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로동, 1987년 그리고 ‘빨간 바지’
        2009년 03월 20일 05:0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빨간 바지에 새하얀 와이셔츠, 금테 안경을 낀 잘 생긴 청년이 서울 구로공단의 한 공장을 찾은 것은 전두환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87년 어느 날이었다. 이 청년이 들고 온 생산직 노동자 입사원서에는 학력이 초등학교, 그러니까 당시로서는 국민학교 중퇴로 적혀 있었다.

    ‘빨간 바지 청년’은 노동운동을 위해 학력을 속인 ‘위장취업자’ 신언직이었다. 신언직이 경희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1982년은 광주학살의 원흉 전두환 처단과 그 배후 미국에 대한 책임을 묻는 투쟁이 대학가를 휩쓸 때였다.

    1987년, 위장 취업자

       
      ▲ 신언직 서울시당 위원장 후보

    1985년 삼민투의 거리투쟁에서 ‘고공야사’로 시위를 주도한 신언직은 그해 구속돼 1년 만기 징역살이를 마치고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빨간 바지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난 신언직보다 한 해 빠른 1986년에 위장취업했는데, 워낙 ‘친노동 마스크’라 취직할 때 의심받으리란 걱정도 안했고, 실제로 아무 문제없이 취직에 성공했다.

    하지만 신언직은 덩치도 있는 데다 생긴 게 곱상한 귀공자 타입이라 별도의 작전이 필요했고, 결국 빨간 바지를 입게 된 것이다. 차림새와 생김새에서 풍기는 인상과 학력이 영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떻게 입사에 성공했을지 난 대충 감이 잡힌다.

    신언직은 좀 그런 사람이다. 뭔가 칙칙하고 인류의 숙제를 모두 자기가 해결해야 할 것처럼 인상 쓰고 다니는 나 같은 운동권하고는 스타일이 좀 다르다. 재기 발랄하고, 아이디어가 넘치고, 사고를 사방팔방 열어놓고 기상천외한 발상과 방법으로 상황을 타개하고, 아닌가 싶으면 과감히 털고 새로 시작할 줄 아는, 일단 부딪치고 보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 사귀는 일’ 타고난 사람

    ‘빨간 바지’ 얘기는 내가 신언직을 알기 전 일이라 나중에 그한테 들은 것인데, 취직해 공장에 다니다 6월항쟁이 터져 구로공단 네거리 시위에서 붙들려갔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이 잡히는 바람에 경찰도 정신이 없는 때였다. 그래서 가짜 주민증 대고 일단 불구속으로 풀려났는데 경찰이 나중에 알고서 공장으로 잡으러 왔단다. 그런데 공장 2층 사무실에서 경찰이 전화하는 사이에 유리창 너머로 뛰어내려 ‘도주’해 수배자가 됐단다.

    내가 신언직을 처음 만난 건 그가 1990년 결성된 전노협 쟁의국에서 일하면서 조직사업을 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닐 때였다. 난 경기도 반월공단을 떠나 여차저차해서 부산으로 내려가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현대중공업노조 대우조선노조 등 배 만드는 노동자들의 조직인 ‘조선노협’에 일할 때 그가 찾아왔다.

    첫 눈에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외모의 사나이가 중앙에서 내려왔다며 특유의 예의바르고 친숙한 태도도 ‘접근’했던 것 같다.

    그가 빨간 바지를 입었을 때는 이미 ‘CA그룹 노동자해방동맹’ 소속이었으며, 박노해 백태웅 등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사노맹을 창립한 초기 집행부의 일원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안 일이다. 그는 수배자의 몸으로 인천 노동자대학을 도맡아 하면서 사람 상대하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요즘 돈으로 치면 수억 대 자금을 조달하는 등 사업을 펼치다가 1990년 또 구속돼 2년을 꼬박 감방에서 지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동구사회주의권이 붕괴했고, 석방된 뒤에는 ‘지구전’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사노맹을 정리하고 전노협에 들어가 대중운동에 복무하게 된 것이다.

    난 활동할 때 사노맹하고는 거리를 느꼈던 게 사실이지만, ‘괜찮은 친구’ 신언직이 했다는 노선이라고 하니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또 정파가 다르다는 게 별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신언직 때문에. 다 지난 일이긴 하다.

    "진격하라" 봉고차 위의 무인(武人)

    내가 겪어보기에 신언직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귀는 일에 타고난 사람이다. 조직사업은 그의 전문 분야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하고도 금방 몇 년 사귄 사이처럼 된다. 정파가 다르거나 나이 차이가 있거나 뭐 문제될 게 없다.

