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시대와 같았던 이승만의 농업세
        2009년 03월 24일 10: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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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승만 정권은 4.19 로 몰락했다. 4.19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대학생들이 경무대의 담을 넘으려고 하자 경찰이 발포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결국 하야했고, 이승만의 하야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

    필자는 과거부터 오랜 의문이 있었다. 인구의 절대 다수인 당시 농민들은 이승만의 하야에 찬성했을까? 1공화국 내내 선거의 양상은 여촌야도였고, 농촌은 자유당의 아성이었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억압되고 부정선거가 일상적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농촌에서 자유당 의원들이 많이 당선되었다고 해서 농민들이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 故 이승만 전 대통령

    하지만, 모든 권력은 수동적이나마 동의를 얻지 않으면 통치가 불가능하기에 국민들이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도 수동적이나마 동의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이 12년간 유지되었던 것이었고, 농민들 또한 수동적이나마 4.19를 지지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하야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

    당시 이승만 정권의 몰락은 부정선거가 직접적 원인이었지만, 임시토지수득세라는 세제가 농민들의 크나큰 원성을 샀다는 것이 다른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구의 절대 다수의 경제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분야에서 실정은 필연적으로 독재정권의 몰락을 앞당기기 때문이다.

    임시토지수득세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군량미를 마련하며, 전비 및 일반재정을 충당한다는 목적 아래 농민들이 경작하는 작물에 대해서 그 수확량의 15%에서 28%까지 누진으로 과세하는 세금이었다.

    세율은 10석 이하는 15%, 10석을 초과하는 수량은 20%, 20석을 초과하는 수량은 24%, 50석을 초과하는 수량은 28%, 농지개혁법에 의하여 분배를 받은 토지는 세율이 10%, 15%, 19%, 23%였다. (그외 특용작물에 대해서는 과표와 세율이 달랐다.) 즉, 1년에 10석(1800리터)을 생산하는 농민의 경우 1.5석을 납부하게 되는 세제였다.

    이것이 어느 정도 세율인가는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는데, 1951년 당시 1호당 경작 면적은 논과 밭을 합하여 8.97반보(2691평, 1반보=991.74㎡=300평) 밖에 되지 않았고, 900평 이상 1500평 이하 영세농가 전체 농가의 42.0%에 달하였으며, 3천평 미만 농가가 전체의 77%였다.

    당시 농업생산량으로 볼 때 300평당 약 2.4석 정도가 나왔으니 거칠게 말하면 전체 농가의 절반 가까이는 7.2석~12석 사이의 생산량을 보였다는 이야기이다. 평균이 10석이라고 하면 대다수의 농민들은 매년 1.5석을 내야 했다는 말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500평(=5반보) 정도 경작하여서는 그 수확량으로 가족들이 소비하면 남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3.

    일단 보면 15%라는 세율이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 농민들에게 과세되는 농업소득세도 3%에서 40%까지 누진과세한다. 게다가 당시에 이 임시토지수득세는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각종 세금을 통합한 것이었고, 정부 또한 특히 영세농민들에 대해서는 15% 이상은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을 수차례 약속하였다.

    심지어 당시 농민들에게 사실상 부과되던 각종 기부금을 금지하는 기부금품 모집금지법까지 같이 통과시키기 까지 했다.(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 법은 1990년대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 이 법은 헌재에서 위헌결정을 받아 그 법 내용이 바뀌었는데 위헌제청 신청을 한사람이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인 권영길이었다.)

    그러나, 이 임시토지수득세는 애초의 정부의 주장과 달리 농민들에게 지나치게 과중한 세금이었다.

    첫째, 이 세금은 현물세였다. 정부 초기이기는 하지만 농민들 또한 세금은 다 금납으로 하였는데, 이 임시토지수득세는 유독 현물세였다. 즉, 쌀의 경우 조곡(현미)로 직접 징수하였던 것이다. 현물세라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는 인플레이션이 매우 심한 시기였다.

    특히 전쟁 직후 서울 지역의 인플레는 매우 심하였는데, 이러한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도시지역에서는 식량이 모자랐고, 이러한 식량을 확보해서 배급하는데 많은 예산이 소요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쌀의 물가상승률과 일반 물가상승률은 차이가 많이 났다는 데에 있었다.

