드레스’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일본을 따라잡아 추월한 이 위대한 ‘쿨함의 제국’, 만세!

    * 이 글은 박노자 글방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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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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