    서로 노선이 다른 진보운동의 어른들은 그에게는 일단 ‘어른’이며, 다른 정파의 동년배들도 그에게는 일단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활동가다. 다 존경하는 선배들이요, 다 술친구다. 몇 년 같이 일하고 속을 알아야 겨우 사귀는 나와는 영 딴판이다. 그런 성격 탓인지 신언직은 조직 쪽 일을 나는 교육홍보 쪽 일을 하며 나이가 들어갔다.

    1999년부터 단병호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신언직과 나는 각각 조직과 대변인 업무를 맡아 민주노총에서 함께 일했다. 그는 37살, 나는 38살로 노동운동 10년을 훌쩍 넘기고 이미 자식까지 거느리고 있는 가장이었다. 생활문제나 이후 전망 때문에 고민도 많았지만 5년 동안 후회 없이 모든 걸 다 바쳐서 일했던 것 같다.

    이 기간 동안 민주노총 합법성을 쟁취하고 주5일근무제를 도입했으나, 비정규직 노동문제를 이슈화하는 데서 더 나아가 노동운동의 실질적 과제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반성을 하곤 하는 세월이다.

    경찰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웃통을 벗긴 채로 집단구타해 난리가 났던 일을 기억하겠지만, 그 당시 신언직은 민주노총 조직실장으로 서울 종로통 수만 명 시위대 앞 봉고차 위에서 “진격하라!”고 외치던 ‘무장’이었다. 그러다 결국 또 구속이 돼 세 번 째 징역살이를 하게 됐다.

    세 번째 감옥에서 출소하니 마흔이 넘었다. 이 때부터 신언직은 민주노총에서 정치국장을 맡아 2004년 총선 준비를 비롯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 뒤 신언직은 단병호 의원 보좌관으로 나는 심상정 의원 보좌관으로 4년을 국회에서 함께 일했다.

    정치판에 오니 신언직은 더 기발한 생각이 많이 나는 듯했다. 나와는 같은 의원회관 7층 약 70미터 거리에서 근무했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와 괴롭혔다.

    하루는 미국 진보진영의 선거 패배를 다룬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다음 날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묻는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들고와 들쳐가며 쏟아내는 수많은 화두들…. 어디서 그렇게 열정이 솟아나는지 대단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일관된 삶…몸이 앞서는 ‘돌파형’

    최근 1∼2년, 그러니까 2007∼2008년은 신언직이 제2의 운동인생을 시작한 때다. 2007년 심상정 의원이 ‘심바람’을 일으키고 진보혁신을 위한 비대위 활동을 하던 현장에 난 그와 함께 했다. 그는 치고 나가고 나는 신중하고 우린 또 그렇게 콤비를 이뤘다. 그러나 그 뒤 좀 쉬었다 가겠다는 나와 달리 신언직은 곧장 또 앞으로 뛰쳐나갔다.

    강남지역에서 본격적인 진보정치를 하겠다며 총선에 출마하질 않나, 촛불집회 때 거의 날마다 거리에서 밤을 새우질 않나, 서울시교육감 주경복 후보 지역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뛰다가 검찰 수사를 받질 않나 도무지 나로서는 따라가기 힘든 속도였다.

    어느 날 소주 한 잔 하면서 지치지도 않느냐, 좀 쉬었다 하면 어떠냐고 했더니 “쉬면 뭘 해, 어려운 때인데 뭐라도 자꾸 해봐야지.” 나를 머쓱하게 만들며 돌아온 대답이었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 아무리 성격 좋고 남 앞에서 힘든 표시 안 내는 신언직이라고 왜 고민이 없을까. 어머니 모시고 자식 둘 키워가며 시대에 복무하느라 마누라에게 매일 미안하고,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지금 기약도 없이 내딛어야 하는 발걸음이 어찌 가볍겠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을 쉬게 할 줄을 잘 모른다. 난 아직도 생각 중인데, 그는 벌써 저기 가고 있다. 붙들고 물어보면 속으로 별의 별 거 다 생각하고 따져볼 거 다 따져보고 있다. 그러나 몸이 앞서고 추진부터 하고 보는 스타일은 참 변하지 않고 말리기도 쉽지 않다.

    그가 또 가려 한다. 아니 벌써 주욱 나아갔다. 신언직은 지금보다 훨씬 어둡고 앞날이 뿌옇던 지난 20여년을 그렇게 헤쳐나온 사람이다. 이제 곧 나이 오십이다. 선배 세대들의 무거운 짐을 넘겨받아야 할 나이기도 하다. 자신이 만난 시대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기꺼이 짐을 지려는 신언직이 한편으론 안쓰럽고 한편으론 마음 든든하고 존경스럽다.

    누군들 완전하겠는가. 아니, 완전하지 않으면 어떤가. 더 열심히 더 성실하게 시대에 복무하려는 삶이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겪어본 신언직은 뭘 맡겨도 안심이 되고,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며, 결국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친구 신언직에게 마음을 담아 응원을 보낸다. ‘빨간 바지 신언직’ 화이팅!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