    예를 들어 서울 소매물가지수는 1950년 6월과 1951년 5월을 비교해보면 65.6%가 올랐는데, 쌀가격은 120%가 올랐다. 세금을 현물로 거두면 그만큼 통화를 발행할 필요가 없고 인플레이션 억제효과는 있을 것이지만, 이것은 농민들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 4.19 혁명 직후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산품 가격 인상보다 쌀가 격인상율이 높다면 농민들은 당연히 구매력이 느는 것인데 임시토지수득세는 현물로 징수하기 때문에 농민들의 구매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이 상황은 스탈린이 NEP(신경제정책)을 종결시킨 것과 동일한 상황이었다. 러시아에서 농민들이 곡식을 내놓지 않아 도시의 공산품과 농산물과의 교환가격의 차이가 더 크게 되어 도시에서의 식량부족 등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쌀값의 앙등과 전쟁 속에서 한국농민들은 더더욱 쌀을 내놓을 이유가 없어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독 농민에 대해서만 현물세를 부과한다는 것은 합리적 타당성이 없었다.

    둘째, 수확량으로 과세를 하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수확량으로 과세한다면 만약 남는 것이 없더라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지금의 농업소득세도 남는 것이 없다면 농민은 세금을 전혀 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소득은 수익에서 필요경비를 공제하기 때문에 생산에 투여된 비용이 크다면 원칙적으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임시토지수득세 이전의 지세 또한 수확량으로 과세를 하였지만 이것은 세율이 4%로 비교적 낮은 것이었다. 그런데, 임시토지수득세는 15%~28%까지 수확량으로 과세를 하니 실제로 소득대비로 과세를 할 경우 그 세율은 그 두 배 이상에 달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농지분배를 받은 사람은 평년작 수확량의 150%를 5년에 나누어 내야 하였으므로 1년에 30%를 내야 했기 때문에 세율이 일부 감해지기는 했지만 농민들의 부담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었다.

    셋째, 정확하게 수확량이 측정되지 않았다. 농지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하여 수확량을 측정하였는데 표준지를 정하여 인근의 땅은 그 표준지에 맞추어 과세하는 인정과세가 강행되었다고 한다. 이 경우 토지가 비옥하지 않거나 수리시설이 미비하여 수확량이 낮은 경우에도 동일하게 과세되어 실제 그 부담은 매우 늘어났다.

    넷째, 이 세금은 면세점이 없었고 기초공제도 없었다. 보통 이러한 세금은 면세점이 있거나 가족 수 등을 이유로 공제가 있기 마련인데 임시토지수득세에는 이러한 조항이 전혀 없었다. 다만 논의 경우 5석, 밭의 경우 3석 미만의 경우 3할을 기초공제한다는 형식적 공제조항만 있었을 뿐이었다.

    4.

    실제 농민들이 이 세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보면 농민들은 이를 일제시대 공출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의 공출은 일제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농민들로부터 헐값으로 식량을 사들였던 제도인데 농민들이 이에 저항하자 일제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식량을 찾아내어 몰수하였다.(당시 한 국회의원은 자신이 50석 농사를 지었는데 30석을 공출을 당하였고, 그 대가로 받은 5천환은 온갖 기부금을 내는데 다 충당되어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국회에서 발언한 바 있다.)

    이러한 관행은 정부 수립 이후에도 시정되지 않았다. 식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쌀을 싼 값에 사들이는 방법을 여전히 취하였고, 기부금 또한 한 국회의원의 주장에 의하며 36가지에 달했다는 것이다. 임시토지수득세에 반대했던 또 다른 국회의원은 임시토지수득세의 세율이 일제시대 공출과 거의 대동소이하며 대가를 주지 않기 때문에 공출보다 훨씬 더 심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당시 전쟁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국회에서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자유당이 창당되기 전 2대 국회에서 통과된 것으로 정부측은 국회에서도 다수를 점하지 못했음에도 필요성이 그 내용을 압도하기 이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법안 통과시 사회를 본 것은 농지개혁을 주도한 조봉암(당시 국회부의장)이었다. 농지개혁을 주도한 조봉암이 사실상 일제 공출의 재판인 농업토지수득세 도입에 기여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전쟁이 끝났지만 임시토지수득세는 폐지되지 않았다. 단지 세율만 조정이 되었을 뿐이다. 세 번의 법률개정으로 6~18%(농지분배대상토지는 4~17%)가 되었다. 당시 정부로서는 1인당 GDP가 100달러도 되지 않는 경제인데다가 예산의 50% 가까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안정적인 세입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문제는 농지개혁으로 소작인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나 인구의 절대 다수가 된 영세농민에게 전쟁이 끝났는데도 공출과 다를 바없는 임시토지수득세를 유제하는 이승만 정부는 일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찌보면 이승만 정부를 과연 한국의 농민들이 7년 동안이나 두고 본 것만 해도 많이 참아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 하는 일 없이 몰락한 장면 정부조차 임시토지수득세는를 1960년 12월 31일 자로 바로 폐지한 것만 보아도 이 문제에 대한 농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음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 한 것은 농민의 아들로 농민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1964년 ‘농지세 징수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통하여 농지세 현물 징수를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이로써 농민들은 또 한 번 기망과 배신의 정치를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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