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야구부터 섹스투어까지
        2009년 03월 19일 09: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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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의 여러 문구 중에서도 제가 가장 사랑하는 문구는 아마도 『경제-철학 초고』(1844)의 다음과 같은 문구입니다:

    "What constitutes the alienation of labour?
    Firstly, the fact that labour is external to the worker – i.e., does not belong to his essential being; that he, therefore, does not confirm himself in his work, but denies himself, feels miserable and not happy, does not develop free mental and physical energy, but mortifies his flesh and ruins his mind. Hence, the worker feels himself only when he is not working; when he is working, he does not feel himself. He is at home when he is not working, and not at home when he is working. His labour is, therefore, not voluntary but forced, it is forced labour"

    "노동의 소외란 무엇인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재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노동자의 실존적 존재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노동자는 그 노동에서 자신을 확립시키지 못하는 것이고 그 반면에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노동자는 노동 과정에서 불행하고 불쾌하게 느끼고, 유쾌한 심신의 기운을 발산하지 못하는 반면 그 심신을 파괴시킨다.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을 때만 행복감을 느끼고 노동할 때에 불행감을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에 집과 같은 느낌이고 노동할 때에 ‘바깥’이다. 즉, 그의 노동이란 자원적이지 않은, 강요받은 노동이다."

    노동하면서 당신은 행복하신가요?

    지금, 오늘날의 노동에 적용시켜도 그렇게까지 틀리지 않은 말일 것입니다. 공장에서 로봇처럼 똑같은 동작을 높은 속도로 반복해야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정신 노동자라 해도 행복감을 느끼는 경우는 차라리 예외일 것입니다. 물론 아이를 대할 때에 행복할 수야 있지만, 수능 준비를 시켜야 하고 30~40명을 동시에 가르쳐야 하기에 ‘가르치는 행복’을 느낄 만한 겨를이 없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즉, ‘일감’ 자체야 재미있고 좋지만 자본주의적 체제가 조직, 관리하는 ‘일’은 별로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학자로서 연구하는 기쁨이야 느낄 수 있지만, 1년에 3편의 논문을 생산하여 학진 등재지에 실어야 한다는 체제의 요구를 무조건 만족시킬 때에 그 무슨 행복감도 느낄 만한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노동 그 자체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원천이지만, 소외된 자본주의 하의 노동은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고 결국 소모시키고 맙니다. 뭐, 성균관대에서 요즘 ‘명품 인재’를 만든다고 스스로 자랑들 하는데, 마르크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스스로 다 했네요. ‘명품’, 즉 유명한 인간 상품을 만드는 게 이 체제 하의 교육의 유일한 목표이지요.

    강요받은 노동이 좋을 리가 없고 인간이 상품화되는 걸 스스로 거부해야 한다고 마르크스가 생각했기에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적 모순’이 설정된 것이었습니다. 모순이 있는 것이야 십분 동의하지요. 스트레스를 받고 왕따를 당하고, 남을 왕따시키고 빨리 집에 가고 싶고, 늘 불행하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자본주의 하의 노동자를 보면, 그 모순의 규모를 실감하지요.

    생산자와 소비자는 不二

    그런데 과연 적대적인, 즉 해결이 불가능한 모순인가요? 『경제-철학 초고』에서 마르크스가 "노동자가 많이 생산할수록 덜 소비한다"고 적고 있을 만큼 생산자를 소비자로 보지 않았는데, 21세기 벽두 자본주의의 제1철칙은 바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不二’입니다. 자본주의가 바뀌었다면 그게 바뀐 것이지요.

    노동자가 5주 휴가 동안 그리스에서의 호텔과 각종의 휴양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는 유럽은 그렇다 치고도, 5주 휴가가 없는 이 ‘중간적’ 준주변부의 대한민국에서마저도 노동자가 ‘노예 노동’의 8~10시간을 꾹 참고 견디고 나면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소주와 삼겹살 이외에도 많습니다.

    ‘한일전’에서 우리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쪽바리들을 깨부셨다는 국민적 승리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의 유명 연예인의 표정연기와 예쁜 하얀 살갗의 이미지, 달콤한 유행가의 소리, 그리고 백화점에서의 판매원 아가씨의 친절한 웃음과 존대말….

    비정규직 노동자라 해도 위에서 말한 ‘국민적 기쁨’부터 서비스 노동자의 감정 노동의 결과까지, 다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남성 정규직이면 거기에다가 온갖 ‘플러스 알파’들이 또 들어가지요. 베트남 섹스 투어와 같은 부분들 말씀입니다.

    착한 사람 마르크스는, ‘완성된 인간’이 되기를 지향하는 노동자가 당연히 자기 상품화를 거부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 상품화를 노동자가 즐길 수도 있다는 걸, 아직 원시적 축적 상태인 그 당시의 영국 자본주의를 보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지요.

    노동자 밑에 노동자 있다

    그러나 노동자 밑에도 노동자가 있고, 노동자 위에도 노동자가 있는 오늘날의 완숙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위에 있는 노동자에게 밑에 있는 노동자의 자기 상품화란 ‘즐거움’ 그 자체가 될 수 있지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는 전문직 남성 정규직 노동자가 여승무원의 섹시한 외모와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 매너 등 강요받은 그 친절을 안 즐기나요?

    은행에 들르는 정규직 노동자는, 창구에서 노동하면서 그 친절도의 평가를 손님한테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무조건적 친절’을 안 즐기나요? 강요된 친절이야말로 자기 상품화의 최악의 표현인데 말씀입니다.

    복합화된 자본주의 사회라는 피라미드에서는, 약간이라도 높은 위치를 점한 노동자는 거의 당장에 그 생활 양식/성향상 ‘새끼 자본가’로 둔갑되지요. 부동산과 주식 투자 등을 통해서 자본의 세계와의 연계를 모색해도 그 밑에 있는, 보다 가난한 여성/저숙련/외국인/청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꺼립니다. 분리통치가 지금처럼 완벽해질 수 있다는 걸 마르크스가 예측할 수 있었나요?

    자본주의의 주기성 – 필수적 공황의 도래, 이윤율저하 원칙 등 때문에 노동자들이 구조적 고통을 받게 돼 있지만, 약간이라도 체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갖게 되면 그 체제의 아주 보수적일 일부분이 되고 맙니다.

    감옥이 즐겁고 달콤하기만 하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 감옥의 종신 수인을 자청할 확률은 매우 높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비자본주의적 대안의 매력을 보여주자면, 이미 죽은 100년 전의 혁명가들의 이야기를 백 번, 만 번 반복하는 것보다는 수유연구실처럼 ‘자본 없는 즐겁고 발랄한 앎의 공간’이라도 만들어 자본이 없을 때에 앎이란 얼마나 맛이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더 효율적일 걸요.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과거 위인 이야기를 하느니,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자본의 사슬을 벗는 위인이 되면 사람들이 일단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꼭 학벌 따고 월급 받고 상사에게 아부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요? 물론 진보정당 등은 임금노예들의 인생을 개선하도록 노력도 해야 하지만, 또 다른 차원에서 자본주의 ‘이후’를 ‘가시적으로’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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